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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명나라의 평양성전투 필승전법 - 원앙진으로 일본 검술 격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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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명나라의 평양성전투 필승전법 - 원앙진으로 일본 검술 격파

키스세븐지식 2015. 4. 1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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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명나라의 평양성전투 필승전법 - 원앙진으로 일본 검술 격파] 




원앙진이 임진왜란 평양성 전투에서 공을 세우다 


임진왜란이라고 하면 일본군의 조총을 먼저 떠 올리지만 사실 일본의 최대 강점은 조총이 아니라 검법이었습니다. 멀리서는 조총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가까이에서는 날렵한 칼을 휘두르니 조선군은 대적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명나라도 임진왜란 이전부터 왜구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원앙진입니다. 



우리가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을 한산도 대첩, 진주 대첩, 행주 대첩을 꼽듯이 일본도 3대 대첩을 꼽는데, 그 중 하나가 평양성 전투입니다. 

16세기, 평양성에서는 4번의 큰 전투가 있었습니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후 60일 만에 평양성을 점령하는데, 1/6정도의 병력밖에 되지 않는 조선군은 전술에서도 허점을 보이며 완패를 하였습니다. 강이 얕음을 노출시켜서 일본군이 그리로 진격했던 것입니다. 


이후 명나라에서 1차로 3천여 명의 임진왜란 첫 구원군이 오는데 성문을 열어 놓고 매복해 있는 유인전술에 속아서 평양성에 들어갔다가 양쪽에서 공격해 오는 일본군에게 학살을 당하였습니다. 

두 번째 평양성 전투에서도 완패한 조선군은 세 번째 평양성 전투인 2차 탈환작전에 조선군 단독으로 2만 명을 동원하여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돌격전으로 부대가 둘로 갈리어 지휘체계가 엉망이 되며 또 다시 완패하였습니다. 일본은 임진왜란에서 조선군만 만나면 무시하듯 가볍게 이겨버렸습니다. 



임진왜란의 평양성 네 번째 전투는 명나라의 본군 4만여 명이 도착한 후에 다시 시도되었습니다. 일본도 나름대로 준비하려고 했으나 구원병을 보내주지 않아서 숫적 열세인 채 5배가 넘는 조명 연합군에게 포위당했습니다. 

일본은 추격하지 않으면 성을 포기하고 후퇴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후퇴를 시작했지만 명나라와 조선군은 약속을 어기고 추격하여 사살작전을 벌였습니다. 


특히 마지막 네 번째 전투에서는 명나라가 준비해 온 원앙진이 많은 성과를 올렸습니다. 칼을 잘 쓰는 왜구들의 전법에 대하여 명나라는 창과 조합된 소규모진영을 만들어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조선이 활을 잘 쓰는 나라라면 일본은 칼, 중국은 창이라는 특징이 잘 드러난 것이 원앙진이기도 합니다. 임진왜란에서 조총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최강검법은 원앙진에 의해 격파되었습니다. 



(출처 : pstatp.com)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살벌했던 원앙진 


일반적으로 진법이라는 것은 부대 단위로 훈련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소규모 단위로도 진법은 연구되었습니다. 원앙진은 10~12명 단위로 구성된 병사들이 한 몸이 되어 움직이도록 고안된 진법입니다. 


이름이 원앙진인 것은 원앙새가 죽을 때까지 한 쌍이 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원앙새가 죽을 때까지 한 쌍으로 살다가 한쪽이 죽으면 다른 쪽도 따라 죽는다는 말처럼 전투에서 서로간의 협력이 최상에 이르도록 하는 목적이 원앙진에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전투에 졌을 경우 대장이 사망한 원앙진의 병사들은 죽임을 당하도록 원앙진의 군법을 엄하게 하였습니다. 원앙진의 병사들은 대장이 죽지 않도록 사력을 다해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KBS 자료화면)


원앙진은 대장 1명을 두고 2쌍이 되도록 좌우로 5~6명씩이 늘어서서 총 12명의 진영을 갖춥니다. 2명씩 같은 종류의 무기를 들고 한 쌍이 되도록 하여 5~6쌍이 하나의 조를 이루도록 원앙진은 구성된 것입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원앙진의 병사들은 각각의 무기의 특성에 맞게 상황에 따라 앞서거나 뒤로 빠지며 협력해서 싸웠습니다. 


원앙진의 구성은 등패수2명, 낭패수 2명, 장창수 4명, 당파수 2명으로 되어 있고 각기 등패와 표창, 낭선, 장창, 당파와 화전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장 외에 화병이라는 보조병사도 함께하였는데 화병은 취사 등의 잡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대장은 원앙진의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도록 지휘를 하였습니다. 


등패는 방패를 말합니다. 등패수는 원앙진의 가장 선두에 서서 접근전이 될 때까지 적의 공격을 막습니다. 거리가 좁혀지면 짧은 창인 표창을 던져서 공격해 오는 적을 제거하고 칼을 뽑아 싸우게 하였습니다. 

원앙진에 적이 접근하면 낭패수가 긴 낭패를 휘두르며 등패수를 엄호합니다. 낭패라는 무기는 3미터에 가까운 길이의 대나무에 나뭇가지처럼 창날을 달아 놓은 무기입니다. 워낙 길고 여러 갈래로 날이 달려있는데다 대나무의 특성상 마구 휘어지며 휘졌고 있으니 적이 쉽사리 접근하지 못합니다. 



(낭패수가 혼란시키고 장창수가 나가며 공격하는 시범 / 출처: lhlytz.com)


달려온 적병들의 공격이 원앙진 앞에서 당패에 막히고 낭패 때문에 치고 들어오는데 지장이 생기면 뒤쪽의 장창병이 장창으로 적을 찌르며 나섭니다. 접근이 어려운데다가 장창병들이 낭패만큼이나 긴 장창으로 계속 찌르면 칼을 든 적병들은 접근하기도 전에 죽게 됩니다. 

마지막에 서 있던 당파수들의 무기는 마치 삼지창처럼 생긴 것입니다. 당파는 적의 칼을 삼지창에 끼워 돌려서 땅에 떨어트리며 공격하는 무기입니다. 사극에 보면 조선의 포졸이나 병사들이 당파를 들고 나오는데, 사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우리나라에는 없던 무기입니다. 당파는 화전을 날려 보내는 데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당파수는 마지막에서 달려오는 적에게 화전을 퍼붓는 역할도 했습니다. 


이렇듯 접근전에 날렵한 일본의 검술을 격파하기 위하여 고안된 창 위주의 원앙진은 임진왜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각 무기들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전법인데다가 엄한 규율로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되니 임진왜란 평양성 전투 이후에도 원앙진은 강력한 진법임을 인정받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왜구들이 조선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듯이 명나라 해안에서도 왜구들은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당시의 왜구들은 우리가 생각하던 해적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일본의 지방정권의 정규군에 가까웠기 때문에 파괴력이 상당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애초에 원앙진이 명나라에서 개발될 때 왜구들의 강점인 긴 칼을 이용한 검법을 차단하기 위해 고안되었으므로 임진왜란에서도 능력을 발휘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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