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4.19의거)의 배경과 원인, 결과에서 드라마틱한 역사를 관찰하다]
4.19혁명(4.19의거)의 배경은 장기집권을 노린 독재
4.19혁명 또는 4.19의거는 이승만의 부정선거에 의해 제1공화국이 무너지고 5.16 군사쿠데타까지 연결된 역사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전개와 숨 가쁜 역사흐름에 대해서도 살펴볼까 합니다. 4.19혁명의 전후 배경과 원인, 결과가 미친 영향은 민주주의를 꿈꾸던 초보 대한민국의 성장기입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정치인이나 기득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정의롭고 개혁적인 국민에 의해서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1948년 제1대 대통령선거가 있었습니다. 이승만이 90%가 넘는 지지율로 김구를 누르고 당선되었습니다. 6.25를 거쳐 2대 대통령에도 이승만이 당선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법에서는 한 번의 연임만 가능했기 때문에 3대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법을 뜯어 고칩니다. 영원히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의해 이승만은 제3대 대통령에도 당선됩니다. 당시만 해도 대통령제와 국왕제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960년에 제4대 대통령, 제5대 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어서 부통령 대수가 하나 높습니다. 집권당인 자유당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나섰고 야당인 민주당에서는 조병옥과 장면이 나섰습니다.
이기붕은 이승만의 비서로 출발해서 정계에 입문하여 이승만의 권력을 이어 받으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경찰총수 출신의 조병옥은 야당후보지만 보수색이 있는 정치인입니다.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4.19혁명의 국민들 / 출처: mpva.tistory.com)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에게 혼쭐난 이승만 진영은 미리 치밀하게 작전을 세웁니다. 마침 조병옥이 갑자기 병이 생겨 미국으로 치료를 떠났는데, 자유당은 기뻐하며 선거일자를 앞당기는 등 민주당이 선거에 대비할 수 없게 손을 씁니다. 4.19혁명(4.19의거)의 원인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선거 전에 돌아오려던 조병옥은 급서해 버립니다. 덕분에 제4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단독출마로 당선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신익희가 갑작스런 뇌일혈로 사망했었으니 민주당 입장에서는 두 번이나 연달아 대권후보 없이 선거를 치르게 된 것입니다.
부정선거는 4.19혁명(4.19의거)의 원인이 되다
이제 남은 것은 부통령 자리마저 차지하는 것입니다. 장면의 인기가 높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무리하게 부정선거 작전을 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계속 부정을 저질렀지만 이승만 정권의 독주에 식상한 국민들이 비로소 알아챈 측면도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개표조작, 깡패를 고용한 위협, 금품살포 등의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특히, 정치깡패 등의 폭력집단은 4.19혁명(4.19의거)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중고등학생들까지 참여한 4.19의거(4.19혁명) 출처: enha.kr)
선거를 앞둔 2월 28일에 대구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집회가 크게 열렸지만 3월 15일 예정대로 선거는 진행되었습니다.
부정선거에 대한 소문이 전국에 퍼진 상태에서 결과마저 예상대로 나오니 국민들은 다음 날부터 바로 시위에 들어갑니다. 마산시위 등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경찰의 강경진압, 정치깡패들의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그날,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던 한명의 고등학생이 실종됩니다.
약 한달 후 바다에서 그 고등학생이 건져졌는데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이 신문에 보도되자 일반 국민 뿐 아니라 학우의 죽음에 충격받은 중고등학생들까지 참여해서 전국화되어버립니다.
물론 당시의 정부의 입장도 지금의 우익주장과 비슷했습니다. 좌익세력이 선동하여 국가전복을 시도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3.15부정선거의 여파는 4.19혁명(4.19의거)에 까지 연결되게 됩니다.
독재에 항거하는 국민들의 4.19혁명(4.19의거)
드디어 4월 18일, 또 한 번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 후 자신 해산하여 귀가하는데 갑자기 대한반공청년단 소속의 폭력배들이 습격하여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에 전국 교수들도 시국선언을 하며 동참했고 중고등학생들의 시위에서 대학생, 성인들의 시위로 점점 번져 나갔습니다.
4월 19일 경무대와 중앙청 등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바로 4.19혁명(4.19의거)입니다. 정부는 무차별 발포를 하여 시민들이 사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심지어 13세 초등학생도 총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좌익공산 세력의 시위라고 규정짓고 계엄령으로 대처합니다. 정부의 과잉진압으로 수많은 시민이 살상 당했습니다.
시민들은 격분하여 5.18 광주에서처럼 경찰소의 무기를 탈취해 항거하기 시작했습니다.
(탱크를 타고 거리를 질주하는 4.19혁명의 시민들 / 출처: kdemo.or.kr)
4.19혁명(4.9의거)의 결과, 결국 미국 대사와 장관들의 권유로 이승만은 국민의 요구대로 하야하기로 결심합니다. 4월 26일 라디오를 통해서 발표한 후 하야하였는데, 대통령을 왕처럼 착각하는 일부 국민들은 눈물을 쏟으며 절을 하기도 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다음 날, 문제가 되었던 이기붕은 부인과 두 아들과 함께 권총자살로 삶을 끝냅니다.
임시 대통령직을 맡게 된 허정은 이승만을 외국으로 망명시키려고 은밀히 알아봅니다. 한 달 후 아무도 모르게 하와이로 이승만이 망명할 수 있게 했고, 국회에서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주변인은 물론 정부 각료들도 모르게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해, 4.19혁명(4.19의거)의 결과로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뀐 새 헌법에 의해 제2공화국이 출범합니다. 재선거에서 대통령에 윤보선, 총리에 장면이 당선됐고 실질적인 정치는 장면이 맡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중고등학생까지 포함된 국민들의 희생을 통하여 부정부패와 부정선거를 청산하며 민주주의를 되찾은 것입니다. 공산주의 전복을 하려는 좌익세력의 선동이라는 억울한 누명 속에서도 이루어낸 결과입니다.
그러나 4.19혁명(4.19의거)에서 국민의 희생으로 독재에서 벗어난 한국은 겨우 1년만인 1961년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다시 독재의 길에 들어서야 했습니다. 4.19혁명(4.19의거)의 희생이 무참히 짓밟히는 순간입니다.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이후 1961년부터 1992년까지 약 30년을 군사독재 하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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