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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개척단 사건이란 - 대한 청소년 개척단 사건, 전말과 진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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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개척단 사건이란 - 대한 청소년 개척단 사건, 전말과 진실

키스세븐지식 2020. 10. 23.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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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개척단

대한청소년개척단 사건이란? - 서산개척단 사건 역사 진실

[서산개척단 사건이란 - 대한 청소년 개척단 사건, 전말과 진실]


삼청교육대 사건이나 형제복지원 사건 등에서 보듯이 보수 독재정권 아래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인권유린 사건이 많았습니다.

 

서간개척단 사건이란 것도 그런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또는 대한청소년개척단 사건이란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이런 사건들의 문제는 국가 공권력에 의해 아무나 끌려가서 죽도록 학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는 이들의 억울한 사연을 기록해봅니다.

 

 



대한 청소년 개척단이란


간단히 설명 먼저 하자면, 대한청소년개척단이란 낙후된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서 젊은 사람들을 동원하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 개발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계획적인 사업이 아니고 황무지를 개발해서 농사 지을 땅을 만드는 정도의 사업이었습니다.


1960년대는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농업 등의 사업도 중요한 시대였습니다. 더구나 당시 미국은 저개발국에 개발 자금을 원조하고 있었습니다. 지역개발을 하고 그에 대한 원조도 받을 수 있으니 못 살던 우리나라에서는 욕심을 부릴만한 사업이기도 합니다.

 

[박정희 정권] 서산개척단 사건이란 - 대한 청소년 개척단 사건, 전말과 진실 / ⓒ koreanfilm.or.kr


1961년 정부는 유명한 거지왕 '김춘삼'에게 이 사업을 맡기는 등 전국에서 사업을 벌여 많은 원조를 얻어 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해 5월 쿠데타를 일으켜서 강제로 정권을 빼앗은 박정희 정부는 이게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못된 생각을 했습니다. 공짜로 사람을 부려먹고 미국의 지원금을 정권 유지 자금으로 쓸 수 있다는 잔머리인 것입니다. 전국에서 사업을 벌인 박정희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현재 돈으로 1조 6천억 원 정도의 자금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는 그 돈을 불법 정치자금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 놓고서 군부 보수 정권은 사회를 깨끗하게 만들겠다며 "사회명랑화 정책"이라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깡패나 부랑자를 잡아다가 국토발전 사업에 참여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보수 정권 특유의 국가 우선주의와 보수 정권의 방식을 지지하는 국민이 더 많은 시대가 만나서 벌인 황당한 정책입니다.


박정희 정부는 서산개척단 사건을 벌이면서 '민정식'이라는 사람에게 사업권을 맡기고, 전국 경찰에게 깡패와 부랑아 등을 잡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민정식은 자동차 조립 사업자이니 간척사업은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도 정권에 빌붙어서 이득을 취합니다.

 



서산 개척단 인권유린


공짜로 부려먹을 인력을 확보한다는 것은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깡패를 잡아다가 일을 시키더라도, 범죄를 짓기 전에 미리 잡아다가 처벌하는 것이니 불법입니다.


더 큰 문제는 보수적인 사회의 상명하복 특성입니다. 할당된 사람 수를 채우다가 모자라면 아무나 잡아다가 수를 맞췄기 때문입니다. 이때 잡혀간 사람 중에는 통금시간을 어겼다고 잡혀간 회사원도 있고, 길을 잃어버린 청소년도 있었습니다. 돈을 더 버는 직장에 넣어 준다며 속여서 데려간 노동자도 있었고, 수면제에 넘어가서 끌려온 상인도 있었습니다.

 

[서산위치: 충북 서산시 모월면] 서산개척단 사건이란 - 대한 청소년 개척단 사건, 전말과 진실 / ⓒ MBC


물론 그중에는 진짜 깡패도 있었고 사창가에서 몸을 팔다가 잡혀 온 윤락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산개척단 사건은 일명 "후리가리"라고 하는 마구잡이 사냥에 끌려 온 사람이 많았습니다. 한 기사에 의하면, 당시 최대 1700명까지 불어난 사람 중에서 열다섯 살 이하의 아이들이 무려 25%나 됐다고 합니다.


후리가리란 뜻은 "경찰의 단속"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유괴와 납치, 불법 검거 등으로 채워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한청소년개척단 사업은 무식 그 자체의 사업이었습니다. 지금에 하더라도 바닷가 뻘을 매꿔서 농사 지을 땅을 만든다는 것은 큰 공사에 해당합니다. 후진국이라 장비도 없었을 텐데 그나마 받은 원조금은 보수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자금으로 쓰였으니, 노동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업이었습니다.


억울하게 끌려간 사람들은 하루 종일 돌을 나르고 땅을 고르는 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총까지 든 경비들이 순찰을 돌았기 때문에 탈출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대한 청소년 개척단의 전말


피해자들은 일을 잘 못 하면 "구호반"이라는 규율 담당자들에게 죽도록 맞았다고 합니다. 어떤 증언에 의하면 일하면서 채찍도 맞았다고 하는데, 영화에나 나오는 노예제도가 20세기 한국에 있었던 셈입니다.


피해자들은 정말로 노예처럼 살았습니다. 한 증언에 의하면 국이라고 나오는 것이 맹물에 소금만 넣은 소금국이었고, 심지어 소 사료로 먹이는 싸구려 재료로 만든 것도 먹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박정희 시대가 좋았다는 사람이 있는데, 자신이 이런 꼴을 당했어도 좋은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옵니다.

 

[서산개척단 영화 장면] 서산개척단 사건이란 - 대한 청소년 개척단 사건, 전말과 진실 / ⓒ 영화 서산개척단


가족이 수소문해서 찾아오면 그런 사람 없다고 돌려보내길 무려 5년, 이 무자비한 대한청소년개척단 사업은 수많은 사망자를 내며 계속되었습니다. 그중에는 사고로 죽은 사람도 있었지만 맞아 죽거나 원인도 모른 채 사망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정부는 서산개척단 사업이 잘되고 있다며 홍보영상까지 만들어서 국민을 속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합동결혼식입니다. 125쌍의 깡패와 창녀가 결혼한 것으로도 유명했던 이 결혼식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남자들을 줄 세워 놓고는 여자들에게 아무한테나 가서 서라고 시키고 올린 결혼식이었습니다.

 


1960년대 초에 시작된 서산개척단이란 사업은 현장 사업이 끝나는 1966년 해체되었습니다. 일하던 장소는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의 간척지입니다. 대한청소년개척단 사건은 5년이나 더 진행되었습니다.


보통은 사업이 끝났으니 서산개척단 사건의 전말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마저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연이어 보수정권이 계속되자 정부에 호소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할 수 없이 택한 것은 언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언론들도 정부가 무서워서 다뤄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수기까지 다 써서 가지고 가도 기사를 낼 수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서산 개척단 사건의 진실


당시 피해자들은 인권침해, 가혹 행위, 강제 노역, 납치, 강제 결혼, 성폭행까지 있었다고 호소했지만, 대한청소년개척단 단장은 오히려 인권선언기념일에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이 지역에서 비인간적인 강제노역을 하다가 죽은 119명의 유골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은 죽어서도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마치 쓰레기처럼 암매장되어 있다가 발견되었습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 피해자들은 서산희망공원에 재안장되고 지금은 '무연총'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대한청소년개척단 합동결혼식] 서산개척단 사건이란 - 대한 청소년 개척단 사건, 전말과 진실 / ⓒ 영화 서산개척단


그동안 서산개척단 측에서는 사업이 끝나면 개간된 땅을 주겠다고 피해자들을 꼬시며 일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끝난 후 실제로 그 땅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애초에 그 땅은 국유지였고 이를 알면서도 미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일부분은 분배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개척지의 땅을 분배하는 관련법이 1982년 폐지되면서 그것마저도 불가능해졌습니다. 이후 피해자들은 땅을 가질 수 있게 해 달라고 소송을 했지만, 결국 상고심까지 가서도 패소하므로서 모두 허사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국유지 무단 점유로 변상금까지 내라는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1954년 정해진 미국의 공법 480조, "저개발국 국토개발 지원 원조 식량 사업"으로 시작되고 1961년 박정희 정권의 인권유린이 있은 후, 1982년 자활지도사업 임시조치 법률 폐지로 이어진 서산개척단 사건은 그대로 묻혔습니다. 그 후, 20년 상환으로 땅을 사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 전부라는데...


확인된 피해자 중 아직도 서산시 모월리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이제 11명 정도가 남았습니다. 완전히 망가진 인생, 엄청난 후유증 속에 대부분 죽고 지금 남은 피해자는 벌써 70~80대가 되었습니다. 잊혀서는 안 될 역사가 잊혀가고 있습니다.

 

 


[서산개척단 사건이란 - 대한 청소년 개척단 사건, 전말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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