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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장쉐량의 시안사변과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키스세븐지식 2015. 2. 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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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장쉐량의 시안사변과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시안사변의 주인공 장쉐량의 러브스토리 


1936년에 중국에서는 시안사변이 있었습니다. 시안사변은 국민당 정부의 주석인 장제스를 2인자인 장쉐량이 감금한 군사정변입니다. 이 시안사변을 개기로 소멸해가던 중국 공산당이 되살아나고 결국 중국은 공산국가가 되고 맙니다. 



만약 시안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중국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며 한국 전쟁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중국의 공산화는 국민당의 실정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시안사변 이전까지는 장제스의 국민당이 유리한 형국을 만들고 있었고, 한국전의 1.4후퇴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을 사랑했던 장쉐량의 러브스토리가 얽혀 있습니다. 




(출처: blog.livedoor.jp/jive301)






일제의 침략과 중국의 혼란 시대 


30년대의 중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였습니다. 밖으로는 일제가 침략하여 중국을 점령해 들어오고 있었고 안으로는 공산당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20년대에 쑨원과 이루었던 국공합작은 장제스의 반공노선으로 깨지고 맙니다.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 섬멸작전을 시작했고 공산당인 홍군은 1년에 걸친 생사의 도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에 의해 침략을 받은 상황에서 내부적인 싸움에 동원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장쉐량은 정변을 일으켜 장제스를 가두고 맙니다. 장쉐량은 만주 군벌의 아들로 일본에 항거하기 위하여 장제스 휘하로 들어온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부친은 처음엔 친일파였으나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일본이 열차를 폭파하여 암살했습니다. 이 때문에 국민당 정부에 들어온 장쉐량은 당연히 일본에 대한 항전이 우선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장쉐량과 쑹메이링의 러브스토리 


시안사변이 있기 전인 20년대... 지방 군벌의 아들이었던 장쉐량은 파티에서 한 여인에게 빠져 버립니다. 그녀의 이름은 쑹메이링이었습니다. 그러나 장쉐량은 이미 결혼을 한 몸이었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 합니다. 바람기 있었던 장쉐량이지만 그 후에도 쑹메이링을 잊지 못하고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쑹메이링의 언니는 쑨원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도 정치가의 아내가 되고 맙니다. 바로 쑨원의 후계자인 장제스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 


그 후 1936년의 어느 날, 시안을 방문한 장제스를 장쉐량이 습격하여 붙잡아 감금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것이 시안사건입니다. 하지만 장쉐량은 장제스를 죽이지 않고 자신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는 대가로 풀어주게 됩니다. 장제스를 죽이면 사랑했던 쑹메이링이 홀로 남게 되는 것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다른 일설에서는 장제스의 일기를 발견한 장쉐량이 장제스의 항일의지를 읽고는 생각을 바꾸어 장제스를 살려주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이미 쑹메이링은 장쉐량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나중에 장쉐량이 대만에서 구금을 당했을 때에도 친하게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국공합작에 의한 공산당의 회생 


장쉐량은 일본과의 싸움에 집중하기 위하여 공산당과 협조하겠다는 장제스의 약속을 받고 그를 풀어 줍니다. 

이 시안사건으로 장제스는 공산당을 합법화하고 정치범을 풀어주며 2차 국공합작을 맺게 됩니다. 

공산당 입장에서는 행운의 회생이었습니다. 궤멸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살아난 공산당은 항일운동이 끝나자 결국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하기 때문입니다. 


시안정변 이후 장쉐량은 장제스를 풀어준 후 같이 난징에 따라갔다가 체포되어 군사재판을 받았습니다. 

전쟁기간 중의 하극상 사건은 사형이 집행될 수도 있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장쉐량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순순히 장제스를 따라서 난징에 갔었습니다. 장쉐량은 자신의 정변이 장제스에 대한 도전에 있지 않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였음을 항변했습니다. 


결국 장쉐량은 갇혔지만 모택동의 공산군은 국공합작 이후 장제스를 최고실권자로 인정하며 국민당 군대에 편입되어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엘리트적이고 기득층 위주의 시각으로 국민을 대하던 장제스에 비해, 중국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던 중국 공산군은 점점 확대되어 장제스를 이길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장제스가 아니라 모택동을 택한 것은 썩은 국민당에 실망을 한 국민들의 선택이었습니다. 









53년간의 감금생활을 하게 되는 장쉐량 


1949년 장제스는 공산당에 패하고 대만으로 도망을 갑니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중국에서 쫓겨날 때 장쉐량을 끌고 갔습니다. 대만에서 장쉐량은 1990년대까지 42년간 자택연금 상태로 갇혀 지내게 됩니다. 중국 본토에서부터라면 53년의 기나긴 구금이었습니다. 


장제스를 제압하고 장쉐량이 정권을 잡았다면, 쑹메이링을 위해 장제스를 놔 주지 않았다면, 순진하게 장제스를 따라서 난징에 가지 않았다면 이렇게 평생을 구금상태로 갇혀 지내지 않아도 됐을지 모를 장쉐량이었습니다. 덕분에 중국 뿐 아니라 세계의 정세도 완전히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뒷면에는 쑹메이링에 대한 연민이 있었습니다. 


장제스가 죽은 후 장쉐량은 하와이로 떠났다가 그 곳에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하와이로 간 장쉐량은 어떤 화교 학자와의 인터뷰에서, 직접적인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장제스의 아내였던 쑹메이링을 평생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었던 것으로 말하여 중국 언론이 발칵 뒤집혀지기도 했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당시 장쉐량에게는 대만까지 쫓아 온 두 번째 부인인 자오이디가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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