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디 머큐리 - 사망원인, 에이즈, 양성애자, 게이, 그리고 삶]
이 글은 프레디 머큐리가 게이거나 양성애자거나 에이즈에 걸린 것을 좋게 말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프레디 머큐리의 사망원인은 에이즈가 맞지만, 이런 일화들을 통해서 그가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글입니다. 그러므로 중립적인 관찰 시점에서 프레디 머큐리가 양성애자로서 어떤 사람들을 사귀었는지의 내용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이 블로그는 "심심할 때 잡지처럼 읽는 지식"이라는 목적으로 운영됩니다. 즐겨찾기(북마크) 해 놓으면 심심할 때 좋습니다.
[엮인 글]
프레디 머큐리 - 양성애자 생활
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의 성격을 먼저 정의하자면, 내성적이면서도 관심을 받길 원하기 때문에 튀는 행동을 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양성애자로 알려졌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1946년 '탄자니아' 자치령인 아프리카의 '잔지바르'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상은 아랍계이며 인도로 넘어와 살다가, 아버지가 잔지바르에서 공무원을 하며 이사했었습니다. 부모는 독실한 '조로아스터교'였습니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많은 시간을 인도 유학에서 보냈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고 외로움을 잘 탔습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양성애자가 된 것은 이런 영향이 컸습니다. 여자든 남자든 관심을 주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성적이었으므로 가끔 신경질적이기도 했고 여성스러운 면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때는 프레디 머큐리도 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는 아기와 고양이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잔지바르에서 외국인들이 추방되며 그의 가족은 영국으로 가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며 그룹 '스마일'에 들어갔는데, 이 그룹이 나중에 퀸으로 유명해질 그룹입니다.
그의 성격은 밝았지만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혈통과 사생활 등을 절대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내성적이고 외로움에 약한 그는 자신을 숨기는 대신 더 많은 사람을 사귀고 싶어 했습니다.
아르바이트로 옷가게를 하면서 남자들에게도 "달링"이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게이 기질을 보인 것은 성인이 되고 나서입니다. 프레디 머큐리의 사망원인인 에이즈도 아직 없던 때입니다.
하지만 당시엔 '메리 오스틴'이란 모델 지망생과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프레디 머큐리의 게이 기질은 별로 주목받지 않았습니다. 메리 오스틴은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에 걸려 죽을 때까지 그와 함께 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양성애자임을 깨닫고 그녀에게 고백했을 때,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친구로 남아 주었습니다. 그는 헤어진 뒤에도 메리에게 퀸의 돈 관리를 맡길 정도로 의지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게이였지만 공식성상에는 메리와 부부로서 다녔습니다.
메리 오스틴은 그에게 있어서 연인이기보다는 마치 누나같이 모든 것을 챙겨 주는 존재였습니다. 그의 성격 자체가 매우 신사적이었고 메리도 포용력이 많은 여자였으므로 만일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면 아주 점잖은 부부가 될 뻔했습니다.
하지만 장난을 좋아하고 자극에 민감했기 때문에 술과 노는 것을 좋아했고, 20대 중반의 프레디 머큐리는 양성애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외로움 때문에 한 사람만의 관심으로는 부족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프레디 머큐리 - 게이 생활
그 후 프레디는 게이바를 드나들며 여러 남자를 사귀었습니다. 뉴욕에서 살면서도 여러 남자를 사귀었습니다. 이때 남자들과 어울린 것은 단지 프레디 머큐리가 양성애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쾌락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에이즈에 걸렸습니다.
사실 그룹 퀸의 이름을 지을 때 멤버들은 긍정적이지 않았습니다. 퀸이란 이름에는 동성애자라는 의미도 은유적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프레디의 고집 때문에 결국 퀸으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게이처럼 여자 옷과 화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퀸이 대성공을 거둔 이후 그는 독일의 '뮌헨'에 머물렀습니다. 여기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위니'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마초 스타일의 예의 없는 남자였습니다. 그는 프레디를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위니도 프레디 머큐리처럼 동성애자였습니다. 위니는 프레디가 대스타이든 말든 함부로 대했고 둘은 자주 다투었습니다. 외로움 때문에 남에게 관심받고 싶어 하던 프레디는 그런 부분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짐 허튼'이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는 이발사였고 프레디 머큐리와 게이 관계였습니다. 프레디가 부르면 뮌헨까지 비행기로 날아왔는데, 이때까지는 위니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프레디가 이용해 먹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중간에 프레디는 '바바라'라는 여자를 사귀었습니다. 그녀는 호탕한 기질의 여자이고 남의 고민을 잘 들어주는 여자였습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양성애자임을 고백했고 바바라는 상관하지 않고 그와 사귀었습니다. 둘은 마치 수다를 떨듯 숨김없이 고민을 털어놓는 사이였습니다.
바바라에 의하면 그는 매우 섬세하고 정에 약했다고 합니다. 받지 못할 줄 알면서도 친구에게 돈을 빌려 줄 정도로 인정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이 허락 없이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대면 대단히 화를 내기도 했는데, 미리 말을 했다면 다 받아주는 스타일이었답니다.
그런데 1980년대가 되자 프레디 머큐리의 사망원인인 에이즈가 전 세계적으로 퍼졌습니다. 뉴욕에서 사귀던 남자들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얘기를 들은 프레디 머큐리는 에이즈 검사를 받고 양성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가 손을 베었을 때 바바라가 도와주려고 하자 그는 큰 소리로 만지지 말라고 화를 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때 이미 프레디 머큐리는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비밀로 했기 때문에 프레비 머큐리의 사망원인인 에이즈는 소문만 돌았습니다.
친구에게 말하길, 프레디 머큐리는 양성애자로 태어난 건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즉 원래는 이성애자였는데 놀고 즐기는 것 때문에 남자도 사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동성애도 그만둘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바바라를 사귀면서 남자를 사귀던 프레디 머큐리는 뮌헨의 게이 생활을 접고 갑자기 런던으로 떠나버렸습니다. 당시 가십 잡지에 그의 사생활이 주기적으로 떴었는데, 그는 바바라가 떠벌리고 다녔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프레디 머큐리 - 에이즈
그는 런던으로 가서는 짐 허튼과 살았습니다. 짐 허튼은 순종적이고 뒷바라지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양성애자였지만 짐 허튼을 남편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바바라의 말에 의하면 그 둘은 정말로 사랑했다고 합니다.
짐 허튼을 부른 프레디 머큐리는 에이즈에 걸렸음을 고백하며 떠나고 싶다면 떠나도 좋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짐 허튼은 상관없다며 그의 곁에 남기로 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사망원인인 에이즈로 점점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짐 허튼은 프레디 머큐리에게 매우 헌신적이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에이즈가 심해지며 점점 더 신경질적이 되어갔지만 다 받아주었다고 합니다. 프레디는 메리 오스틴과도 계속 만났는데, 메리는 질투를 느끼고 짐과 자주 싸웠다고 합니다.
이때까지도 프레디 머큐리는 사망원인인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언론에게 숨겼습니다. 주변의 누군가가 이것을 퍼트리는 바람에 많이 힘들어했지만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체력이 다해서 더 이상은 투어 공연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40대의 그는 초췌한 모습으로 앨범 제작에만 몰두하며 살았습니다. 퀸의 멤버들도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다며 거짓말을 하며 지냈습니다. 공연 때가 아니면 개인적인 만남도 없었던 그들은 한편으로는 사무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렇게 몇 년간의 투병생활을 하던 중 1991년엔 프레디 머큐리의 사망원인인 에이즈로 인해 폐렴 등의 합병증이 심해졌습니다. 더 이상 치료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진통제 외의 치료제를 중지시켰습니다. 그렇게 프레디 머큐리는 사망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죽기 하루 전날, 비서를 통해서 프레디 머큐리는 에이즈에 걸렸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날 각종 언론들은 프레디 머큐리의 에이즈에 대해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모든 기사는 프레디 머큐리의 사망기사로 바뀌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 - 사망원인
공식적으로 프레디 머큐리의 사망원인은 폐렴입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에 걸린 뒤 그는 매우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나날을 살았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딱히 치료제도 없었으니 거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짐 허튼은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했습니다.
유언을 통해 프레디 머큐리는 게이 남편이었던 짐 허튼에게도 유산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전 재산의 반 이상은 메리 오스틴에게 주었습니다. 생전에 그는 어떤 사랑도 메리 오스틴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양성애자로 살았지만, 마음속의 사랑은 그녀 하나였었던 것 같습니다.
프레디 머큐리의 사망원인이 에이즈였기 때문인지, 죽어도 곁에 남겠다던 짐 허튼도 에이즈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바바라는 프레디 머큐리의 이름을 팔아서 유명해지는 것이 싫다며 조용히 살았습니다. 메리 오스틴은 프레디 머큐리가 사망한 후 이혼을 하고 독신이 되기로 했습니다.
독실한 조로아스터교도였던 프레디의 부모는 새에게 시체를 주는 '조장'을 원했지만, 영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화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유언에 의해 사후처리는 정신적 사랑이었던 메리 오스틴이 맡았습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사망원인인 에이즈로 인해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내성적인 외로움을 벗어나려고 오히려 튀는 삶을 살았던 것이었습니다. 주변인의 증언에 의하면 인간적인 프레디는 신사적인 매너를 가졌고 돈에 구애받지 않고 베푸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로 고통받다가 죽은 후 사람들의 시선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의 인생을 정리하자면, 갈등과 방황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외로움의 해결방법을 찾지 못했던 프레디 머큐리는 멀고 험난한 길을 돌아서 살다 간 사람인 것입니다.
[엮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