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와 매춘 - 한국 공창제도의 역사로 보는 성상품화]
한국의 공창은 일제로 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은 16세기 막부시대부터 국가적으로 집창촌을 허용해 왔었습니다. 집창촌이라는 것은 매춘업을 하는 포주와 매춘녀들이 가게를 차려 놓고 영업을 하는 곳을 말합니다.
강제로 조선의 국권을 찬탈한 일제는 조선 내 일본인이 늘어나자 일본의 공창제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성매매를 하도록 해 줍니다.
일본에서는 집창촌을 유곽이라고 불렀는데 자료에 의하면 1902년에 처음으로 공식적 성매매촌이 조선에 상륙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유곽 매춘지역이 생긴 곳은 부산 중구의 부평동이었습니다. 지금의 국제시장부터 깡통시장을 거쳐 아파트 단지까지의 일대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때는 일본과 가까운 부산이 개항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많이 들어와서 생긴 성매매구역이었지만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강제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후에는 전국적으로 성매매 공창제가 시행되었습니다.
일제가 직접 법을 통해 허가하고 세금을 받았으므로 정식적인 공창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도 기생은 있었지만 기생의 주 업무는 술시중에 있었고 성매매는 기생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완전히 성매매 직종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엔 직업적으로 성매매를 통해 수익을 얻는 형태이므로 현대와 같은 방식의 집창촌은 일제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포털 이미지 검색 결과 - 성매매의 온상인 매춘지역 집창촌)
해방 후 급속히 늘어나는 성매매는 미군정 영향
그 후 해방 전까지 지속적으로 매춘지역은 늘었지만 1947년 조사한 바로는 2천여 명이 성매매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미군정이 들어 온 이후 공식적으로 한국은 공창제를 폐지합니다. 법령에 의하면 양성평등의 법적 권리보장을 위하여 시행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완전 폐지에 실패하였습니다.
현대의 성매매 여성들이 일반 직업 적응실패와 향락, 사치 때문에 매춘을 하고 있다면, 당시의 매춘녀들은 정말로 먹고 살기 막막하여 하고 있었고, 포주들은 강제로 여성을 끌고 와서 매춘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의 성매매 공창제 폐지는 매춘 여성과 포주들의 저항에 부딪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창제 폐지가 시행된 후 1~2년 사이에 성매매를 하는 매춘 여성의 숫자는 오히려 5만 명으로 늘어납니다.
일제 때와 달리 구체적인 관리가 되지 않은데다가 미군에 기생하여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 늘었기 때문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엄격한 유교사회였던 조선의 풍토가 완전히 깨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 후 6.25가 발발하고 미군의 수는 더욱 늘었습니다. 사회는 무질서했으며, 실제로 여성이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적었습니다.
3년간의 전쟁 후 한국의 성매매 매춘여성은 30만 명도 넘게 증가합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 피해가 생기는 와중에도 성산업은 더욱 활황세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성의 상품화는 역사적으로 계속되어 온 문제점)
한국 매춘의 근본적 문제는 계속 되었다
이때의 역사적 치욕이 또 하나 있습니다. 비공식 자료에 의하면 한국군도 전쟁 중에 위안부부대를 운영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간접적 기록과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약 90여명의 여성들이 4개분대로 나뉘어 하루 약 7명 정도의 군인들에게 성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문제는, 당시 한국군의 책임자급 인사들이 일제 사관학교나 일본군 출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태평양전쟁 때 일제의 위안부 악습을 그대로 가져다가 실시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6.25가 끝난 이후에 한국에는 미군부대가 주둔합니다. 미8군 등 인근에는 흔히 말하는 기지촌 성매매 집창촌이 성업을 하였으며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점점 거대화되었습니다.
문제는 한국정부도 이를 알면서도 일부러 용인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성매매 여성을 희생시켜서 달러벌이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 한국 국민총생산의 25%가 기지촌 성매매 등의 관련 업종에 의해서였다고 합니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의 85%는 성매매를 경험하였다는 자료가 있고,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여성은 미군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미군 위안부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들은 양공주 혹은 양갈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들 중에는 자의적 돈벌이를 한 여성도 있었지만 인신매매에 의해 팔려 온 여성과 심지어 미성년자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80년대까지 미군상대 성매매 여성의 누적인구수는 1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13년 국정감사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관리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서명한 기지촌 관련 문건에 대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현대에 태국 등의 동남아 지역 성매매 관광이 문제가 퍼지듯이 일본 등 주변국은 한국으로 성매매 관광을 오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주요 관광번화가에는 외국인 대상 매춘부들이 실제로 존재하였고, 이런 여성들에 대해 당시 행정부 관료들은 고마운 달러벌이 일꾼이라고 말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는 일설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한국은 국가적으로 성매매 매춘을 지원하고 눈감아 준 것입니다.
(박정희 정부 당시 주한미군 대상 위안부관련 기사)
지금도 계속되는 성매매 매춘의 문제
2천 년대에 들어서도 성매매와 향락업소 종사 여성 수는 100만 명이 될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뿌리 깊게 심어진 성매매 관행이 아직도 습관처럼 행해지고 있는 중입니다. 인구 대비 세계 2위의 성매매 여성이 존재한다는 비공식 주장도 있습니다.
성매매 매춘관련 사업을 인정하자고 하는 일부 여론은 공창제마저 주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불건전한 접대문화가 상류층에서 당연시 되고 있으니 정부의 근절 의지가 강화될리도 없습니다.
점점 심각해지는 문제는, 과거의 경우 정말로 먹고 살기 힘들어서, 또는 강제로 납치되어서 해왔던 성매매가 이제는 사치나 카드빚, 방탕한 생활, 근로의식 기피 등의 이유로 퍼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돈을 주는 남자와 쉽게 돈을 버는 여자 간의 비윤리적인 거래는 그 뿌리가 너무 깊어서 국가와 사회구성원의 의지가 없이는 꺽이지 않을 퇴폐문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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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추세는 성매매 산업을 금지하는 추세입니다. 미국의 네바다주와 스위스, 네덜란드, 독일, 헝가리, 터키, 뉴질랜드 등에서는 국가에서 공창제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대부분의 대륙에서는 여전히 매춘 불법화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성매매 불법화가 더 최근의 추세입니다.
그러나 일부 국가에서는 법적으로는 불법화해 놓고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고질적인 병폐를 고치지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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