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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원본) / 열국(列國)의 쟁웅(爭雄)시대 - 제2장 - 3 "백제의 건국과 마한(馬韓)의 멸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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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원본) / 열국(列國)의 쟁웅(爭雄)시대 - 제2장 - 3 "백제의 건국과 마한(馬韓)의 멸망"

키스세븐지식 2023. 5. 20.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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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원본)

조선상고사 (원본) / 열국(列國)의 쟁웅(爭雄)시대 - 제2장 - 3 "백제의 건국과 마한(馬韓)의 멸망"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책 조선상고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총 12권)

그러나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중요 부분에 형광색을 하여 요약 파악에 쉽도록 도움이 첨부된 포스팅입니다.

(참고: 《조선상고사》(저자 신채호)는 저작권 만료로 현재 CC0이 되어 있음)

 

 

 

이 블로그는 "심심할 때 잡지처럼 읽는 지식"이라는 목적으로 운영됩니다. 즐겨찾기(북마크) 해 놓으면 심심할 때 좋습니다. 

 


 

조선상고사 (원본) / 열국(列國)의 쟁웅(爭雄)시대 - 제2장 - 3 "백제의 건국과 마한(馬韓)의 멸망"

 

 

백제의 건국과 마한(馬韓)의 멸망

1) 召西奴 女大王의 백제 건국

 

백제 본기 ( 百濟本紀 ) 는 고구려 본기보다 더 심하게 문란하다. 백 몇십 년의 감축은 물론이고, 그 시조와 시조의 출처까지 틀린다. 그 시조소서노 여대왕 ( 召西奴女大王 ) 이니 하북 ( 河北 ) 위례성 ( 慰禮城 ) --지금의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그가 죽은 뒤에 비류 ( 沸流 ) ·온조 ( 溫祚 ) 두 아들이 분립하여 한 사람은 미추홀 ( 彌鄒忽 : 지금의 仁川 ) 에, 또 한사람은 하남 ( 河南 ) 위례홀 ( 慰禮忽 ) 에 도읍하여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되었는데, 본기에는 소서노를 쑥 빼고 그 편 ( 篇 ) 첫머리에 비류 ·온조의 미추홀과 하남 위례홀의 분립을 기록하고, 온조왕 13 년에 하남 위례홀에 도읍하였음을 기록하였으니, 그러면 온조가 하남 위례홀에서 하남 위례홀로 천도한 것이 되니 어찌 우스갯소리가아니랴? 이것이 첫째 잘못이요, 비류 ·온조의 아버지는 소서노의 전남편인 부여사람 우태 ( 優台 ) 이므로, 비류 ·온조의 성도 부여요, 근개루왕 ( 近蓋婁王 ) 도 백제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스스로 인정하였는데, 본기에는 비류·온조를 추모 ( 鄒牟 ) 의 아들이라 하였음이 둘째 잘못이다. 이제 이를 개정하여 백제 건국사를 서술한다.

 

소서노가 우태의 아내로 비류·온조 두 아들을 낳고 과부가 되었다가, 추모왕에게 개가하여 재산을 기울여서 추모왕을 도와 고구려를 세우게 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 추모왕이 그 때문에 소서노를 정궁 ( 正宮 ) 으로 대우하고 , 비류·온조 두 아들을 친 자식같이 사랑하였는데 , 유류 ( 橋留 ) 가 그 어머니 예씨 ( 禮氏 ) 와 함께 동부여에서 찾아오니 , 예씨가 원후 ( 元后 ) 가 되고 소서노가 소후 ( 小后 ) 가 되었으며, 유류가 태자가 되고 비류 ·온조 두 사람의 신분이 덤받이자식 됨이 드러났다. 그래서 비류와 온조가의논하여,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 하여 그 뜻을 소서노에게 고하고 소서노는 추모왕에게 청하여, 많은 금 ·은 ·주보 ( 珠寶 ) 를 나누어 가지고 비류 ·온조 두 아들과 오간 ( 烏干 ) ·마려 ( 馬黎 ) 등 18 사람을 데라고 낙랑국을 지나서 마한으로 들어갔다. 마한으로 들어가니 이때의 마한 왕은 기준 ( 箕準 ) 의 자손이었다. 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쪽 백 리의 땅 미추홀 --지 금의 인천과 하북 위례홀 --지금의 한양 등지를 얻어 소서노가 왕을 일컫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그런데 서북의 낙랑국 최씨가 압록강의 예족 ( 濊族 ) 과 손잡아 압박이 심하므로 소서노가 처음엔 낙랑국과 친하고 예족만 구축하다가 나중에 예족의 핍박이 낙랑국이 시켜서 하는 것임을 깨닫고, 성책을 쌓아 방어에 전력을 다했다. 백제 본기에 낙랑왕 ( 樂浪王 ) 이라 낙랑태수 ( 樂浪太守 ) 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백 몇십 년의 연대를 줄인 뒤에 그 줄인 연대를 가지고 지나의 연대와 대조한 결과로 낙랑을 한군 ( 漢郡 ) 이라 하여 낙랑태 수라고 쓴 것이며, 예 ( 濊 ) 라 쓰지 않고 말갈 ( 靺鞨 ) 이라 썼는데, 이것은 신라 말엽에 예를 말갈이라고 한 당 ( 唐 ) 나라 사람의 글을 많이 보고 마침내 고기 ( 古記 ) 의 예를 모두 말갈로 고친 것이다.

 

 

2)召西奴가 죽은 뒤 두아들의 分國과 그 흥망

 

소서노가 재위 l3 년에 죽으니, 말하자면 소서노는 조선 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일 뿐 아니라, 곧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었다.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 · 온조 두 사람이 의논하여,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략해오는데 어머니 같은 성덕 ( 聖德 ) 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자리를 보아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에 형제가 오간 · 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 ( 負兒岳 ) --지금 한양의 북악 ( 北岳 ) 에 올라가 서울될 만한 자리를 살폈는데, 비류는 미추홀을 잡고, 온조는 하남 위례홀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오간 · 마려 등이 비류에게 간하기를, “하남 위례홀은 북은 한강을 지고, 남은 기름진 평야를 안고, 동은 높은 산을 끼고, 서는 큰 바다 를 둘러 천연의 지리가 이만한 곳이 없겠는데, 어찌하여 다른 데로 가려고 하십니까? ”라 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므로 하는 수 없이 형제가 땅과 인민을 둘로 나누어 비류는 미추홀로 가고, 온조는 하남 위레홀로 가니, 이에 백제가 나뉘어 동 · 서 두 백제가 되었다.

 

본기에 기록된 온조의 13 년은 곧 소서노의 연조요, 그 이듬해 14 년 이 곧 온조의 원년이니, l3 년으로 기록된 온조 천도의 조서는 비류와 충돌된 뒤에 온조 쪽의 인민에게 내린 조서이고, 14 년 곧 온조 원년의, “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 ( 分漢城民 ). ”고 한 것은 비류 · 온조 형제가 백성을 나누어 가지고 각기 자기 서울로 간 사실일 것이다. 미추홀은 `메주골'이요 , 위례홀은 `오리골' ( 본래는 아리골 ) 이다. 지금의 습속에 어느 동네이든지 흔히 동쪽에 오리골이 있고 서쪽에 메주골이 있는데 그뜻은 알 수 없으나, 그 유래가 또한 오래다. 그런데 비류의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 많이 흩어져 달아났지마는, 온조의 하남 위례홀은 수토가 알맞고 오곡이 잘 되어 인민이 편안히 살아가므로 비류는 부끄러워서 병들어 죽고 그 신하와 인민은 다 온조에게로 오니, 이에 동 ·서 두 백제가 도로 하나로 합쳐 졌다.

 

 

3) 溫祚의 馬韓 襲滅 ( 온조의 마한 습멸 )

 

백제가 마한의 봉토 ( 封土 ) 를 얻어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소서노 이래로 공손히 신하의 예로써 마한을 대하여,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 나 노루를 마한에 대하여,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나 노루를 마한에 보내고 전쟁을 하여 얻은 포로를 마한에 보냈는데, 소서노가 죽은 뒤 에 온조가 서북쪽의 예와 낙랑의 방어를 핑계하여, 북의 패하 (浿河 ) ---지금의 대동강으로부터 남으로 웅천 ( 熊川 )--- 지금의 공주 ( 公 州 ) 까지 백제의 국토로 정하여달라고 해서 마침내 그 허락을 얻고 그 뒤에 웅천에 가서 마한과 백제의 국경에 성책을 쌓았다.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왕의 모자가 처음 남으로 왔을 때에 발 디딜 땅이 없어 내가 서북 백 리 땅을 떼어주어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인데, 이제 국력이 좀 튼튼해졌다고 우리의 강토를 눌러 성책을 쌓으니, 어찌 의리있는 짓이냐? ” 하고 꾸짖었다.

 

온조는 짐짓 부끄러워하는 빛을 보이고 성책을 헐었으나, 좌우에게, “마한왕의 정치가 옳은 길을 잃어 나라의 형세가 자꾸 쇠약해지니, 이제 취하지 아니하면 남에게 돌아갈 것이다.” 하고 오래지 않아 사냥한다 핑계하고 마한을 습격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그 50 여국을 다 토멸하고, 그 유민으로서 의병을 일으킨 주륵 ( 周勒 ) 의 온 집안을 다 목베어 죽이니, 온조의 잔학함이 또한 심하였다.

 

기준 ( 箕準 ) 이 남으로 달아나서 마한의 왕위를 차지하고 성을 한씨 ( 韓氏 ) 라 하여 자손에게 전해내려오다가 이에 이르러 망하니, 삼국지에, “기준의 후예가 끊어져 없어지고 마한인이 다시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다 ( 準後滅絶 馬韓人 復自立爲王 ). ”라고 한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인데, 온조를 마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지나인이 매양 백제를 마한이라 일컬었기 때문이다. 온조는 고구려의 유류 (儒留 ) ·대주류 ( 大朱留 ) 두 대왕과 같은 시대이니, 온조 대왕 이후에 낙랑의 침략을 기록한 것이 없음은 대주류왕 이 이미 낙랑을 토멸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다.

 

 

[조선상고사 (원본) / 열국(列國)의 쟁웅(爭雄)시대 - 제2장 - 3 "백제의 건국과 마한(馬韓)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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