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징기스칸) 테무진의 사랑과 가족사]
흔히 징기스칸이라고도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칭기즈칸입니다. 칭기즈칸은 12세기에 태어나 13세기에 몽골제국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며, 본명은 "테무진"입니다.
테무진에게는 정부인인 "보르테"와 장남인 "주치"가 있었습니다. 테무진은 두 번이나 보르테와 헤어질 운명에 처했지만, 잊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장남 주치도 남의 씨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녔지만, 테무진은 눈감고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였습니다.
역사 상 최고의 정복왕으로 알려진 칭기즈칸(징기스칸)의 가족에 대해 알아봅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불러 온 테무진과 아내의 첫 번째 이별
먼저 테무진과 그의 가족에 대해 이해하려면 몽골의 사회관습을 알아 두어야 합니다.
몽골제국이 세워지기 전의 몽골은 씨족단위로 흩어져 살고 있었고, 이것은 핏줄이라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부인은 여러 명을 둘 수 있었으며, 후계자가 여럿일 경우엔 우리와 달리 막내아들을 직계로 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물론 장자와 나이가 더 많은 아들들의 영향력이 강했지만 피로 맺은 씨족생활이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는 없었습니다.
(몽골의 지폐에 등장하는 칭기즈칸(징기스칸)의 얼굴)
칭기즈칸(징기스칸)의 아버지는 예수게이라는 부족장입니다. 테무진이 9살 되던 해, 예수게이와 테무진은 먼 길을 갔다 오다가 온기라트라는 부족에 들립니다. 여기서 예수게이는 보르테를 소개받게 되고, 즉석에서 테무진과 짝을 지어주기로 합니다. 그렇게 테무진은 데릴사위로 남았는데, 혼자 돌아가던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게 독살 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타타르족은 예수게이와 원수지간의 부족이었습니다. 칭기즈칸(징기스칸)의 어린 시절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칭기즈칸(징기스칸)이 태어나고 자란 오논강 주변의 경치)
테무진은 급히 부족으로 돌아갔으나 예수게이가 죽은 후 부족들이 테무진과 가족을 버리고 떠나버려서, 호전적인 주변 부족들에 의해 생사의 어려움에 처합니다. 후에 칭기즈칸(징기스칸)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원수 타타르에 대한 복수를 잊지 않았습니다.
모진 고생을 한 뒤 십대 후반이 되어 약간의 부족을 거느리게 된 테무진은 언약을 맺은 부인을 찾아오기로 결심하고 온기라트에 가서 보르테를 데리고 옵니다. 몰락한 부족의 십대에게 선뜻 허락할 상황이 아니지만, 보르테의 아버지는 테무진을 믿고 딸을 내어 주었습니다.
(몽골제국 황제 칭기즈칸(징기스칸)의 정복영역 / 출처: wikipedia.org)
약한 부족이라서 아내를 빼앗기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시간이 되는가 싶었는데 또 다시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메르키트족이 습격하여 마을을 쑥대밭을 만들고 여자들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당시 몽골은 타 부족을 습격하면 재산과 식량 뿐만 아니라 여자도 약탈을 해 가곤 했습니다.
아내 보르테도 끌려가게 되었으나 아직 나약했던 테무진의 부족은 일방적으로 당했고, 테무진도 아내를 구하지 못한 채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대항하는 순간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므로 일단 목숨을 구해야 했던 것입니다.
(몽골에 위치한 칭기즈칸(징기스칸)의 기념 공원)
복수의 이를 갈던 테무진, 마침내 메르키트족을 다시 습격하여 약탈과 함께 살인으로 보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찾았으나... 보르테는 잡혀 간 동안 이미 겁탈을 당하고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씨족 생활을 하는 몽골관습 상 씨가 다른 아이는 곤란했습니다. 주변에서는 태어나면 내다 버리자고 하였으나, 태어난 아이를 본 테무진은 마음이 약해져서 친 아들로 생각하기로 결정합니다. 이 아이가 바로 장남 "주치"입니다.
(영국 BBC에서 방영된 칭기즈칸(징기스칸)에서 아내를 약탈당하는 장면 / 출처: BBC)
몽골족은 여러 부인을 둘 수도 있었고 약탈한 여자도 마음껏 가질 수 있었습니다. 테무진도 관습처럼 다른 부인을 두기도 했지만, 정부인인 보르테는 테무진에게 부인 이상의 여자였습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이 빠르고 똑똑한 보르테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테무진에게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규모가 커져가는 부족에서 테무진의 권력도 점점 막강해졌지만 항상 보르테의 조언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칭기즈칸(징기스칸)이 돼서도 변함없이 아내를 존중했습니다.
(칭기즈칸(징기스칸)의 부인 보르테와 아들, 손자들)
안타까운 아들 주치의 사연과 칭기즈칸(징기스칸)
테무진은 자주 보르테와 상의를 하였는데, 보르테가 미모와 더불어 총명하고 내조를 잘하는 여자였기에 몽골제국의 밑바탕을 닦을 수 있었습니다.
씨족 풍습 때문에 아들 주치는 주변으로부터 "다른 씨"라는 의혹을 받으며 자리가 불안하였으나, 테무진의 확실한 태도로 인해 이 논란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며 부족의 힘은 점점 강대해졌습니다. 개혁적인 족장과 총명한 부인, 확실한 집안 단속은 제국의 기반을 탄탄히 한 것입니다.
(칭기즈칸(징기스칸)과 왕자들을 그린 그림)
부족끼리 싸우며 지냈던 몽골인들은 테무진의 부족 통합 정책에 의해 하나로 묶여졌습니다. 영토는 계속 넓어지고, 마침내 테무진은 부족 왕 중의 왕인 칭기즈칸(징기스칸)에 추대됩니다.
당연히 후계자 문제도 결정해야 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보통 막내를 후계자로 삼는 몽골의 전통과 달리 칭기즈칸(징기스칸)은 은근히 장남 주치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신들과 둘째 왕자마저도 주치의 출생을 가지고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출생의 어두운 과거 때문에 주치는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구설수에 묶여 살아야 했습니다. 주치라는 이름마저 몽골어로 "손님"이라는 뜻이니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릅니다.
(칭기즈칸(징기스칸)의 아들 주치의 동상. 그의 후예가 킵차크 한국을 세운다)
결국 후계자 문제는 막내도 첫째도 둘째도 아닌 셋째로 결정이 났습니다. 그런데 역으로 보면 가장 유력한 장남이 제외됨으로서 씨 다른 후계자임을 인정하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주치의 입장에서는 큰 상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후 아버지와도 사이가 벌어지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서방 공격 후에는 아버지의 진노를 사서 사이가 더 벌어졌습니다. 칭기즈칸(징기스칸)이 노년이 되며 점점 벌어지는 주치와의 사이는 걷잡을 수 없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렇게 잘 만나지도 않게 된 어느 날, 갑자기 주치가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듭니다.
(칭기즈칸(징기스칸) 사후 몽골제국 분열 / 키스세븐 자체제작)
사이가 벌어지고 주치가 칭기즈칸에게 반항을 시작하면서 그렇게 감싸주던 칭기즈칸의 마음이 냉정하게 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칭기즈칸(징기스칸)이 사주하여 주치를 독살했다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주치의 친자 문제는 갈수록 갈등이 깊어져서, 나중에 주치의 아들은 지금의 헝가리와 우크라이나, 흑해지역에 "킵차크 한국"을 세운 뒤 몽골제국과 완전히 남남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치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등지에 거주하는 우즈베크족의 시조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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