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 누드화의 역사]
요즘은 누드작품을 흔히 볼 수 있는데다가 선정적인 상업물들이 판을 치지만, 예전에는 누드화에 많은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이런 금기를 깨는 작품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인간의 누드화, 여성 누드화, 남성 누드화에 대한 시각이 지금과 크게 달랐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 풀밭 위의 점심식사 이야기
1800년대의 유럽은 미술'살롱전'이 열리곤 했습니다. 여기서 입상을 하게 되면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살롱전이 활성화된 후에는 낙선전도 따로 열렸습니다. 1863년 '에두아르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파리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낙선전에 전시되었는데,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정장을 입은 두 명의 신사와 벌거벗은 여인이 야외에서 점심을 즐기는 장면이니 말입니다.
(사진: 마네의 유명한 누드화이다. 이 작품 이후로 근대의 미술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향하여 인상파를 탄생시킨다. [에두아르 마네 - 풀밭 위의 점심식사 이야기] / @ 에두아르 마네)
서양미술에서 에두아르 마네가 처음 누드화를 그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누드 때문에 퇴폐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마네의 그림이 비난을 받은 이유는 인간의 누드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까지의 누드화는 신의 이야기나 종교적 인물을 표현할 때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누드는 완벽하고 조화로운 인체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뱃살이 접히는 평범한 여자가 누드로 남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인간의 누드이며 그 상황 자체도 외설적인 것이었습니다.
(사진: 왼쪽은 마네의 사진, 오른쪽은 마네가 그린 자화상. 마네는 입체감을 데생으로만 표현하였다. [에두아르 마네 - 풀밭 위의 점심식사 이야기] / @ 에두아르 마네)
더구나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당시의 일반적인 원근법도 무시한 그림입니다. 당시에는 짙음과 흐림으로 물건의 원근을 나타내야 한다고 교과서처럼 외우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네는 어두운 곳도 반사광 등의 영향으로 무조건 까맣치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짙은 부분에도 빛을 그려넣다보니 그림은 입체감 없이 평면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마네를 인상파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림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화가라고 화를 냈으며 작품을 훼손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걸어놔야 했습니다.
(사진: 마네의 작품들. 왼쪽부터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피리부는 소년. 19세기 새로운 화풍의 그림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누드화의 역사] / @ 에두아르 마네)
고대의 인간 누드화
현대 누드화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누드 표현을 살펴보면 여성누드에는 섹시함을, 남성누드에는 건강함을 표현한 것들이 대다수입니다. 대부분의 누드화는 남성의 시각에서 여성을 그린 것들입니다. 심지어 여성 화가가 만든 작품에서도 남성의 시각으로 표현되곤 합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익숙해져버린 남성적인 시각이 내면에 잠재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누드작품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여성의 시각으로 보는 여성의 누드 접근도 시도되고 있습니다.
(사진: 현대의 누드화들. 왼쪽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여류화가 안토이네 빌리어스의 작품, 오른쪽은 화가 겸 배우인 민송아의 자화상 누드. [고대의 인간 누드화] / @ 안토이네 빌리어스, 민송아)
하지만 고대에는 좀 달랐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라고 불리는 조각상이 있습니다. 무려 24000년 전에 만들어진 조각상으로, 가슴과 성기가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풍요와 많은 출산을 상징하는 누드작품입니다.
당시에는 의복이 발달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누드작품인 것이고, 종족의 번창을 위하여 여성누드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현실에 대한 작품이라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무속신앙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진: 왼쪽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오른쪽은 로셀의 비너스. 풍요와 다산을 바라는 일종의 신앙같은 누드작품. 약 2만년 ~ 3만년 전의 구석기 시대 조각이다. [고대의 인간 누드화] / @ 미상)
그 후에도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 수많은 누드가 등장하지만, 이번에는 대부분이 남성의 누드작품들입니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나 올랭피아에서처럼 에로틱한 점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 시대가 남성중심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리스 시대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 문화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인체를 조각한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인간은 어디까지나 남성을 위주로 하는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사진: 그리스 시대의 누드 조각상들. 왼쪽은 기원전 25년 경의 헬레니즘 조각상 라오콘, 오른쪽은 기원전 5세기의 원반 던지는 사람. [고대의 인간 누드화] / @ 미론)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아름다운 인체는 남성이며, 여성은 불완전한 신체이므로 예술의 대상에서도 제외되었습니다. 그리스가 생존하기 위한 전쟁과 농업에서 남성의 공헌도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은 나약한 존재라서 그저 보호해야할 대상이라고 남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을 보면 남성 누드상은 영웅의 모습이나 활약상을, 여성 누드상은 부끄러워하거나 피해 받는 장면을 만들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처럼 자유분방한 여성의 누드가 아닙니다.
(사진: 로마시대의 정치를 보여주는 키케로의 연설. 그리스 민주주주의와 로마의 권력분립은 남성 중심 문화 위에서만 진행되었다. [고대의 인간 누드화] / @ 체사레 마카리)
중세 유럽의 신을 그린 누드화
로마 시대에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인 후 유럽 전역은 기독교 문화가 장악했습니다. 이때부터 에두아르 마네가 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그려낼 때까지 서양미술에서 누드는 매우 긴 억압기에 들어갔습니다.
종교에서 인간은 죄를 지은 몸이기 때문에 벗은 몸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금욕적이고 종교 우선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현실의 인간 누드를 그리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었습니다. 오로지 신과 역사이야기에서만 누드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사진: 비너스의 탄생. 피렌체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 보티첼리의 작품. 신화와 누드라는 전형적인 누드화를 보여주고 있다. [중세 유럽의 신을 그린 누드화] / @ 산드로 보티첼리)
그렇기에 누드화는 최대한 아름다운 인체 비율에 맞도록 그리려고 했으며, 언제나 어떤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화가들이 누드를 그리고 싶을 때는 아기천사 등을 함께 그려서 인간을 그린 것이 아님을 표시하는 관습이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는 아기천사도 성스러운 햇살도, 역사의 이야기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음란하지는 않습니다. 여자는 근처 개울에서 막 씻고 나온 것처럼 거리낌 없이 벌거벗었지만, 남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인간이 벗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외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사진: 파리스의 심판. 플랑드르 바로크 최고의 화가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 트로이의 왕자와 세 여신의 이야기를 그렸다. [중세 유럽의 신을 그린 누드화] / @ 루벤스)
인간이 예술의 대상으로 인간을 보게 된 것은 르네상스 이후부터입니다. 그때까지 서양미술학교에서는 남성인체만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전의 화가들은 여성누드를 그릴 때 남성모델을 세워 놓고 여자로 바꿔 그렸습니다.
미술학교에서 여성모델 누드화를 가르치는 것은 1839년 스톨홀름 미술아카데미 이후의 일입니다. 이때부터 여성 누드모델의 활동이 가능해졌고, 1800년대 중반부터는 미술 살롱전에서 여성누드화가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식식사와 올랭피아의 모델은 같은 사람입니다.
(사진: 쿠르베의 작품인 화가의 아틀리에. 근대의 여성누드모델이 나오는데, 사실 이 그림은 빈부차이까지 표현한 사실주의 작품이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누드화의 역사] / @ 귀스타브 쿠르베)
이 시기에 나온 것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나 올랭피아였습니다. 결국은 인간의 누드를 그리고 싶어서 그리면서도, 인간을 그린 것이 아닌 척하는 다른 화가들의 위선에 대한 비웃음일지도 모릅니다. 기존의 미술계가 퇴폐적이라고 비난해도 마네의 생각은 오직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뿐이었습니다. 상상 속의 그림만 그려야 한다는 틀에 박힌 사고관념에 대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인상주의는 시각으로 느끼는 그 순간의 인상을 그리는 방법입니다. 같은 물체를 보더라도 그 때 화가가 어떤 빛을 느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에두아르 마네는 인상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마네는 자신을 인상주의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화가임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