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손 웰즈
[오슨 웰스 - 시민케인, 우주전쟁. 영화 천재 오손 웰즈의 삶]
라디오 '우주전쟁'과 영화 '시민케인'의 '오손 웰즈(오슨 웰스)'는 예술계의 천재로 불립니다. 천재들 중에 재미에 민감한 천재들은 장난꾸러기가 많은데, 남의 생각 못한 기발한 장난에서도 재미를 느끼니 남들은 괴팍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오손 웰즈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문득문득 기발한 생각에 남들이 신기해하는 사람이라면 천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자신을 재능을 그냥 썩히고 있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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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손 웰즈의 우주전쟁과 시민케인
오슨 웰스 - 시민케인, 우주전쟁. 영화 천재 오손 웰즈의 삶 / ⓒ New York Times
먼저, Orson Welles(오손 웰즈. 오슨 웰스라고도 알려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봅니다.
그는 스물세 살이었던 1938년, CBS 라디오의 단막극으로 '허버트 조지 웰스'원작의 '우주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갑자기 라디오 방송 중에 커다란 폭발음이 들리고 긴급 속보라며 화성인이 침공했다는 뉴스가 나갔습니다.
라디오를 듣던 사람들은 놀라서 짐을 싸고 피난을 가려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맞서 싸우겠다고 총을 들고나오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진짜 뉴스 속보인 줄 알고 패닉에 빠져서 대혼란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후, 라디오 드라마였다는 사실을 안 사람들은 항의 전화를 하고 소송을 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손 웰즈가 교묘하게 타이밍을 맞춰서 기획한 것이었습니다.
드라마 방송 중에 이미 이것은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라고 안내가 나갔는데, 그 시간에는 다른 방송에서 인기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랐던 것입니다. 다른 방송이 끝나고 라디오 채널을 돌리다가 들은 사람들이 난리를 친 것일 뿐...
결국 모든 소송에서 오슨 웰스가 승소했고, 그 방송과 그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이슈가 되어 유명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오슨 웰스 - 시민케인, 우주전쟁. 영화 천재 오손 웰즈의 삶 / ⓒ Citizen Kane
그리고 1941년, 그는 세기의 명작인 '시민케인'을 만들었습니다.
영화 시민케인의 줄거리는 당시 큰 신문사를 운영하던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해서, 온갖 불륜과 정치 부패 등을 시도하다가 비참하게 죽는 내용으로 된 영화입니다. 실제 모티브였던 '윌리엄 허스트'는 이 영화에 화가 나서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갖은 방해를 했고, 결국 개봉을 못 하는 극장이 생기면서 흥행에는 참패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9개 부분에 후보가 되었고, 미국 영화 연구소에서 선정한 100대 영화 중 1위에 선정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당시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딥 포커스' 기법과 '역광'조명, '롱테이크'촬영 등으로 현재 다른 영화들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영화 시민케인의 결말은 물론 각색된 것이지만, 오슨 웰스가 첫 번째 만든 영화만으로도 이렇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오손 웰즈는 시민케인에서 감독, 각본,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연 배우로도 연기해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후 그는 역사적 남자배우 중 16위에 선정되기도 합니다.
겨우 25세의 나이에 괴물처럼 망가져 가는 70대 노인까지의 연기를 했습니다. 오슨 웰스의 시민케인는 제작뿐 아니라 줄거리도 혁신적이었습니다. 관객에게 추리를 하도록 하는 구성, 마지막에 심오한 질문을 남기는 결말 등... 당시 영화들이 시도는 했지만 완성하지 못했던 모든 기법이 이 영화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오슨 웰스 - 시민케인, 우주전쟁. 천재 오손 웰즈의 삶 / ⓒ bl.uk
오손 웰스란 사람
오슨 웰스 - 시민케인, 우주전쟁. 영화 천재 오손 웰즈의 삶 / ⓒ Janus Films
20세기에 살았던 오슨 웰즈는 미국의 영화감독이자 배우, 각본가입니다. 그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라디오 우주전쟁', '시민케인', '제3의 사나이', '위대한 앰버슨가', '악의 손길' 등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출연을 했는데, '워터루', '007 카지노 로얄', '다윗과 골리앗', '이방인', 일본의 드라마 내레이션 등의 출연작도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특했습니다. 못된 학생들의 괴롭힘을 받으면 시뻘건 페인트로 피범벅이 된 것처럼 나타나서 놀라게도 하고, 학교에서는 괴상한 마술을 했으며, 마치 실제 같은 분장으로 괴물소동이 벌어지게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괴상한 발명가였고, 할머니는 오컬트에 빠져서 이상한 마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나마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피아노를 치기도 했지만, 학교에서는 이상한 아이로 악명이 높았으며, 그가 아홉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일찍 죽자 남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16세에 유럽으로 건너간 오손 웰스는 스물한 살이라고 속이고 극장에 취업했습니다. 단장에게 미국에 있을 때는 유명 스타였다고 거짓말을 했으나, 단장은 그의 재능이 워낙 특출나서 알면서도 고용했다고 합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오슨 웰스 - 시민케인, 우주전쟁. 영화 천재 오손 웰즈의 삶 / ⓒ ashadedviewonfashion.com
다시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겨우 스물한 살에 미국 정부의 뉴딜 정책의 하나인 "연방극장계획"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1937년에는 역사적인 연극도 합니다. 연극 '흔들리는 요람'은 예산도 받지 못하고 배우 조합의 방해까지 있었지만, 뮤지컬을 피아노 한 대로 공연했던 작품입니다.
오슨 웰즈는 극장 공연이 무산되자 다른 극장으로 관객을 이동시켜 시작했으며, 무대 공연도 못 하게 하자 배우들이 갑자기 객석에서 노래와 연기를 시작하는 획기적인 발상으로 성공했습니다.
연극, 영화계의 천재인 오손 웰스는 어떻게 보면 참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인성이 안 좋아서 사람들의 도움을 얻지 못했고, B급 영화 등에 출연하며 돈을 모아서 그 돈으로 영화를 만들곤 했기 때문에 항상 예산 문제에 허덕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다른 예술을 했더라도 모든 분야에서 성공할 천재였다고 평가합니다. 만약 그가 B급 영화에서 돈 번다고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 훌륭한 그의 작품을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오슨 웰스 - 시민케인, 우주전쟁. 영화 천재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