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 왕자 -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 조선 왕족 이우]
얼마 전에 얼짱 왕자라고 화제가 됐던 왕족이 있었습니다. 조선 고종 황제의 손자였던 이우 왕자입니다. 그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위패를 모신다는 뜬금없는 기사가 나오면서 친일파라는 비판도 받았던 사람입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희생자이기도 한 이우 공의 알려지지 않은 진실들을 알아봅니다.
얼짱 황손 이우 공
19세기 말, 조선은 보수적인 정치인들 때문에 시대를 쫓아가지 못하고 기울어 갔습니다. 이때 왕위에 오른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만회를 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여 1907년 고종을 폐위시킨 후 '순종'이 두 번째 황제가 됩니다. 순종에게는 이복형제인 '의친왕'이 있었는데, '이우' 왕자는 이 의친왕의 아들입니다.
(잘 생긴 왕자로 유명했던 이우 공 [조선 황손 얼짱 이우 왕자] / ⓒ insight.co.kr)
잘 생긴 외모 때문에 화제가 되기도 했던 이우 왕자는 일제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는 일본 왕족의 서열인 '공' 지위를 받았으며 일본군에서 장교가 되었고 친일파의 딸과 결혼을 했습니다. 군인이었던 그는 히로시마 원폭으로 최후를 맞았고, 사망 후에는 일본 전범이 묻힌 '야스쿠니 신사'에 위패가 모셔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친일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한때 그는 친일파라는 소리를 들었어다. [조선 황손 얼짱 이우 왕자] / ⓒ 인사이트)
하지만 이우 왕자가 친일파라는 것은 겉표면에 드러난 것일 뿐입니다. 이우는 13남 9녀를 둔 의친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의친왕은 조선을 되살리려고 노력했으며 기개가 넘쳤다고 합니다. 장남이 순순히 일제의 말을 잘 들었던 반면 이우는 의친왕의 성격을 닮아서 더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1살이 된 후 끌려가듯 강제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황손 이우. 일제시대였다. [조선 황손 얼짱 이우 왕자] / ⓒ 황실왕족월간)
18세가 됐을 때, 당시 일본은 극우 군국주의 시대였으므로 이우 왕자 역시 다른 일본 왕족들처럼 육군사관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한일병합이 되었으니 조선 왕족도 일본 왕족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 때문이지만, 실제로는 일본 왕족과 귀족의 중간쯤의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일본군 장교가 된 이우 왕자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지게 된 것은 이런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이우 왕자의 삶의 진실
소년 시절 가정교사의 증언에 의하면 이우 왕자는 어릴 때부터 조선의 독립이 옳다고 말해 왔었다고 합니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술에 취하면 조선 노래를 부르며 옛 조선을 그리워하니, 주의 대상으로 분류되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조선에 왔을 때는 권총으로 일본군 지방 지휘소를 협박하여 농민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우 공과 부인 박찬주 [조선 황손 얼짱 이우 왕자] / ⓒ 위키백과)
결혼할 나이에 이르자, 일본은 조선 왕족의 피를 말리기 위해서 일본 여자와 결혼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의친왕과 이우 왕자는 어떻게든 이것을 피하려고 꾀를 냈습니다. 비록 친일파지만 '박영효'의 딸과 결혼하기로 한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간섭을 하려고 했지만 친일파인 박영효가 설득하였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조신인의 피를 지키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이우는 가고 싶지 않은 일본 방어전에 억지로 갔다가 가족과 이별하게 된다. [조선 황손 얼짱 이우 왕자] / ⓒ orbi.kr)
1945년 이우 왕자는 중좌(중령)로 진급되며 일본으로 불러들여졌습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이 가까워 오면서 본토 방어 결전이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우는 일본에 가면 살아오지 못할 것을 직감했습니다. 전역 신청도 하고 시간도 끌어봤으나 강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가겠다고 할 정도로 그의 심정은 절박했었다고 합니다.
(이우와 그 아들. 얼마 후 그는 원자폭탄에 죽게 된다. [조선 황손 얼짱 이우 왕자] / ⓒ Unknown)
그해 8월, 미국은 일본인을 대량 살상하여 항복을 강요하려고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떨어트렸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우 왕자의 부임 부대가 히로시마였습니다. 그날 아침, 말을 타고 출근하던 이우 왕자는 폭발지로부터 700m 지점에서 원자폭탄에 피복되었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을 상태에서 구조되었으나 약 하루 후 고열로 신음하다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우 왕자와 야스쿠니 신사
나라 잃은 황손으로 울분 속에 살다가 억지로 보내진 곳에서 죽어야 했던 이우 왕자의 유해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장례식이 있던 날 일본 왕은 결국 패전을 인정했고,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한때 얼짱 황손 이우 왕자라고 유명해진 그의 일생은 겨우 서른세 살의 나이로 이렇게 끝나버렸던 것입니다.
(고종의 손자면서 의친왕의 둘째 아들, 대한제국 황손인 이우. [조선 황손 얼짱 이우 왕자] / ⓒ Unknown)
그런데 1959년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일본이 가족의 동의도 없이 야스쿠니 신사에 이우 왕자의 위패를 봉안한 것입니다. 사망 당시 일본인이었으니 일본 신사에 묻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욕을 먹는 이유는 이곳에 전범들을 함께 봉안했기 때문입니다. 죽어서도 전범들과 함께 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후의 당시 모습 [조선 황손 얼짱 이우 왕자] / ⓒ Unknown)
일본은 한일병합 당시 조선 왕족을 일본 왕족처럼 대하겠다고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야스쿠니 신사에 이우 왕자를 봉안할 때도 왕족 지위로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우의 가족과 동의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봉안하면서도 일반 병사로 취급하여 합사 해버렸습니다. 이우 왕자 외에도 야스쿠니 신사에는 한국인 2만 1천 명이 억지로 봉안되어 있다고 합니다.
(뒤늦게야, 그것도 한인들에 의해 세워진 히로시마 원폭 피해 조선인 위령비 [조선 황손 얼짱 이우 왕자] / ⓒ Sky Wing Sky)
일본은 3만 명이나 되는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1970년에는 한국인 피폭 징용자 명부를 슬그머니 폐기해 버렸습니다. 또한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2017년부터는 20년이 넘은 사건의 청구권은 소멸된다며 모조리 기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얼짱 황손 이우 왕자는 수만 명의 억울한 한국인 중 한 명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