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군 뜻과 실화 - 광해군의 임진왜란과 대립제, 방군수포제]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못난 임금으로 꼽히는 선조와 그 아들 광해군은 열등감과 불안감의 관계였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광해군의 활약이 뛰어났지만 선조는 백성에게 큰 실망감을 주었습니다. 더불어 조선의 군역제도는 대립제와 방군수포제가 불법화되며 국방력이 약해졌습니다. 대립군의 뜻은 대립제에서 나오며, 국가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사태를 천민 백성이 나서서 막아야 하는 실화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영화 <대립군>에서도 선조와 광해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글의 순서]
1. 대립군 뜻 : 대립제와 방군수포제
2. 선조와 왕실의 대립군 광해군의 갈등
3. 대립군의 실화 : 임진왜란과 광해군
대립군 뜻 : 대립제와 방군수포제
조선시대의 '군역'제도, '병역'제도를 보면 '대립군'의 뜻이 잘 이해됩니다. '광해군'이 활약한 임진왜란 전후의 조선 군역제도는 '대립제'와 '방군수포제'가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종' 때 조선은 '양인개병제'로 병역제도를 확립했습니다.
당시에 여자와 아이는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에 인구추정과 군역은 성인 남자만을 대상으로 했었고 노비도 제외되었는데, 이것에 근거하여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남자는 병역의 의무를 졌습니다.
(사진: 세금과 군역을 내며 양반에게 지배당하는 계층인 양인은 전쟁에서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 대립군은 실화였던 군역제도이다. [대립군 뜻 : 대립제와 방군수포제] / ⓒ 영화 대립군)
물론 여기에는 양반과 왕실 자제도 포함이 되어 있었지만, 고급 특수군에 들어갔기 때문에 힘 있는 자들은 국가의 병역제도를 편하게 피해갔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군역은 농사를 짓는 양인들의 몫이었는데, 1년에 2개월~6개월 정도를 군대에 있어야 했고 자기 돈으로 병역을 갔다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경제적인 부담을 도와주는 '보인'이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세조' 때에는 '보법'을 개편하여 최대 대상이 군병 30만 명, 보인 60만 명 정도에 이르렀고, 여기서 대립군의 뜻이 생기는 대립제와 방군수포제가 생기게 됩니다. 영화 <대립군>의 줄거리는 이런 배경의 모티브를 볼 수 있습니다.
(사진: 영화 대립군의 포스터. 감독 정윤철, 출연 이정재, 여진구. 대립제와 방군수포제, 군적수포제는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군역이다. 대립군 줄거리는 역경을 딛고 성장하는 광해군의 이야기다. [대립군 뜻 : 대립제와 방군수포제] / ⓒ 영화 대립군)
대립군의 뜻은 대립제를 맡은 군인이라는 의미이며 실화입니다. 대립제는 군역을 나가지 않고 사람을 사서 대신 보내는 것이고, 방군수포제는 군역 대신 '베' 옷감으로 납부하는 제도입니다. 대립제는 군대에 사람을 보내는 대신 그 비용을 대는 것이지만 방군수포제는 그냥 비용만 내는 것이므로 병사의 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중앙과 국경 부근에서 대립제를 했고 지방에서는 방군수포제를 했습니다. 임진왜란에서의 대립군의 뜻은 결국 남을 대신하여 전투를 벌여야 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사진: 대립군은 실화이다. 먹고 살기 위해 군역을 못나오면 돈을 내고, 천민은 돈이 필요해서 대립군이 되고, 그 사이의 이윤은 관리자와 힘가진 자들이 가져갔다. [대립군 뜻 : 대립제와 방군수포제] / ⓒ KBS)
1592년 임진왜란이 있던 선조와 광해군 시대에 대립군의 대립제와 지방군의 방군수포제는 심각한 사리사욕에 의해 큰 문제가 됩니다. 중앙과 국경에서는 양반과 돈있는 관리들이 대신 군역을 할 천민 등을 미리 준비해 놓고 돈을 받아 대립군으로 활용한 것이 실화입니다.
그리고 지방에서는 대신 납부되는 '군포'를 늘리기 위해 군대를 가지 말라고 조장하거나 백성에게 더 많은 군포를 요구했습니다. 사실 대립제와 방군수포제는 농사를 짓는 백성의 사정을 감안하여 시작된 것인데, 결국은 힘과 돈을 가진 자들의 이익이 되어 빼돌려졌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국가가 나서서 기준을 정하고 '군적수포제'로 변하기에 이릅니다.
선조와 왕실의 대립군 광해군의 갈등
방군수포제와 다르게 대신 병역을 지는 대립제에서는 대립군이 생기게 되었는데, 임진왜란에서의 광해군은 어쩌면 선조의 대립군일 수도 있습니다. 광해군은 후궁인 '공빈 김씨'와의 둘째 아들입니다. 그러나 선조는 정실 왕후와의 사이에서 원자가 태어나면 그때 세자책봉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터지고 조선군이 연패를 하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주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때 신하들은 적이 오기도 전에 도망하려는 선조에게서 위기감을 느끼고 세자를 먼저 세우자고 주청했습니다. 이렇게 세자가 된 것이 광해군입니다.
(사진: 선조가 의주로 도주하면서 광해군에게 분조할 것을 명하는 장면. 열여덟살의 광해군에게 엄청난 짐을 주고 떠나는 선조다. 영화 대립군의 줄거리. [선조와 왕실의 대립군 광해군의 갈등] / ⓒ 영화 대립군)
서자로서 서러움을 받던 광해군은 18세의 나이에 왕세자가 되었습니다. 선조는 의주로 가던 중 평안도에서 광해군에게 '분조'를 이끌 것을 명하였습니다. 분조의 뜻은 "조정을 나눈다"는 뜻으로 일제강점기의 '임시정부'처럼 도망가는 선조를 대신해서 조선에 남으라는 의미입니다. 대립군의 뜻이 대신 군역을 서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선조는 이미 명나라로 도망갈 생각까지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광해군은 스스로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왕이 될 수 있었겠는가?"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진: 마침 버림받듯이 남겨진 광해의 뒤모습을 영하는 롱테이크로 잡아 보여준다. 대립제와 방군수포제는 임진왜란 당시의 군역체계이다. [선조와 왕실의 대립군 광해군의 갈등] / ⓒ 영화 대립군)
왕실의 대립군인 광해군은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를 누비며 의병을 모집하고 전투를 독려했습니다. 광해군의 형 임해군도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해 함경도로 향했지만, 현지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다가 왜군에게 넘겨진 것과는 대조적인 성과를 보였습니다.
광해군은 영의정, 우의정 등과 사실 상 적진인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백성의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이 일어나도록 독려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병과 대립군 등을 정규군으로 대하도록 상소를 올려서 사기를 크게 올려주었다고 합니다. 영화 <대립군> 줄거리에는 백성에게 감동을 주는 광해군의 활동이 나옵니다.
(사진: 영화 대립군 줄거리에서 실제 병사로 연기하는 이정재. 광해군은 그를 따라 다니며 점점 유약한 면을 버리고 강해지게 된다. [선조와 왕실의 대립군 광해군의 갈등] / ⓒ 영화 대립군)
선조도 처음에는 광해군의 악전고투를 고맙게 여겼지만,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명나라가 세자 승인을 거부하자 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명나라는 조선이 혼란한 틈을 이용해서 확실한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선조와 광해군을 이간질하는 수작을 부렸습니다. 또 한편으로 명나라는 선조를 책망하면서 조선 남도를 광해군에게 맡기라는 말까지 하였으니 선조는 아들을 상대로 열등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중에 선조는 15번이나 왕위를 광해군에게 넘기겠다는 가짜 양위 소동을 벌였고, 그때마다 신하들과 광해군은 무릎을 꿇어 불충의 용서를 빌어야 했습니다. 이때 선조의 나이는 마흔 살이었고 광해군은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대립군의 실화 : 임진왜란과 광해군
율곡 이이가 주장하였다는 "10만 양병설"은 후대에 의한 조작이라는 설도 분분하지만, 이런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대립군의 뜻이 알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의 조선은 자력으로 나라를 지키는 데에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국가가 망해가도 자기 이익만 챙기는 기득층을 위해 백성은 노동력과 비용을 모두 댔지만, 결국에 양반과 기득층은 도망가고 백성이 목숨마저 바쳐야 했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평화시기에는 국가의 분열을 운운하며 백성을 억누르고 안보를 강조하던 기득층들이, 전쟁시기에는 백성의 생명을 희생시켜서 다시 권력을 차지해 온 역사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사진: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 공신록에는 목숨을 건 장수들 보다 선조를 따라 도주했던 신하들이 더 많이 올랐다. 대립군의 줄거리 중에서... [대립군의 실화 : 임진왜란과 광해군] / ⓒ 영화 대립군)
대립제, 방군수포제 등 조선의 군역제도에서 양반과 기득층은 모든 의무를 양인에게 넘겼습니다. 양인은 병역 의무에 의해 노동력을 국가에 바쳐야 했으며 세금을 내야 했고 전쟁이 나면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런 반면, 대립제와 방군수포제는 관리층의 배를 불려주었습니다. 또한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군역에 나오지 말고 돈과 군포로 대신하라고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천민들은 혹시나 양인이 될 수 있을까하며 대립군에 몸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대립군의 뜻을 보면 그저 대신 병역을 지는 것이 아니라 서글픈 약자의 의무와 또 그 의무 위의 의무였던 것입니다.
(사진: 왜군 뿐만 아니라 뒤쫓는 암살자들로 부터 생명이 위태로운 광해군 일행. 영화는 그 모험을 대립군은 줄거리로 한다. [대립군의 실화 : 임진왜란과 광해군] / ⓒ 영화 대립군)
선조 자신도 서자였으면서 선조는 광해군이 서자라는 것 때문에 더욱 믿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명나라에서는 차라리 광해군이 났다고 하니 신하들이 광해군의 칭찬을 하는 것도 듣기 싫어했습니다. 국왕이 왜군에게 잡히는 것보다는 전략적 후퇴가 나은 법이지만, 선조의 도주는 전략적 후퇴라고 보기 보다는 대책 없는 도망에 가까웠기 때문에 후세에 욕을 먹고 있습니다.
왕실의 대립군인 광해군이 왕을 대신하여 적진 속에서 활동하여 관군과 의병의 역할을 조율하고 중앙 조정을 한 것과 비교하면 대립군의 뜻이 무색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화 <광해군>의 줄거리 배경인 것입니다.
(사진: 대립군 뜻... 병사들도 그랬지만, 결국은 광해군도 대립군일 뿐이다. 대립군의 줄거리 마지막 대사는 어린 광해군의 비애를 한 마디로 설명해 주고 있다. [대립군의 실화 : 임진왜란과 광해군] / ⓒ 영화 대립군)
사실 대립제와 방군수포제는 불법이 되어 버린 제도입니다. 군역을 제공하고 관리하는 체계가 공정하게 잘 되어야만 가능한 제도이지만, 거의 200년 간이나 전쟁이 없던 조선은 그런 심각함을 쉽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2017년에 개봉한 영화 <대립군>은 광해군과 대립군의 활약을 그린 영화입니다. 대립군의 실화는 자세하게 기록되지 않아서 광해군과 어느 정도까지 활동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대립군의 뜻을 보면 양인이 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던 민초들의 "한"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광해군이 적진을 돌며 백성들과 함께 소통하고 고통을 함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