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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의 메리 셸리 - 남편 퍼시 비시 셸리의 심장

2018. 10. 13.

[프랑켄슈타인의 메리 셸리 - 남편 퍼시 비시 셸리의 심장]

소설 프랑켄슈타인 작가 메리 셸리는 퍼시 비시 셸리가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메리 셸리가 남편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가 알려지면서 괴팍한 여자라는 이미지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소설과는 달리 심장을 보관한 이유는 애틋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프랑켄슈타인 작가 메리 셸리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메리 셸리'가 이름을 밝히지 않고 발표했던 소설입니다. 매우 큰 인기를 얻은 메리 셸리는 '죽어야 하는 불멸' 등을 썼고 1851년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놀라운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메리 셸리의 남편 '퍼시 비시 셸리'의 심장이었습니다. 퍼시는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낭만주의 시인이었습니다. 


사진: 1931년에 만든 영화 프랑켄슈타인. 이 이름은 박사의 이름이다.(1931년에 만든 영화 프랑켄슈타인. 이 이름은 박사의 이름이다. [프랑켄슈타인의 메리 셸리 - 남편 퍼시 비시 셸리의 심장] / ⓒ The Epoch Times)


메리 셸리는 남편의 심장을 비단주머니에 넣고 '아도네이스'라는 책 중 한 장으로 감싸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죽은 자의 시체를 짜깁기 하여 되살려낸 얘기다 보니 이 사연을 들은 사람들은 그녀를 괴팍하게 생각했지만, 거기에는 식지 않는 사랑의 뜻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사진: 영화 메리 셸리의 한 장면. 운명적인 만남을 그리는 장면이다.(영화 메리 셸리의 한 장면. 운명적인 만남을 그리는 장면이다.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남편 심장 (퍼시 비시 셸리)] / ⓒ ARTIFICIAL EYE)


메리 셸리와 남편 퍼시 비시 셸리의 결혼은 한 여자의 죽음을 딛고 한 것이며, 퍼시 비시 셸리는 겨우 5년 남짓한 결혼 생활 만에 익사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겪고 짧은 삶을 끝낸 남편의 죽음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가슴 아픈 사연이었을 것입니다. 메리 셸리가 간직한 남편의 심장은 괴기스러운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메리 셸리와 퍼시 비시 셸리의 만남


퍼시 비시 셸리는 영국 낭만주의의 3대 시인이었습니다. '바이런', '키츠'와 셸리는 같은 시대에 살았고, 서로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1792년에 태어난 셸리는 기존의 강압적인 규칙을 지켜야 하는 삶에 반대했습니다. 진보적인 성격으로 인해 개혁적이었고, 옥스퍼드 대학에서도 그런 면 때문에 충돌이 생겨서 퇴학을 당했습니다.


사진: 메리 셸리의 남편 퍼시 셸리. 낭만주의 시인이다.(메리 셸리의 남편 퍼시 셸리. 낭만주의 시인이다. [프랑켄슈타인의 메리 셸리 - 남편 퍼시 비시 셸리의 심장] / ⓒ The Independent)


프랑켄슈타인의 메리는 진보적인 철학자 아버지와 페미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습니다. 그때 19세의 퍼시는 16세의 '해리엇'과 결혼을 했습니다. 스물 한 살에 이르러서 벌써 아버지가 된 퍼시는 1814년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17세의 메리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 것입니다. 성향마저 비슷한 두 사람은 열렬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진: 메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처음 발표할 때는 익명으로 출판하였다.(메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처음 발표할 때는 익명으로 출판하였다.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남편 심장 (퍼시 비시 셸리)] / ⓒ The Great Courses Daily)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해리엇은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맙니다. 남은 두 사람은 영국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이들은 스위스를 거쳐서 이탈리아로 향했고, 거기서 평생 친구인 바이런과 사귀게 됩니다. 그리고 2년 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메리 셸리와 남편 퍼시 비시 셸로는 이탈리아에서 행복한 신혼을 맞았습니다. 




메리 셸리의 남편의 심장


메리 셸리는 남편 퍼시 비시 셸리, 친구 바이런, 주치의 '폴리도리' 등과 공포괴담을 짓는 놀이를 했었습니다. 여기에서 세계적인 대작들이 나오는데, 폴리도리의 '뱀파이어'와 메리의 '프랑켄슈타인'입니다. 뱀파이어는 세계 최초의 흡혈귀 소설이고 프랑켄슈타인은 신체이식으로 시체를 되살린다는 소설이었습니다.


사진: 젋은 시절의 메리. 영국의 소설, 극작가, 수필가이다.(젋은 시절의 메리. 영국의 소설, 극작가, 수필가이다. [프랑켄슈타인의 메리 셸리 - 남편 퍼시 비시 셸리의 심장] / ⓒ Samuel John)


그러던 어느 날, 악몽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친구들과 타고 나갔던 요트가 뒤집히는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메리 셸리의 남편 퍼시 비시 셸리는 실종되었다가 며칠 후에 해변으로 떠밀려 왔습니다. 그동안 시체는 부패하고 새들이 얼굴을 파먹어서 끔찍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겨우 스물 아홉에 천재 시인이 죽은 것입니다.


사진: 익사하여 죽은 퍼시를 바이런과 친구들이 화장하고 있다.(익사하여 죽은 퍼시를 바이런과 친구들이 화장하고 있다.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남편 심장 (퍼시 비시 셸리)] / ⓒ Louis Édouard Fournier)


할 수 없이 친구들은 화장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는 화장이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줌의 재로 변해버릴 시신이 안쓰러워서 심장을 따로 보관하기로 했고, 메리 셸리는 남편의 심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 나중에 이 심장은 메리 셸리의 무덤 바로 옆에 함께 묻히게 됩니다. 평생 보관한 남편과 영원히 같이 묻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메리와 퍼시가 묻힌 영국의 세인트 피터 교회(메리와 퍼시가 묻힌 영국의 세인트 피터 교회 [프랑켄슈타인의 메리 셸리, 남편 퍼시 비시 셸리의 심장] / ⓒ BBC News)


퍼시 비시 셸리의 시는 부드럽고도 달콤한 매력을 가진 시들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강압적인 관습을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의미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1831년에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원작자임을 밝히고 개정판을 발간했습니다. 지금도 메리 셸리와 남편 퍼시 비시 셸리의 심장은 영국의 '세인트 피터 교회'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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