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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지식 칼럼/역사&사건

무타구치 렌야 - 일본 희대의 무능한 장군 (임팔전투)

2018. 11. 4.

[무타구치 렌야 - 일본 희대의 무능한 장군 (임팔전투)] 

20세기 초, 일본은 아시아와 태평양 침략으로 못된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모든 전투에서 승승장구한 것은 아닙니다. 일본이 피하려던 노구교 사건, 일본이 대패하게 되는 임팔 작전 등에서 일본 희대의 무능한 장군으로 패망까지 이끈 무타구치 렌야 같은 사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보기 드문 무능력한 일본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봅니다. 




일본 희대의 무능한 장군 무타구치 렌야 


19세기 말부터 일본은 서양 제국주의의 못된 버릇을 그대로 배워서 아시아를 침략하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가 세계사 역사에서 배웠을 근대의 전쟁들은 거의 일본이 끼어 있습니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1904년 '러일전쟁'을 했으며, 1910년 조선을 침략했으며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1942년 미드웨이 해전까지는 일본 스스로는 최강이라고 생각하던 때였습니다. 


1918년 일본의 러시아 시베리아 침공 때부터 독특한 군인이 활약을 시작했는데, 그가 바로 일본 희대의 무능한 장군이라는 '무타구치 렌야' 장군입니다. 당시의 일본은 완전히 군국주의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민주국가가 전쟁을 치르려면 국회의 승인과 국민의 동의를 얻어야 했지만, 당시의 일본은 군부가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무식한 정치가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은 미국을 공격한 태평양전쟁부터라는 시각이 많지만, 중국을 공격한 '중일전쟁' 때부터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만약 중일전쟁을 일개 연대장이 일으킨 사건이라고 본다면, 그 엄청난 인명 살상의 세계전쟁을 일으킨 사람은 무타구치 렌야 장군인 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일본의 무능한 장군이라고까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타구치 렌야가 사고 친 중일전쟁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이 있은 후 일본은 중국 북동쪽에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고 야욕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만주사변' 등으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베이핑'의 노구교 다리를 사이에 두고 중국 국민당군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37년 어느 날, 무능한 장군이 될 무타구치 렌야의 진영에서 말단 병사 하나가 보이지 않는 일이 생겼는데, 이것이 노구교 사건의 시작입니다. 


말단 병사 한 명이 보이지 않자 조사를 하기 위해 일본과 국민당군은 교섭을 하기로 했습니다. 일본 부대가 샅샅이 수색해도 병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날 밤에 그 병사는 이미 복귀해서 숙소에 있었습니다. 실종자가 숙소에 있으니 당연히 수색을 해 봐야 찾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확인을 안 하고 일본은 교섭을 하다가 나중에야 복귀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워낙 별 일이 아닌 것이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연대장 무타구치 렌야가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협상 중에 중국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는 트집이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벌인 전쟁은 국제법을 어긴 것이지만 일개 연대장은 거기까지 생각 못하고 무식하게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러자 음흉한 일본 군부는 잘 됐다는 심정으로 그를 밀어주기로 했습니다. 이후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계속 확대되어 갔고, 중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오해로 시작해 놓고는 생떼를 쓰며 벌인 노구교 사건은 징계감이었으나, 워낙 군국주의로 변한 일본이었기에 그를 승진시켜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사실은 무타구치 렌야가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어서 벌인 일이었습니다. 



무능한 장군 무타구치 렌야의 무식함 


일본의 무능한 장군 무타구치 렌야 장군의 최대 무능력은 '버마'에서 있었던 '임팔 전투'였습니다. 1944년 임팔 전투는 무더위와 장마, 더구나 정글과 산맥으로 인해 보급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투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수비하는 군대뿐 아니라 공격하는 군대마저도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전투입니다. 


그런데도 일본 최고의 무능한 장군 무타구치 렌야는 3주 정도밖에 안 되는 식량을 가진 부대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들은 그 식량으로 4개월을 견디면서 공격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타구치 렌야 장군은 무기나 식량이 없다는 변명을 하지 말고 정신력으로 싸우라는 훈시만 보낼 뿐이었습니다. 


일본 군사령부는 임팔 전투를 기습작전으로 성공시키자고 작전을 짜 놓고는 걸어서 원시 정글을 통과하게 했습니다. 이 계획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참모들도 알고 있었지만 무능한 일본 장군 무타구치 렌야 장군은 승리는 정신력에서 나오는 것이라면서 추가 작전계획 회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버마에서 일본군을 맞서야 하는 영국군은 병사들이 많이 죽을까 봐 최대한 전쟁을 피하려고 했었습니다. 


흔히 일본 희대의 무능한 장군이라며 무타구치 렌야 장군을 표현하지만, 그보다는 화를 잘 내고 부하들을 혹사시키며 무리한 공격을 시키는 장군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이를 잘 아는 영국군은 일부러 도망가면서 일본군을 '임팔'까지 끌어들였습니다. 일본군의 작전은 헝그리 정신으로 이기라는 것이었고, 영국군의 작전은 병사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최대한 병사를 모아 놓은 후 싸운다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상명하복의 구시대적 구조 


병사들이 굶어 죽어가며 너무 힘들어하면 최대한 보급을 지원해야 하는 것이 지휘관이지만, 무타구치 렌야 장군은 "일본인은 원래 초식을 하기 때문에 정글에서도 식량이 부족할 일이 없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결국 무식하고 무능한 무타구치 렌야 장군의 고집 때문에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3만 명이 개죽음을 당하고 2만 5천 명이 부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이 전투는 부하 사단장인 '사토' 중장이 항명을 하고 후퇴를 하면서 그나마 병사들을 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타구치는 그를 정신병자라고 보고했고, 본국으로 소환당해서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엄청난 일이 무타구치의 작품이다 보니 사람들은 일본의 무능한 장군 마 타구치 렌야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일본의 문제는 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무능한 장군인 무타구치 렌야 장군은 그 뒤에도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일본 군부는 이런 실패를 인정하면 사령부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봤기 때문에 무식한 패배를 비밀로 하고 책임도 묻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에게 계속 중요한 작전을 맡겼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일본 희대의 무능한 장군인 무타구치 렌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후에도 고위 관직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었습니다. 일본이 한국에게 전달한 습성 중에 '상명하복', '복지부동'과 극우보수 고집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우리에게도 문제인지는 무타구치 렌야의 임팔 전투 과정을 보면 여실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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