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십자군 전쟁의 콘스탄티노플 학살과 최악의 살육전쟁 결과]
유럽의 십자군 전쟁은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2백년 동안 8차에 걸쳐 치러졌습니다.
초기에는 크리스트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되찾자는 의미의 전쟁이었지만, 점점 이권과 타락이 개입된 어처구니없는 약탈전쟁이 되어 갔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4차 십자군 전쟁의 결과는 종교적 적대국이 아닌 크리스트교 국가를 약탈하고 대학살까지 저지른 전쟁으로, 처음부터 세속에 찌든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 중 최악이라는 말이 따라 다니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꼬여버린 제4차 십자군전쟁 결과
현대에도 "성전"을 표방하며 성지를 되찾겠다는 아랍인들이 전쟁을 일으키곤 합니다. 그러나 이럼 모습은 11세기의 유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럽인은 크리스트교를 믿는 사회였으므로 크리스트교의 발상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에게서 해방시키자는 것이 십자군 전쟁의 목표였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셀주크투르크에 의해 성지순례가 방해받자 보복을 했던 것이고, 쇄락에 빠진 비잔틴제국을 돕기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비잔틴제국은 이슬람의 공격에서 유럽을 막아주고 있었으니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민간인까지 살육을 하는 제4차 십자군전쟁의 콘스탄티노플 도시)
십자군 전쟁은 이기적인 종교전쟁일 뿐이라는 평가가 있지만, 그래도 1차부터 3차까지의 십자군 전쟁은 명분도 있었고 적군과 아군이라는 구별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십자군 원정이 제4차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막장의 길을 갑니다. 제4차 십자군전쟁은 13세기 초에 2년간 진행되었습니다. 역시나 소아시아를 정복하고 한탕하려는 봉건영주의 차남들이나 기사들이 출발했습니다. 당시 유럽은 장자에게 모든 상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차남들은 자기 땅을 가지려고 참여했습니다.
(지금의 베니스(베니치아) 경치를 찍은 사진. 관광명소와 국제영화제로 유명하다)
처음의 계획은 이탈리아 항구에 모여 배를 타고 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3차까지 이루어진 십자군 운동에서 피로감을 느낀 지원자들이 생각보다 적게 모인 것에서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지원군이 모자라자 항구에 모인 십자군은 출발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제4차 십자군전쟁의 군수 및 병력 이동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인 베네치아에게 의뢰되었는데, 시간이 지체되니 십자군은 베네치아에게 막대한 빚을 지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제4차 십자군전쟁은 시작부터 일이 꼬였습니다.
베네치아의 꼬임에 빠져 같은 편 헝가리를 공격하다
당시 이탈리아는 지금처럼 통일국가가 아니라 각 도시들이 나라를 세우고 경쟁하던 곳이었습니다.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와 유럽대륙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던 섬도시였습니다. 이 섬도시는 S자의 강이 있어서 배가 도시의 한복판을 지나갈 정도로 해상왕국이었습니다. 지금의 베네치아는 베니스 영화제, 관광지로도 유명합니다.
십자군은 베네치아에 머무르며 발생한 비용뿐 아니라 이동하는 뱃삯까지 줘야했기에, 십자군은 베네치아와 채무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십자군은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안 되는 상황이라 베네치아의 꼼수에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제4차 십자군전쟁의 결과는 기독교국 간의 내분에 이용됩니다.
(13세기 지중해의 베네치아와 콘스탄티노플의 위치 지도)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의 무역권을 완전히 독차지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헝가리가 "자라"라는 도시를 점령하고 방해하니 눈엣 가시인 곳이었습니다. 베네치아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같은 헝가리를 공격하자고 십자군을 꼬드겼습니다. 엉뚱하게도 제4차 십자군전쟁은 결과적으로 같은 편을 침략하고 약탈하는 전쟁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헝가리는 같은 크리스트교 국이었고 교황에게도 충성적이었으므로 교황은 진노합니다. 교황은 십자군을 파문해 버렸습니다. 그래도 베네치아에게 지불할 만큼의 돈이 되지 않자 십자군은 또 다른 유혹에 넘어 가게 됩니다.
(십자군의 대학살. 십자군전쟁은 계속된 대학살의 역사였다)
베네치아에 지불할 능력은 안 되고 파문까지 당했으니 재물이나 약탈하자는 참에,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에서 밀려난 알렉시오스가 접근했습니다. 알렉시오스는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난 왕족입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주면 막대한 사례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비잔틴제국의 수도입니다. 당시 당일 도시로는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고, 이슬람의 끝없는 공격마저 막아낸 곳이었습니다. 덕분에 유럽은 이슬람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자고 한 것입니다.
이제 베네치아의 경제 이권 다툼에 휘둘렸던 제4차 십자군전쟁은 왕위다툼에 까지 휘말려 버렸습니다.
피가 넘치는 살육을 저지른 제4차 십자군전쟁의 결과
사실 제4차 십자군전쟁에서 콘스탄티노플 공격까지 감행한 십자군 정도는 콘스탄티노플 입장에서는 위협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같은 편이 공격해 들어온다는 것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대규모의 이슬람군대를 물리쳐 온 경험이 이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위협은 내분이었습니다.
코스탄티노플에 있던 동로마제국의 황제는 알렉시오스의 내분에 휘말려 죽게 됩니다. 그 자리를 알렉시오스가 차지하지만 독재적인 인물이라 비잔틴제국의 시민들에게 잡혀 죽었습니다.
갑자기 할일이 사라진 십자군은 그래도 막대한 사례를 지불하라고 했고, 비잔틴제국의 시민들은 줄 수 없다고 무시했습니다.
(인간의 사악한 면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종교전쟁, 제4차 십자군 전쟁)
그러자 십자군은 마침내 미친 군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기로 한 것입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수많은 외적을 물리쳐온 천연요새 콘스탄티노플은 내분과 같은 편의 공격으로 함락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4차 십자군전쟁은 살육전쟁으로 바뀌었고 십자군욘 닥치는 대로 시민을 죽이며 약탈했습니다. 어찌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기록에 의하면 사람의 피가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제4차 십자군 전쟁에 뛰어든 미친 기사들은 약탈을 한 후 비잔틴 제국에 새로운 나라를 세웁니다. 그 결과가 라틴제국입니다.
(제4차 십자군전쟁에서의 대학살 살육장면 상상도)
제4차 십자군전쟁의 결과가 같은 편끼리의 살육전쟁이 되어 버림으로써, 베네치아만 이득을 얻게 되었습니다. 동지중해의 무역을 놓고 경쟁하던 비잔틴제국이 사라지자 베네치아는 수백년동안 호황을 누리며 번성했습니다. 그리고 14세기의 르네상스가 꽃피게 되는 역할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슬람을 막아주던 비잔틴제국이 사라지자 유럽은 오스트리아까지 이슬람의 공격 세력권에 놓이며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사실, 십자군의 살육은 제1차 십자군전쟁 때부터 유태인과 이슬람인도 살육한 죄악의 전쟁입니다. 4차에 이르러서는 같은 편도 살육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제4차 십자군전쟁의 결과는 인간이 얼마만큼 종교를 핑계 삼아서 사악해질 수 있는 가를 선명하게 보여 준 역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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