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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원본) / 열국(列國)의 쟁웅(爭雄)시대 - 제2장 - 2 "고구려의 발흥(勃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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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원본) / 열국(列國)의 쟁웅(爭雄)시대 - 제2장 - 2 "고구려의 발흥(勃興)"

키스세븐지식 2023. 5. 14.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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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원본)

열국(列國)의 쟁웅(爭雄)시대 - 제2장 - 2 "고구려의 발흥(勃興)"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책 조선상고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총 12권)

그러나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중요 부분에 형광색을 하여 요약 파악에 쉽도록 도움이 첨부된 포스팅입니다. 

(참고: 《조선상고사》(저자 신채호)는 저작권 만료로 현재 CC0이 되어 있음)

 

 

 

이 블로그는 "심심할 때 잡지처럼 읽는 지식"이라는 목적으로 운영됩니다. 즐겨찾기(북마크) 해 놓으면 심심할 때 좋습니다. 

 


 

조선상고사 (원본) / 열국(列國)의 쟁웅(爭雄)시대 - 제2장 - 2 "고구려의 발흥(勃興)"

 

고구려의 발흥(勃興)

1) 鄒牟王(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고구려 시조 추모 ( 鄒牟 : 혹 朱蒙 ) 는 천생으로 용맹과 힘과 활 쏘는 재주를 타고나서, 과부 소서노 ( 召西奴 ) 의 재산으로 영웅호걸을 불러 모아 교묘하게 왕검 이래의 신화를 이용하여, 하늘의 알에서 강생 ( 降 生 ) 하였다 자칭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안으로 열국의 신임을 받아 정신적으로 조선을 통일하고 밖으로 그의 기이한 행적의 이야기를 지나 각지에 퍼뜨려서 그 제왕과 인민들이 교주로 숭배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신라 문무왕 ( 文武王 ) 은, `남해에 공을 세우고, 북산에 덕을 쌓았다 ( 立功南海 積德北山 ). ' 하는 찬사를 올렸고, 지나 2 천 년 이래의 유일한 공자 반대자인 동한 ( 東漢 ) 의 학자 왕충 ( 王充 ) 이 그 사적을 기록함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면 기원전 58 년이 출생한 해요, 기원전 37 년이 그 즉위한 해이지만, 이는 줄어든 연대라 의거할 것이 못 되고, 추모 ( 鄒牟 ) 가 곧 해모수의 아들이니 기원전 200년 경 동 · 북부여가 분립하던 때가 출생한 때일 것이고, 위만과 같은 때 일 것이다.

 

처음에 아리라〔松花江〕의 부근에 있는 장자 ( 長者 ) 가, 유화 ( 柳花 ) · 훤화 ( 萱花 ) ·위화 ( 葦花 ) 의 세 딸을 두었는데, 다 절세의 미인이요, 유화가 더욱 아름다웠다. 북부여왕 해모수가 나와 다니다가 유화를 보고 놀라 사랑하여 야합해서 아이를 배었다. 그러나 이때 왕실은 호족과만 결혼하고 서민과는 결혼을 하지 아니했으므로 해모수가 그 뒤에 유화를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서민은 서민과만 결혼하는데, 남자가 반드시 여자의 부모에게 가서 폐백을 드리고 사위되기를 두 번, 세 번 간곡히 빌어서 그 부모의 허락을 얻어서 결혼하고 결혼한 뒤에는 남자가 여자의 부모를 위해, 그 집의 머슴이 되어 3 년의 고역을 치르고야 딴 살림을 차려 자유로운 가정이 되었으므로 유화의 실행이 발각되매 그 부모가 크게 노하여 유화를 잡아 우발수 ( 優渤水 ) 에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어부가 그녀를 건져 동부여왕 해금와 ( 解金輕 ) 에게 바쳤다.

 

금와왕이 유화의 아름다운 자색을 사랑하여 후궁에 두어 첩을 삼았는데, 오래잖아 아이를 낳으니 곧 해모수와 야합한 결과였다.

 

금와왕이 유화를 힐문하니 유화가 이를, “해 그림자에 감응하여 낳은 천신 ( 天神 ) 의 아들이고, 자기가 아무 잘못을 범한 일이 없다.”고 했다. 금와왕이 그 말을 믿지 않고, 그 아이를 돼지에게 먹이려고 우리에 넣어도 보고 말에 밟혀 죽으라고 길에 내던져도 보고, 산짐승의 밥이 되라 하여 깊은 산속에 버려도 보았으나, 다 아무 소용이 없으므 로 이에 유화에게 거두어 기르기를 허락하였다. 그 아이가 자라니 그 또래에서 기운이 뛰어나고 활 잘 쏘기가 짝이 없으므로 이름을 추모 ( 鄒牟 ) 라고 하였다.

 

위서 ( 魏書 ) 에는 추모를 주몽 ( 朱蒙) 이라 쓰고, 주몽은 부여 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을 일컬은 것이라고 풀이하였으며 만주원류고 ( 滿洲源流考 ) 에는, “지금 만주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릴무얼〔卓琳奔阿〕'이라 하니, 주몽은 곧 `주릴무얼'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비문에는 주몽을 추모라 하였으며, 문무왕 ( 文武王 ) 의 조서 ( 詔書 ) 에는 `중모 ( 中牟 ) '라 하고 `주몽'이라고 하지 않았다. 주몽이라 하였음은 지나사에 전해오는 것을 신라의 문사들이 그대로 써서 고구려 본기에 올리게 된 것인데 추모 · 중모는 `줌' 혹은 `주모'로 읽을 것이니, 이는 조선어요 주몽은 `주물'로 읽을 것이다. 이는 예어 ( 濊語 )-- 만주족 시대의 말로, 지나사의 주몽은 예어를 말한 것이니, 원류고에 말한 바가 이치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비문에 따라 추모 ( 鄒牟 ) 라고 한다.

 

금와왕이 아들 7 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대소이다. 대소추모의 재주를 시기하여 왕에게 권하여 죽이려고 하였는데, 늘 유화의 주선으로 화를 면했다. 추모가 19 살이 되자 대궐에서 기르는 말 먹이는 일을 맡아보았는데 말을 다 살찌고 튼튼하게 잘 먹였으나 오직 준마 하나를 골라 혀에 바늘을 꽂아놓아 말이 먹지 못해서 날로 여위어 졌다. 왕이 말들을 돌아보고는 추모의 말 잘 먹인 공을 칭찬하고, 그여윈 말을 상으로 주었다. 추모는 바늘을 뽑고 잘 길러서 신수두의 10 월 대제 ( 大祭 ) 에 타고나가 사냥에 참여하였는데, 왕은 추모에게 겨우 화살 하나를 주었지마는, 추모는 말을 잘 달리고 활을 잘 쏘아 그가 쏘아 잡은 집승이 대소 7 형제가 잡은 것보다 몇 갑절이 더 많았다. 이에 대소는 더욱 그를 시기하여 기어코 죽이려고 음모를 꾸였다. 추모가 이를 알고 예씨 ( 禮氏 ) 에게 장기들어 표면으로 가정생활에 안심하고 있음을 보이고 속으로는 은밀히 오이 ( 烏伊 ) ·마리 ( 摩離 ) ·협부 ( 父 ) 세 사람과 공모하여 비밀히 어머니 유화에게 작별을 고하고 아내를 버리고는 도망하여 졸본부여 ( 卒本扶餘 ) 로 갔는데, 이때 추모의 나이 22 살이었다.

 

졸본부여에 이르니 이곳의 소서노 ( 召西奴 ) 라는 미인이 아버지 연타발 ( 延陀渤 ) 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서, 해부루왕의 서손 ( 庶孫 ) 우태 ( 優台 ) 의 아내가 되어 비류 ( 沸流 ) ·온조 ( 溫祚 ) 두 아들을 낳고 우태가 죽어 과부로 있었는데, 나이 37 살이었다. 추모를 보자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였는데 추모는 그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 부분노 ( 扶芬奴 ) 등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나라를 경영하여, 흘승골 ( 升骨 ) 의 산 위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가우리'라 하였다. `가우리'는 이두자 ( 吏讀字 ) 로 고구려 ( 高句麗 ) 라 쓰니, 중경 ( 中京 ) 또는 중국 ( 中 國 ) 이라는 뜻이었다.

 

졸본부여의 왕 송양 ( 松讓 ) 과 활쏘기를 겨루어 이를 꺾고 이어 부분노를 보내 그 무기고를 습격해서 빼앗아 마침내 그 나라를 항복받고, 부근의 예족 ( 濊族 ) 을 내쫓아 백성들의 폐해를 없앴으며, 오이 ( 烏 伊 ) ·부분노 등을 보내어 태백산 ( 太白山 ) 동남쪽의 행인국 ( 荇人國 : 지점 미상 ) 을 토멸하여 성읍 ( 城邑 ) 을 삼고, 부위염 ( 扶慰) 을 보내어 동부여를 쳐서 `북가시라'의 일부분을 빼앗으니 <광개토왕비문에, “동 부여의 옛 것이 추모왕의 속민이 되었다 ( 東扶餘 舊是 鄒牟王 屬民 ) ”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킴인 듯 >, 이에 고구려가 섰다. 전사 ( 前史 ) 에 왕왕 송양 ( 松讓 ) 을 나라 이름이라고 하였는데, 이상 국집 ( 李相國集 ) 동명왕편 ( 東明王篇 ) 에 인용한 구삼국사 ( 舊三國史 ) 를 상고해보면 비류왕 송양 ( 沸流王松讓 ) 이라고 하였으니, 비류는 곧 부여로 졸본부여를 일컬은 것이므로, 송양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졸본 부여왕의 이름이다. 또 추모가 졸본부여의 왕녀에게 장기들었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죽은 뒤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고 하였으나 졸본부여의 왕녀 곧 송양의 딸에게 장가 든 사람은 추모의 아들 유류 ( 備留 ) 요, 추모가 장가든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왕녀가 아니다 . 추모왕을 본기 ( 本紀 ) 에 `동명성왕 ( 東明聖王 ) '이라 하였으나, 동명 ( 東明 ) 은 `한몽'으로 읽을 것이니, `한몽'이란신수두 대제 ( 大祭 ) 의 이름 이다. 추모왕을 신수두 대제에 존사 ( 尊祀 ) 하므로 한몽 --동명이라는 칭호를 올린 것이고, 성왕의 성 ( 聖 ) 은 `주무'의 의역 ( 義譯 ) 이다.

 

 

2) 東扶餘와 고구려의 알력

 

추모왕 다음으로 아들 유류왕 ( 儒留王 ) 이 왕위를 잇고, 유류왕 다음 에 그 아들 대주류왕 ( 大朱留王 ) 이 왕위를 이었다. 유류는 본기의 유리명왕 ( 琉璃明王 ) 유리 ( 類利 ) 이니, 유류 ( 儒留 ) ·유리 ( 琉璃 ) ·유리 ( 類 利 ) 는 다 `누리'로 읽을 것으로 세 ( 世 ) 라는 뜻이고 명 ( 明 ) 이라는 뜻이요, 대주류왕은 본기의 대무신왕 무휼( 大武神王無恤 ) 이니, 무 ( 武 ) · 주류 ( 朱留 ) ·무홀 ( 無恤 ) 은 다 `무뢰'로 읽을 것으로 우박〔雹〕의 뜻이고 신 ( 神 ) 의 뜻인데, 이제 유리 ( 琉璃 ) 와 명 ( 明 ) 은 시호로 쓰고, 유리 ( 類利 ) 는 왕의 이름을 쓰며, 무 ( 武 ) 와 신 ( 神 ) 은 시호로 쓰고, 무홀 ( 無恤 ) 은 이름으로 쓴 건 본기의 망령된 판단이다. 이제 여기서는 비문을 쫓아 유리 ( 琉璃 ) 를 유류 ( 儒留 ) 로, 대무신 ( 大武神 ) 을 대주류 ( 大朱留 ) 로 쓴다.

 

유류왕 때에 동부여가 강성하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왕 ( 帶素王 ) 은 왕위를 이어받자 고구려에게 신하 노릇하기를 요구하고 볼모[質子〕를 보내라고 하여, 왕이 그대로 하려고 하다가 두 태자를 희생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태자는 도절 ( 都切 ) 인데, 유류왕이 동부여에 볼모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듣지 아니하자 왕이 크게 노했으므로 도절이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둘째 태자는 해명 ( 解明 ) 인데 그는 용맹이 뛰어났었다. 유류왕이 동부여의 침략을 두려워해 국내성 ( 國內 城 )-- 지금의 집안현 ( 輯安縣 ) 으로 서울을 옮기니, 해명이 이를 겁약 ( 怯弱 ) 한 일이라 하여 따라가지 아니하였다. 북부여왕 (北扶餘王 : 본보기의 黃龍國王 ) 이 해명에게 강한 활을 보내어 그 힘을 시험해보려고 하자 해명이 그 자리에서 그 활을 당겨서 꺾어 북부여 사람의 힘 없음을 조롱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해명은 장차 나라를 위태롭게 할 인물이라하여 처음에는 북부여에 보내서 북부여왕의 손을 빌려 죽이려고 하였으나, 북부여왕이 해명을 공경하고 사랑하여 후히 대접해서 돌려보냈다. 유류왕은 더욱 부끄럽고 분하게 여겨 해명에게 칼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두 태자의 죽음은 혹 대궐 안 처첩들의 질투가 원인이 되기도 하였 겠지마는 그것은 대개 동부여와의 외교상 관계에서 온 것이었으니, 유류왕이 동부여를 얼마나 두려워했던가를 가히 미루어 알 것이다. 동부여왕 대소가 여러 번 수만 명 대병을 일으켜서 고구려를치다가 다 성공치 못하였으나, 고구려는 몹시 피폐해져서 동부여왕 대소가 또 사자를 보내 조공을 하지 아니함을 꾸짖자, 유류왕은 두려워서 애걸하는 말로 사자에게 회답해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니까 왕자 주류 ( 朱留 : 본기의 無恤 ) 는 이때 아직 어렸으나, 죽은 해명의 기개가 있어 부왕이 비굴하게 구는 것을 부당하다 하고 스스로 거짓 부왕의 명이라 하여 동부여의 사자에게 금와가 말 먹이는 비천한 직책으로 추모왕을 천대하고, 대소가 추모왕을 죽이려 한 일들을 낱낱이 들어서 죄를 나무라고 동부여의 임금과 신하의 교만함을 꾸짖어서 사자를 쫓아보냈다.

 

동부여 대소왕이 사자의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또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침노해왔다. 유류왕은 왕자 주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매우 노하였으나, 이제 노경 ( 老境 ) 에 있어 주류를 도절이나 해명처럼 죽일 수도 없었으므로 나라의 병마 ( 兵馬 ) 를 모두 주류에게 내어 주어서 나가 싸우게 하였다. 주류는 생각하기를 동부여는 군사의 수효가 많고 고구려는 적으며 동부여는 마병 ( 馬兵 ) 이고 고구려는 보병 ( 步兵 ) 이니, 적은 보병으로 많은 마병과 들판에서 싸우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 하고, 동부여의 군사가 지나갈 학반령 ( 鶴盤嶺 ) 의 골짜기에 복병시켰다가 동부여의 군사를 돌격하니, 길이 험하고 좁아서 마병이 불편한지라 동부여의 군사가 모두 말을 버리고 산 위로 기어올라갔다. 주류가 군사를 몰아서 그 전군을 섬멸하고 많은 말을 빼앗으니, 동부여의 정예가 이 싸움에서 전멸하여 다시는 고구려와 겨루지 못하였다. 싸움이 지나니 주류를 봉하여 태자로 삼고, 겸하여 병마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맡겼다.

 

 

3)大朱留王의 東扶餘 정복

 

대주류왕이 학반령의 싸움에서 동부여를 크게 무찌르고 유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지 4 년에 5 만의 군사로 북벌 ( 北伐 ) 의 싸움을 일으켜서 동부여를 쳐들어갔는데, 도중에 창을 잘 쓰는 마로 ( 麻盧 ) 와 칼을 잘 쓰는 괴유 ( 怪由 ) 를 얻어 앞잡이를 삼아서 `가시라'의 남쪽에 이르러 진구렁을 앞에 두고 진을 쳤다. 대소왕이 몸소 말을 타고 고구려의 진을 바로 침범하다가, 말굽이 진구렁에 빠지자 괴유가 칼을 들어 왕을 베었다.

 

대소왕이 죽었으나 동부여 사람들은 더욱 분발하여 대소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대주류왕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마로는 전사하고 괴유는 부상하여 고구려의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대주류왕은 여러번 포위를 뚫고나오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이레를 굶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마침 큰 안개가 일어나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는 지라 대주류왕이 풀로 사람을 만들어 진 가운데 세워두고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도망하였다. 이물림 ( 利勿林 ) 에 이르러서는 전군 이 굶주리고 피로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으나, 들짐승을 잡아먹고 간신히 귀국하였다.

 

이 싸움은 동부여가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대소왕이 죽고 태자가 없어서 대소왕의 여러 종형제가 왕위를 다투어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워 졌다. 계제 ( 季弟 ) 모갑 ( 某甲 ) 은 종자 백여 명과 함께 남가시라 ( 南沃沮 ) 로 나와 사냥하고 있는 해두왕 ( 海頭王 ) 을 습격해서 죽이고, 군사를 모아 남가시라를 완전히 평정하니, 이는 남동부여 ( 南東扶餘 ) 이고, 종제 모을 ( 某乙) 은 고도 ( 故都 ) 에서 스스로 서니 이는 북동부여 ( 北東扶餘 ) 이다.

 

그러나 그 밖의 여러 아우들이 제각기 군사를 모아 모을을 쳤으므로 모을은 군사 1 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여 대주류왕은 마침 내 북동부여를 전부 토평하였고 국호를 그대로 존속시켰다. 역사에 보인 갈사국은 곧 남동부여이고, 동부여는 곧 북동부여이며, 후한서, 삼국지 등의 옥저전 ( 沃沮傳 ) 에 보인 불내예 ( 不耐濊 ) 도 북동부여이고, 예전 ( 濊傳 ) 에 보인 불내예 ( 不耐濊 ) 는 남동부여이다.

 

 

4) 大朱留王의 樂良

 

최씨 ( 崔氏 ) 가 남낙랑을 차지하여, 낙랑왕 ( 樂浪王 ) 이라 일컬었음은 제 3 편 제 4 장에 말하였거니와, 그 끝의 임금 최이 ( 崔理 ) 의 대에 이르니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때였다. 최이는 고구려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미인 딸 하나를 미끼로 삼아 고구려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이때 갈사국 ( 曷思國 : 남동부여 ) 의 왕이 그 손녀를 대주류왕의 후궁으로 바쳐서 아들을 낳았는데, 얼굴이 기묘하고 풍신이 썩 좋아 이름을 호동 ( 好童 ) 이라고 하였다. 호동이 외가인 남동부여에 가는 길에 낙랑국을 지나게 되었는데 , 최이가 출행 ( 出行 ) 하다 그를 만나보고 놀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북국 ( 北國 ) 신왕 ( 神王 ) 의 아들 호동이 분명하구나.” 하고, 드디어 호동을 데려다가 그 딸과 결혼시켰다.

 

낙랑국의 무기고에 북과 나팔이 있는데, 소리가 멀리까지 잘 들리므로 외적의 침입이 있으면 매양 이것을 울려 여러 속국의 군사를 불러서 적을 막았다. 호동이 그 아내 최녀 ( 崔女 ) 를 꾀어, “고구려가 낙랑을 침입하거든 그대가 그 북과 나팔을 없애버리시오.” 하고 귀국하여 대주류왕에게 권해서 낙랑을 쳤다. 최이가 북과 나팔을 울리려고 무기고에 들어가보니 북과 나팔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북과 나팔 소리가 나지 아니하니 속국이 구원을 오지 않았다. 최이는 그 딸의 소행임을 알고 딸을 죽인 뒤에 나가서 항복하였다.

 

호동은 이런 큰 공을 세웠으나, 왕후가 적자 ( 嫡子 ) 의 지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대주류왕에게 호동이 자기를 강간하려 하였다고 참소하여, 호동은 자살하기에 이르렸다. 이에 아름다운 남녀 한 쌍의 말로가 다 같이 비극으로 되고 말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대주류왕 즉위 4 년 여름 4 월에 대소의 아우가 갈사왕 ( 曷思王 : 남동부여왕 ) 이 되었음을 기록하였고, 즉 위 15 년 여름 4 월에 호동이 최이의 사위가 되었음을 기록하였으며, 그 해 11 월에 호동이 왕후의 참소로 자살하였음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갈사왕이 있은 뒤에야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손녀에게 장가 들 수 있고, 또 그런 뒤에야 갈사왕 손녀의 소생인 호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니 , 설혹 대주류왕 4 년 , 남갈사 건국 원년 4 월에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손녀에게 장가 들어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이듬해 정월에 호동을 낳았다 할지라도, 15 년에는 겨우 11 살의 어린아이니, 11 살 어린아이가 어찌 남의 남편이 되어 그 아내와 멸국 ( 滅國 ) 의 계획을 행할 수 있었으랴 11 살 난 어린아이가 어찌 적모 ( 嫡母 ) 강간의 참소로 부왕의 혐의를 받아 자살하기에 이르렀으랴?

 

동부여가 원래 북갈사에 도읍하였으니, 소위 갈사왕은 분립하기 전의 동부여를 가리킴이 아닌가하는 이도 있겠지마는 그러면 이는 대소 왕 ( 帶素王 ) 때가 되니, 대소왕이 그 딸을 대주류왕에게 준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대개 신라 말에 고구려사의 연대를 줄이고 사실을 이리저리 옮겨 고쳤으므로 이같이 모순되는 기록이 생겼거니와, 대주류왕 20 년이 또, `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 ( 伐樂浪滅之 ). '고 하였으니, 한 낙랑을 두 번 멸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 호동이 장가 들고 자살함이 다 20 년의 일이 아닌가 한다. 이상에 말한 북부여 ·북동부여 ·고구려 세 나라는 다 신조선 옛 강토에서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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