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 올랭피아 - 위선을 비웃은 인상주의의 아버지]
마네의 올랭피아는 위선적인 정치인을 풍자하는데 자주 패러디됩니다. 마네가 올랭피아를 그릴 때의 상황을 파악한다면 이 그림이 왜 그렇게 이용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상파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을 통하여 역사와 사회상을 엿보는 것도 그림을 보는 재미를 더하는 방법입니다.
[이 글의 순서]
1.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2. 인상주의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
3. 인상파 마네의 올랭피아와 위선 풍자
[엮인 글 링크]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이야기
1863년 인상주의 '에두아르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식식사>를 살롱전에 내보냈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누드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누드화들은 신화나 종교를 표현할 때만 그려졌습니다. 인간의 벌거벗은 몸은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졌고, 신의 모습이나 신화에 나오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릴 때만 등장했습니다.
1865년 파리 살롱전에서 마네는 <올랭피아>로 또 한 번 외설시비에 올랐습니다. 마네에게 음란화가라는 인식이 박혀버리는 이 사건 또한 인간의 누드를 그렸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사진: 올랭피아. 정치, 사회적 풍자성이 강한 작품. 잠자는 비너스와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패러디했다. 풀밭 위의 식사 이후 또 다시 비난이 퍼부어졌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이야기] / ⓒ 에두아르 마네)
사실 마네의 올랭피아는 이탈리아의 '티치아노'가 1538년에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패러디한 작품입니다. 원래는 '조르조네'와 함께 <잠자는 비너스>를 그렸었는데, 이 것을 패러디한 것이 우르비노의 비너스였습니다. 티치아노는 그림 속의 여인은 인간이 아니라는 표시로 손에 장미를 표시해 놓았습니다.
누워 있는 구도나 음부를 가린 손, 하녀의 배치까지 비슷한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너스는 신화 속의 신이었고 마네의 올랭피아는 사람을 그린 그림이었기에 유사한 구도의 누드임에도 불구하고 맹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사진: 목가적인 배경에 비너스의 신화를 빌려온 작품이기에 누드장면이 있어도 큰 비난은 받지 않았다.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올랭피아에 영향을 주었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이야기] / ⓒ 티치아노)
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식사, 이 두 그림의 실제 모델은 '빅토린 뫼랑'이라는 화가지망생입니다. 제목에 사용된 '올랭프(olympe)'는 당시에 창녀들이 흔히 사용하던 이름이었습니다. 1848년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 <춘희>에 등장하는 매춘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즉 마네의 올랭피아의 뜻은 "매춘부의 장소"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인간의 여성누드를 그리는 것은 성적인 퇴폐행위라고 공격했습니다. 신화나 역사에 나오는 주인공의 누드가 아닌 그림, 그것도 매춘부의 누드를 그린 그림이기에 비난은 더욱 심했습니다.
(사진: 조르조네의 비너스는 에로틱한 면이 강조되었지만, 신화 이야기를 섞었기 때문에 비난을 받지 않았다. 마네는 인간을 그렸기에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이야기] / ⓒ 조르조네)
인상주의 마네의 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식사의 두 여인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둘 다 정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림을 보는 관객과 눈을 마주보는 듯합니다. 역사의 어떤 장면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현재를 그린 느낌을 줍니다. 즉,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현실의 누드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볼테면 봐라는 식으로 매우 당당하게 눈길을 보내고 있으니, 당시의 관람객들에게는 현대의 포르노를 보는 느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올랭피아의 누드는 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유분방한 존재 그 자체로 당당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의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냐는 반응이었습니다.
(사진: 마네의 사진과 막시밀리안의 처형이라는 작품. 멕시코에서 처형당하는 막시밀리안을 표현하여 프랑스 정치권의 비움을 샀다. [마네의 올랭피아 - 위선을 비웃은 인상주의의 아버지] / ⓒ 에두아르 마네)
인상주의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
에두아르 마네는 1832년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법무부에 있는 아버지와 외교관의 딸인 어머니를 두었으니 부르조아 계층으로서 부유하게 자랐습니다. 흔히 에두아르 마네를 "인상주의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보면 간결한 붓질로 가볍게 그려졌기 때문에 채도가 살아있고 화사하게 보입니다. 이전까지의 화가들은 섬세하게 많은 붓질을 하고 명암을 강하게 둬서 원근을 살렸습니다. 하지만 마네의 그림은 어두운 곳에도 빛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렸기 때문에 평면처럼 보입니다.
(사진: 이상주의 이전의 미술과 마네의 미술 비교. 오른쪽 아래 풀밭 위의 식사와 비교할 때 원근감을 표현하는 방법의 차이가 있다. [인상주의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 / ⓒ 라파엘로, 얀 반 에이크, 장 푸케, 에두아르 마네)
마네의 빛에 대한 그림 때문에 드디어 인상파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기존 미술가들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지만, 모네, 르누아르, 세잔 등의 젊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서 환호를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마네 스스로는 인상파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인상파 전람회에 참가하는 것을 꺼려했고, 실제로 풀밭 위의 점심식사도 실내에서 그려진 것입니다. 마네가 올랭피아 등에서 비난을 받을 때, 그는 "사실을 보이는 대로 그렸는데 뭐가 문제인가?"라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사진: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과거에는 이런 각도가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인 주장이 강했는데, 최근 거울촬영으로 가능한 것이 밝혀졌다. [인상주의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 / ⓒ 에두아르 마네)
인상주의는 순간적인 느낌을 그리는 미술 경향입니다. 특히 이들은 빛과 함께 바뀌는 색체의 변화에 민감했으므로, 대상의 모양뿐만 아니라 색체, 색조, 질감마저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했었습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이런 경향이 나타나지만, 마네 스스로는 자신을 자연주의 화가, 또는 사실주의 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는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시각을 거부했으므로, 역시 그런 시각을 가졌던 소설가 에밀 졸라, 시인 보들레르에게서 지지를 받았습니다. 보들레르는 "시대를 앞서 간 천재"라고 추켜세우기도 했습니다.
(사진: 마네의 영향을 받은 인상주의 작품들. 오른쪽 위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 왼쪽 아래는 세잔의 생트 빅트와스산. [마네의 올랭피아 - 위선을 비웃은 인상주의의 아버지] / ⓒ 모네, 세잔)
인상파 마네의 올랭피아와 위선 풍자
파리의 미술가들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 기초도 모르는 화가가 그린 그림이란 딱지를 붙였습니다. 정장을 입은 남성 앞에서 벌거벗은 여인의 모습을 보고는 한 번 더 황당해 했습니다. 사람들은 현실적인 몸매를 보며 누드화를 추하게 그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상주의 마네의 올랭피아에 이르러서는 애초에 음란한 화가라는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누드화의 여성이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여자라서 더욱 욕을 먹었습니다.
현재에도 여성의 주체적인 누드화는 많지 않지만, 당시에는 이것마저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인체 그 자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여성은 매춘부로 취급받았습니다.
(사진: 비슷한 구도와 포즈의 비너스 그림들. 오른쪽 아래의 올랭피아는 인간의 누드를 그렸다고 비난을 받았으나, 다른 작품들은 말 그대로 비너스를 그렸다고 하면서 비난을 피해갔다. [인상파 마네의 올랭피아와 위선 풍자] / ⓒ 아르테미지아 젠틸레스키, 팔마 베키오, 앙리 피에르 피쿠, 마네)
반면 비슷한 시기에 '세잔'이 그린 <주신제>는 더 난잡한 파티를 그렸음에도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그렸다는 이유로 아무 비난도 없었습니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마네의 올랭피아를 비교해도 그렇습니다. 에로틱한 누드를 그리고 싶으면 신화와 역사로 치장을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에로틱한 누드를 그리고 싶어 하는 것은 자기들도 마찬가지면서 치장을 하지 않았다고 마네를 비난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자기들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척을 하는 것입니다. 마네에게는 위선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사진: 19세기 유럽의 어두운 면을 그린 쇠라의 작품인 프랑스의 창녀. 사회 뒷면에는 문란한 풍토가 있으므로 개혁가들은 기존 기득권의 가식과 위선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인상파 마네의 올랭피아와 위선 풍자] / ⓒ 쇠라)
사람들은 마네를 비윤리적인 화가라며 손가락질을 했지만, 인상주의 화가 마네에게는 겉으로는 윤리적인 척하면서 뒤로는 향락가를 드나드는 그들이 더 추잡하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나폴레옹3세' 집권기의 프랑스 파리는 인구가 170만 명 정도였는데, 매춘부의 수가 12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인구의 7%라면 어마어마한 숫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네의 올랭피아가 맹비난을 받는 상황은 "진실"이 드러났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라고 미술평론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진: 여러 명화작품을 고양이로 바꾸는 미술작업을 하고 있는 수잔 하번트의 작품. 이렇듯 마네의 올랭피아는 현대에 또 다시 패러디되고 있다. 특히 정치권과 권력자, 부유층의 위선을 비웃을 때 풍자된다. [마네의 올랭피아 - 위선을 비웃은 인상주의의 아버지] / ⓒ 수잔 허번트)
현대에 와서 마네의 올랭피아는 위선적인 정치를 꼬집는 풍자적 패러디에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런 뒷면에는 인상주의 마네가 올랭피아를 그릴 때의 사회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뒤로는 추잡한 짓을 다 하면서 올바른 척 위선을 떠는 기득권에게 강력한 비판을 가하는 것입니다. 즉, 그저 누드를 패러디한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보수적이고 변화에 적응하지도 못하면서 새로운 주장을 싸잡아서 뒤집어씌우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를 패러디하는 것은 그런 부류를 비웃는 저항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