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 - 영화 미망인의 감독]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 감독은 이후 흥은원, 이미례 감독 등 여성 감독의 첫걸음을 시작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단 한 명의 여성 감독이 없던 1950년대에 영화 <미망인>을 만들었으나 그 후 잊혔던 인물입니다. 촬영 현장에 아기를 업고 연출을 했으며 직접 밥을 해 먹이기도 했다는 일화를 남긴 영화 미망인의 박남옥 감독에 대한 기록을 정리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여자라고 차별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꿈을 키웠던 영화계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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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순서]
1. 투포환 선수의 영화
2. 아기를 업고 찍은 영화 미망인
3. 박남옥 감독을 다시 보다
1. 투포환 선수의 영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감독인 '박남옥' 감독은 경북 하양에서 태어났습니다. 무려 십 남매 중에서 셋째 딸이었는데, 대장간과 잡화 도매상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은 여유 있는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영화 포스터를 모았다고 하니,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경북여학교에 진학하면서 뜬금없이 투포환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미술도 좋아해서 유학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영화 미망인은 주연배우 이민자가 전쟁 과부로 나온다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 감독 영화 미망인] / ⓒ 영화 미망인)
하지만 경북여학교의 규정이 보수적이라 유학을 하지 못하고 '이화여전' 가정과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야 했습니다. 이때 기숙사 점검 중 영화 사진을 떼라고 혼나면서 가정과 공부에 회의를 느꼈다고 합니다. 결국 짐을 싸들고 나가서 동양화가 '이유태' 화백의 아래에서 1년 간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악랄한 일제의 강제징용이 있자 이유태는 화실을 닫고 피했으므로 이것도 그만둬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친구의 남편의 소개로 '광희동 촬영소'에 들어갔다가 고향에 내려가서 '대구일일신문'에서 영화평을 썼습니다. 광복이 되자 다시 서울로 가서 광희동 영화사에서 일을 배워가며 진짜 영화계 일을 시작했지만, 역시 여성 차별의 벽이 있었습니다. 지방 촬영을 갈 때 스크립터로 일하는 박남옥은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여성이 핵심적인 인원이 아니었던 데에도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2. 아기를 업고 찍은 영화 미망인
6.25 전쟁이 터지자 박남옥 감독은 '국방부 촬영대'에서 전쟁 뉴스를 담당했습니다. 이때도 여자는 트럭에 태울 수 없다는 군의 강경입장 때문에 사정을 해서 군복을 입고 탔다고 합니다. 그 후 극작가인 이보라와 결혼을 하고 첫딸도 낳았습니다. 당시엔 흔하지 않은 "일하는 여성"이었지만 친정집이 대구였기에 딸을 직접 키우며 일을 해야 했습니다. 아기를 입고 영화 촬영장에서 일했다는 박남옥의 일화는 여기서 생긴 말입니다.
(1950년대의 미망인 촬영 현장 모습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 감독 영화 미망인] / ⓒ 한국영상자료원)
1954년에 박남옥은 영화 <미망인>을 찍기로 결심합니다. 전쟁 과부에 대한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는데, 후대의 평가에 의하면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의 여성들의 갈등과 성적 입장을 남다르게 해석했다는 평을 받습니다. 언니가 거금 380만 원을 지원해서 시작한 영화... 그녀는 일단 서울로 올라가서 200평의 공터에 세트장이면서도 살집인 판잣집을 짓고 일을 벌였습니다. 그녀가 평생 꿈꾸던 영화였기에 설레었을 것입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아기를 업고 영화 촬영을 하는 것만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스텝들의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박남옥은 직접 시장에서 장을 봐와서 밥을 해 먹였다고 합니다. 종종 짜장면도 시켜 먹었다고는 하지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영화 촬영기를 들고 아기까지 업고서 기차에 탔다가 승객들의 눈치를 봤던 기억은 눈물을 쏟을 정도로 상처를 주었다고 합니다. 한 여름의 촬영과 편집은 정말 고생스러웠습니다.
3. 박남옥 감독을 다시 보다
이제 녹음만 하면 되는 단계가 왔습니다. 1955년 1월, 녹음실을 찾아갔다가 퇴짜를 맞은 일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정초에 여자가 첫 손님이라 재수가 없다는 이유였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정말 그랬습니다. 겨우 겨우 사정해서 녹음을 하고, 드디어 1955 영화 미망인이 개봉을 했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너무 나빠졌고, 아기를 돌보고 돈을 마련하고 촬영과 스텝까지 돌보느라 더 이상의 여력이 없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단 한 편의 영화만을 남긴 박남옥 감독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 감독 영화 미망인] / ⓒ 한국영상자료원)
극장 섭외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홍보기획도 신경 쓰지 못해서 '중앙극장'에 걸린 지 4일 만에 영화를 내려야 했습니다. 그 긴 세월의 꿈과 불태웠던 촬영 기간은 아주 짧은 시간 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평가는 좋았지만 당시 시각을 너무 앞서갔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 후 지방에 배급권을 팔기도 했지만 사기까지 당하자, 영화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남옥은 흥행 실패 후 이혼의 아픔까지 겪게 되었다고 합니다.
언니가 하던 '동아출판사'에서 일을 하며 1959년 영화 잡지 <시네마 팬>을 창간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은 영화를 못 해보고 살다가 201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1997년 제1회 여성영화제에서 영화 미망인의 원판을 찾아 상영을 하는 일을 개기로 박남옥 감독을 다시 보는 길이 열렸습니다. 투포환 선수에서 아기를 업고 영화감독을 했던 여성 감독 박남옥은 1962년 영화 <여판사>의 흥은원 감독, 1984년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의 이미례 감독으로 이어지는 첫걸음을 걸었던 것입니다.
(영화 미망인의 한 장면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 감독 영화 미망인] / ⓒ 박남옥)
[최초의 여성 감독 박남옥 - 영화 미망인의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