[댄스 마라톤 - 1930년대 춤 경연대회의 마라톤 댄스]
대공황의 시기인 1930년대, 댄스 마라톤은 황당한 대회였습니다. 수백 시간이나 계속 서서 춤을 춘다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긴 마라톤 댄스는 대회에 참가한 커플들의 인내심과 정신력을 시험하는 이벤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연도 있지만, 세상이 달라져도 간간이 댄스 마라톤은 유지되었습니다. 대신 금전적인 목적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자선 마라톤 댄스 대회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930년대 댄스 마라톤 대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 세계는 '대공황'으로 매우 우울한 시대를 맞았습니다. 1930년대 미국 역시 마찬가지로 어려운 경제 사정 때문에 돈을 번다면 무엇이든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흐름 때문인지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대회가 열리기도 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댄스 마라톤'입니다.
(사실 댄스마라톤대회의 역사는 무려 90년에 가까워진다. [1930년대 춤 경연대회 댄스 마라톤] / ⓒ National Photo Company)
댄스 마라톤의 규칙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최후까지 서서 춤을 추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남녀가 한 쌍이 되어 추는 이 마라톤 댄스는 어느 쪽이든 무릎이 땅에 닿으면 안 됩니다. 커플들은 서로를 깨우며, 또는 잠든 상태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끝까지 춤을 췄습니다. 심사관은 무릎이 닿는 사람이 있는지 감시를 하다가 발견하면 밖으로 끌어내는 일을 했습니다.
(댄스 경연대회 중 잠에 빠져버린 참가자 커플. [대공황과 마라톤 댄스 대회] / ⓒ messynessychic.com)
1930년대 댄스 마라톤 대회는 1시간 50분 동안 춤을 춘 후에 10분 간의 휴식이 반복되는 대회였습니다. 사람들은 탈락하지 않기 위해서 그 10분 동안 밥을 먹고 얼굴을 씻고 면도까지 했고, 화장실과 잠깐의 쪽잠을 처리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잠을 깨우느라 흔들고 뺨을 때리기도 했는데 댄스장 밖에는 간호사도 침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473시간 동안 마라톤 댄스를 췄던 커플의 우승. [1930년대 춤 경연대회 댄스 마라톤] / ⓒ pinsdaddy.com)
이것은 실화입니다. 144개 팀이 참가한 댄스 마라톤은 가혹한 생존 경기였으므로 1주일 만에 61개 팀이 탈락을 했습니다. 어떤 댄스 마라톤에서는 상대가 실신하면 다른 짝과 다시 커플이 되어 이어나가기도 했습니다. 상금 1000달러가 걸려 있었던 이 마라톤 댄스의 승자는 1473시간이나 춤을 춘 사람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무식한 댄스 마라톤이 있었을까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은 호황을 맞이했습니다. 유럽의 피해가 깊을수록 멀리 떨어져 있던 미국이 팔 것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닥치면서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순식간에 기업이 파산하고 일자리가 줄어들었으며 생활 빈곤으로 자살을 하는 사람도 늘어났습니다.
(1920년대에 시작한 세계대공황에서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 [대공황과 마라톤 댄스 대회] / ⓒ moneyweek.com)
바로 이런 시기에 유행했던 것이 댄스 마라톤입니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까지 마라톤 댄스를 추를 이 대회는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처음엔 1923년 경 한 여성이 무도회장에서 27시간 동안 쉬지 않고 춤을 추는 기록을 세우며 관심을 받았는데, 1933년에는 정규 규칙도 정해졌고 1935년에는 전미 댄스 마라톤 협회가 출범하였습니다.
(규칙은 단순하다. 1시간 50분의 춤과 10분 간의 휴식이다. [1930년대 춤 경연대회 댄스 마라톤] / ⓒ oldpicsarchive.com)
참가자에게는 상금을 받는 것도 중요했지만 대회에 참가하는 동안에는 공짜로 밥과 여러 가지를 제공받는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만큼 힘든 시기였다는 뜻입니다. 한편으로는 대공황으로 부의 편중이 더욱 심해져 서서 기꺼이 돈을 내고 이 지루한 경기를 구경 오는 관람객도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떤 대회에서는 백쌍이 넘는 커플이 참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대공황과 마라톤 댄스 대회] / ⓒ messynessychic.com)
마라톤 댄스라는 것이 황당한 일이지만 생각 외로 많은 관심을 받으며 문화 트렌드로 성장하였습니다. 관객들은 커플들이 댄스 중 졸거나 늘어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기도 했고, 끈질긴 체력에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일명 "인내심 댄스"라고도 불렀으며, 피곤에 지쳐 걷는 동작이 되어 버린 댄스를 비유하여 "워커톤(걷는 마라톤)"이라고도 했습니다.
아직도 이어지는 댄스 마라톤
1930년대에 마라톤 댄스를 했던 사람들에게 이런 대회는 하나의 탈출구였습니다. 저항 불가능한 경제적 불황과 무기력한 사회적 현실을 다른 방식의 흥밋거리로 분출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체력의 한계에 도전하며 먹고사는 문제가 아닌 인간의 근본적인 인내심으로 눈길을 돌리는 경기였다고 하겠습니다.
(전국적인 관심이 생기자 전문 치료팀까지 준비하고 하는 대회도 있었다. [1930년대 춤 경연대회 댄스 마라톤] / ⓒ mirror.co.uk)
그런데 1940년대를 지나서도 댄스 마라톤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극한의 시대만큼 열광적인 도전을 하지는 않았고 스포츠처럼 특별한 목적을 위한 대회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1930년대 춤 경연대회에서 마라톤 댄스를 벌인 것이 금전적 목적이었다면 그 후에는 자선 봉사나 주장 전달을 목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돈을 내는 관람객이 있었다. 물론 한 두시간씩만 보고 가는 것이지만... [대공황과 마라톤 댄스 대회] / ⓒ wonkette.com)
1930년대의 춤 경연대회와 달리 현대의 마라톤 댄스들은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라인댄스 같은 댄스협회들은 대축제 중의 하나로 댄스 마라톤을 열고 있으며, 미국의 모 대학에서는 자선행사를 벌여서 108억 원을 모금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상명대 등에서 소아암 어린이 돕기 댄스 마라톤을 열곤 합니다.
(현대에는 자선행사 모금활동으로 바뀐 마라톤댄스대회다. [춤 자선행사 댄스 마라톤] / ⓒ ufhealth.org)
1930년대의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총칼 아래에 있었고 세계는 대공황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댄스 마라톤은 거의 걷다시피 억지로 견뎌내는 댄스 대회였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을 이어온 마라톤 댄스 대회는 절박함을 벗어나 나름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내를 통해 남을 돕는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