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세한도그림 뜻과 주제 - 손재형이 지킨 문화재]
문화재를 지키려는 한 사람의 노력 덕분에 일본으로 넘어간 국보가 다시 우리에게 되돌아 온 일화가 있습니다. 국보 세한도는 하마터면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림일 수도 있었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을 살려낸 서예가 손재형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또한 이 그림은 문인화이므로 미술적인 해석보다는 세한도의 뜻과 주제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글의 순서]
1. 세한도그림과 손재형의 사연
2. 추사 김정희와 손재형, 그리고 손창근
3.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
[엮인 글 링크]
세한도그림과 손재형의 사연
'추사 김정희'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조선의 문인입니다. 김정희의 '세한도'는 많은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국보입니다. 현재 국보 180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서예가이며 고서화 수집가였던 '손재형'의 열정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의 불길 속에서 건저 져서 우리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는 아시아를 침략한 후 1940년대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일본으로 수집되어 갔었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사연인 것입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의 모습. 이 곳에는 물론 매우 중요한 국보급 문화재들이 많지만,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도 보관되어 있다. 손재형이 되찾아 온 후, 손세기, 손창근을 거쳐갔다. [세한도그림과 손재형의 사연] / ⓒ Ian Muttoo)
1940년대,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는 옛유물이 마구 거래되는 암흑기를 맞았습니다. 이때 추사 김정희를 흠모하는 일본의 한 학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후지쓰카 지카시'교수였습니다. 그는 김정희의 수많은 작품들을 수집하는데 노력했습니다. 1940년 초반, 경성제국대학에 동양철학 교수로 있던 후지쓰카 지카시는 경매에 참여하여 마침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을 차지했습니다.
그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의 고서화 수집가 손재형은 어떻게든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오고 싶었습니다.
(사진: 과천문화원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는 후지쓰카 지카시 교수의 모습. 후지쓰카 지카시는 최초로 추사 김정희를 연구한 추사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손재형이 찾아갔던 교수다. [세한도그림과 손재형의 사연] / ⓒ gccc.or.kr)
손재형은 후지쓰카 지카시 교수에게 접촉하여 김정희의 세한도를 넘겨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후지쓰카 지카시는 추사 김정희가 좋아서 수집하는 것이므로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넘겨줄 수 없다고 냉정하게 잘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1944년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국보급 유물을 넘겨줄 수 없었던 손재형은 거액의 자금을 마련해서 일본까지 쫓아갔습니다.
일본은 연합군의 공습에 의해 매우 위험한 곳이 되었지만, 손재형은 각오하고 위험을 무릅쓴 것입니다. 석 달도 넘게 손재형이 찾아오자 마침내 후지쓰카 지카시도 그의 끈기와 진정성에 감복했습니다.
(사진: 제2차세계대전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장면. 실제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을 보관했었던 일본 교수의 집은 화재로 불탔었다. [세한도그림과 손재형의 사연] / ⓒ 제2차대전 기록사진)
마침내 손재형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을 양도 받아서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연합군의 공습에 후지쓰카 지카시의 집이 불타버렸습니다. 그가 수집했던 추사 김정희의 다른 작품들도 많이 불타버렸습니다. 하마터면 우리의 문화재 세한도가 한줌의 재로 변할 뻔 했던 것입니다.
영화처럼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기고 한국으로 돌아온 세한도지만, 그 후에도 역경은 계속되었습니다. 손재형이 정치에 들어서며 자금압박을 받아 고리대금업자에게 담보로 맡겨진 것입니다. 결국 손재형은 소유권을 포기했는데, 수장가 '손세기'에 의해 인수되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추사 김정희와 손재형, 그리고 손창근
추사 김정희는 조선 후기인 1786년부터 1856까지 살았습니다. '헌종' 때 성균관대사성과 이조참판에 올랐으며, 노론 계열이었지만 '북학파'가 된 실학자입니다. '박제가'와 '박지원'의 문인이며, 김정희의 학문계열에는 '흥선대원군'이 있습니다.
고증학파이기도 한 유학자 김정희는 서예, 그림, 금석학에서 대가입니다. '금석학'이란 돌이나 금속에 새겨진 글자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는 옛비문의 글자를 연구해서 만들어진 독특한 글씨체입니다.
(사진: 추사 김정희의 초상화. 김정희는 세한도로 유명한 서예가이며 학자이며 정치인이었다. 금석학을 연구해 완성한 추사체가 특히 유명하다. [추사 김정희와 손재형, 그리고 손창근] / ⓒ 작자 미상)
우리가 보통 '추사' 김정희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서예체인 추사체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김정희의 호는 추사, 완당 등 100여개가 넘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헌종 때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그린 그림입니다.
김정희의 글과 그림은 기교보다는 담백한 아름다움을 중요시합니다. 특히 마음가짐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인화풍으로, 간결하고 선이 고은 화풍을 지녔다고 평가받습니다. 경성제국대의 후지쓰카 지카시는 최초의 추사 김정희 전문 연구가였습니다.
(사진: 소전 손재형은 서예가이며 고서화 수집가인데, 제2차 세계대전의 불길 속에 사라질 뻔한 김정희의 그림 세한도를 구한 인물이다. 배경은 소전의 글씨인 소전체. [추사 김정희와 손재형, 그리고 손창근] / ⓒ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을 살려낸 인물 손재형은 소전이라는 호를 가진 서예가이며 고서화 수집가입니다. 진도의 갑부집 아들로 태어나 간송 전형필 다음가는 수장가였다고 합니다. 소전 손재형도 추사 김정희처럼 금석문 연구가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글씨체는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소전 손재형이 최초로 "서예"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그 전엔 서예를 글 쓰는 법이라 하여 서법(書法)이라고 했었지만, 손재형 이후엔 글 쓰는 예술이라는 뜻인 서예(書藝)라고 하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사진: 손재형이 자금 곤란으로 포기한 소유권을 인수한 손세기의 아들 손창근 옹. 그는 1000억원대의 기부를 하고도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피한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와 손재형, 그리고 손창근] / ⓒ blogs.chosun.com/pichy91)
소전 손재형이 위험을 각오하고 일본까지 가서 구해 온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은 개성 갑부 출신의 상인 손세기가 인수하였습니다. 세한도는 손세기의 아들 '손창근'이 이어받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되었습니다. 기증은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이며 기탁은 관리를 맡기는 것이므로 아직 소유권은 송창근에게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덕분에 지금 우리는 추사 김정희의 뜻 깊은 세한도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손창근은 골프장 등의 난립으로 산림이 훼손되는 것을 반대하며 1000억 원대의 산림을 국가에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
수묵화인 세한도는 김정희가 '윤상도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 귀양을 가 있던 중, 1844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당시 역관 중에 '이상적'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김정희를 스승처럼 생각하며 중국에 두 번이나 가서 책을 구해 오기도 했습니다.
이에 감복한 추사 김정희는 세한도그림을 그려 주었다고 합니다.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 잣나무에 비유해서 그린 그림입니다. 다른 나무는 다 낙엽 져 떨어져도 추운겨울 가장 늦게까지 잎을 견디는 소나무와 잣나무는 지조를 상징합니다.
(사진: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의 그림 본부분. 소나무와 잣나무가 보는데, 이것은 지조와 인품을 상징하고 있다. 세한도가 그려진 유래는 이상적이란 인물에게 선물하기 위함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 / ⓒ 김정희)
즉 "선비는 권세가 있을 때나 힘이 없을 때나 똑같은 인품을 지녀야 한다"는 의미로 이상적을 칭찬한 것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의 뜻입니다. 권력을 잃고 귀양을 살고 있어도 한결 같이 대하니 고마웠을 것입니다. 이상적도 추사의 그림을 받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감격하는 마음을 적어 세한도 옆에 붙였고, 중국에 가지고 가서 명사들의 소감도 받아서 붙어 이었습니다.
그래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두루마리 형태의 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문인화는 그림 자체보다 상징하는 뜻과 사연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사진: 김정희에게서 세한도를 선물받은 이상적이 기뻐하며 그림에 대한 사연을 적어서 이어붙인 전체 그림. 문인화를 이렇듯 그림이 내포하는 뜻과 해석이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 / ⓒ 김정희)
국보 180호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은 미술적인 기교는 그리 높은 편은 아니라고 합니다. 원래 문인화라는 것 자체가 그리는 기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운데에 세 그루, 왼쪽에 두 그루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있으며 그 사이에 있는 집은 원근법에 맞지 않게 삐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왼쪽에는 이상적과 명사들의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당시에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과 이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림입니다.
세한도를 해석하자면 새해 세(歲), 추울 한(寒), 그림 도(圖)입니다. 설 전후의 매우 추운 겨울을 나타냅니다.
(사진: 손재형이 지키고 손창근이 기탁한 세한도의 중앙 부분. 아주 추운 겨울에도 본래의 모습을 굳굳하게 유지하는 소나무, 잣나무가 그려져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 / ⓒ 김정희)
뒷이야기로, 후지쓰카 지카시의 아들들은 남아 있던 김정희의 작품들을 한국 정부에 기증했다고도 합니다. 상대가 권력이 있든 없든 한결같은 마음 자세를 가진 이상적,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그림으로 표현한 김정희, 끈질긴 정성을 인정할 줄 아는 후지쓰카 지카시,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여 노력한 손재형, 함께하는 소중함을 실천한 손창근의 이야기가 한 폭의 그림 안에 모두 담겨 있는 것이 세한도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그림은 유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깊은 가치가 살아 있는 작품입니다. 현대를 사는 후세의 사람들에게도 생각하며 감상해 볼만한 그림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