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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지식 칼럼/사람&일화

노르웨이 라면 미스터 리 - 노르웨이 슈퍼마켓의 이철호

2019. 3. 16.

[노르웨이 라면 미스터 리 - 노르웨이 슈퍼마켓의 이철호] 


우리는 '스템플러'를 호치키스라고 잘못 부르고, '트렌치코트'를 바바리라고 잘못 부르기도 합니다. 상품에 쓰인 회사 이름을 제품 명칭으로 잘못 알기 때문입니다. 멀리 유럽의 노르웨이에서는 라면을 '미스터 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노르웨이 슈퍼마켓을 점령하고 라면의 대명사가 된 Mr.Lee의 이철호 씨에 대한 일화도 유명합니다. 노력으로 대박을 터트린 그의 성공담을 적어 봅니다. 






노르웨이 슈퍼마켓을 점령한 라면 


노르웨이 슈퍼마켓을 점령한 '미스터 리'는 라면 브랜드 이름입니다. 더불어서 <Mr.Lee>로 대박을 터트린 '이철호'는 한국을 유럽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상을 탔을 때 노르웨이 사람들은 라면 미스터 리의 나라에서 대통령이 수상한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는 책으로도 나와 있습니다. 그 외의 책들은 출판 정지 요청을 한 비허가 도서라고 합니다. 


사진: 노르웨이 이철호는 미스터리 라면으로 유명하다(노르웨이 이철호는 미스터리 라면으로 유명하다 [노르웨이 라면 미스터 리 이철호] / ⓒ newsinenglish.no)


노르웨이 라면 미스터 리(Mr.Lee)의 이철호는 50대에 대박을 터트릴 때까지 험난한 고생을 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1937년 생인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습니다.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기에 미군부대에서 잡일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폭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고 참전 노르웨이 시설에 수용되었는데, 한국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여 멀리 노르웨이로 보내졌습니다. 치료 후 노르웨이 생활도 처참했습니다. 당시 노르웨이는 유럽 국가 중에서 못 사는 나라에 속했기 때문에 복지 혜택도 못 받는 난민에 불과했습니다. 1950년대는 수세식 화장실이라도 배관 아래의 대변을 다시 퍼내야 했으므로, 그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사진: 슈퍼마켓에서 팔리는 미스터리라면의 변경된 디자인(슈퍼마켓에서 팔리는 미스터리라면의 변경된 디자인 [노르웨이 이철호 슈퍼마켓 라면 미스터리] / ⓒ ocf.berkeley.edu)


자서전에서는 먹을 것이 부족하여 조류 모이용으로 파는 빵을 먹고 살았다고 하며 항상 영양실조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노르웨이 라면 왕 미스터 리 이철호의 어린 시절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요리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음식 찌꺼기라도 먹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성실함과 아이디어를 짜내는 노력 덕에 그는 빠르게 요리사가 되었습니다. 직업학교에 들어가 자격증을 딴 뒤, 레스토랑을 열어서 돈을 좀 모으기도 했습니다. 




노르웨이 미스터 리 - 이철호 


노르웨이 정착에 익숙해질 때 즈음, 수입업 등에서 손해를 보기도 하면서 고난은 계속되었습니다. 노르웨이 슈퍼마켓을 점령한 미스터리로 대박을 칠 이철호의 인생은 50대가 되어서야 바뀌게 됩니다. 1971년 스웨덴 정부의 한국 출장 요청을 계기로 한국에서 라면 맛을 보고는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1960년대부터 일본 라면 기술을 배워와서 제품을 생산 중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철호는 노르웨이형 Mr.Lee 라면을 만들기 위해 3년이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사진: 직접 광고에 출연하여 한국말로 광고를 했던 이철호(직접 광고에 출연하여 한국말로 광고를 했던 이철호 [노르웨이 라면 미스터 리 이철호] / ⓒ wisdomswebzine.com)


이철호는 라면 식품 회사의 연구소에서 노르웨이형 라면 수프 맛을 내기 위해서 같이 연구했다고 합니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개발되었기 때문에 너무 매웠던 것입니다. 매운맛을 줄이고 기름기를 늘려서 서양인들이 좋아할 만한 라면 미스터 리(Mr.Lee)가 마침내 탄생하였습니다. 다행히 노르웨이의 식품회사가 제품성을 인정하고 주문을 하면서 활기를 맞았고, 이것이 노르웨이 슈퍼마켓을 점령할 정도의 미스터 리 라면이 됩니다. 




그의 마케팅 방법은 확실했습니다. 대부분의 수익을 마케팅에 사용하며 한국 음식임을 알린 것입니다. 노르웨이인들은 생소한 한글과 한국어 광고를 보면서 점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노르웨이 라면 미스터 리가 슈퍼마켓을 점령했다는 얘기는 노르웨이 라면시장의 92% 점유율이 보여 줍니다. 52세가 될 때까지 40년 가까이 고생과 노력을 하며 일궈낸 결과입니다. 이후 노르웨이 라면은 이철호의 미스터 리 제품이 20년 간 장기 독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실제 노르웨이 가정의 미스터리 컵라면 모습(실제 노르웨이 가정의 미스터리 컵라면 모습 [노르웨이 이철호 슈퍼마켓 라면 미스터리] / ⓒ Coeliac Teenager)


그러나 노르웨이 라면왕 이철호의 그 후는 다른 사업가들과 달랐습니다. 미스터 리(Mr.Lee) 브랜드를 다른 회사에 매각하고 자신은 개발에만 매달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노르웨이 슈퍼마켓을 점령한 미스터 리 라면에는 'Orkla 그룹'의 상표가 찍혀 있습니다. 한국인의 입맛에는 맞지 않아서 한국 상륙에는 실패했지만, 노르웨이에서 이철호는 유명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더구나 당시에 어렵던 신흥 공업국 한국을 유럽에 알리는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공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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