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금속 활자 신문
조보(조선 관보)의 사연과 금속활자 활판 신문
"최초"라는 개념이 무엇을 기준으로 말하느냐의 차이도 있겠지만, 민간이 유료로 금속 인쇄 활자를 이용해서 신문을 발행했다면, 조선 관보도 세계 최초의 신문이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선조 때문에 단기간의 역사였을 뿐이니...
이 블로그는 "심심할 때 잡지처럼 읽는 지식"이라는 목적으로 운영됩니다. 즐겨찾기(북마크) 해 놓으면 심심할 때 좋습니다.
세계 최초 금속활자 신문 - 조보(조선 관보)의 사연과 금속활자 활판 신문
세계 최초의 인쇄 신문
신문이란 새로운 정보를 나누는 것입니다. 일반 백성은 그렇다 쳐도, 적어도 관리들은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관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관리들이 보는 신문인 것입니다.
기록만으로 최초의 인쇄 신문을 본다면, 송나라의 목판 인쇄 관보입니다. 그러나 금속활자 활판으로 나온 최초의 신문은 1650년 독일의 "아인코멘데차이퉁"이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왜 인쇄형을 따로 보냐면, 그 전의 신문을 손으로 베껴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선에서 1577년 활판으로 만든 신문이 있었습니다. 위와 비교해 보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신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 목판이고 금속활자는 15%이하라는 것과, 100일도 안 돼서 강제로 폐간되었다는 것입니다.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 신문
그러면 조선 시대의 최초 활판인 조보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조보란 뜻은 조선 관보라는 의미입니다. 도승지가 총감독을 하고 상소문, 왕가 소식, 지방 보고서 등이 기사로 실렸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일이 손으로 베끼다 보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민간인들이 의정부에 제안해 왔습니다. 활자로 찍어서 유료로 팔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직업이 없으니 이렇게 돈을 벌겠다는 것인데, 특별한 제한 규정이 없었기에 그대로 승인받아서 판매를 했었습니다.
1577년, 이렇게 해서 조선에서 최초로 인쇄를 한 신문이 발행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유료로 팔았으니, 현대의 신문과 거의 유사한 운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활자 인쇄본으로는 어쩌면 세계 최초의 신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속 좁은 선조의 언론 탄압
그런데 진짜 문제가 여기서 터집니다. 조선 최고의 속 좁은 군주로 평가받는 선조가 유료 신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선조는 노발대발했습니다. 국가기밀이라도 적히면 어쩔 것이냐며 색출해서 극형에 처하라고 한 것입니다.
허가를 내준 관료들은 위기를 넘어가려고 그 죄를 민간 업자들에게 떠넘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30여 명의 민간인들이 잡혀들어갔습니다. 이들은 죽을 정도로 맞고 고문을 받았습니다. 옛날 시문은 무조건 고문해서 없던 죄도 만드는 식이었으니....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이렇게 해서 1577년 8월부터 11월까지, 단 100일간만 발행된 신문은 더 이상 만들지 못하게 됩니다. 비록 일반 백성에게까지 배포된 것은 아니지만, 최초로 발간된 민간인쇄신문이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일부는 금속활자였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역사입니다.
함께 볼 심심풀이 지식거리
대립군 뜻과 실화 - 광해군의 임진왜란과 대립제, 방군수포제
[세계 최초 금속활자 신문 - 조보(조선 관보)의 사연과 금속활자 활판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