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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지식 칼럼/역사&사건

이야기꾼 전기수 - 조선시대 소설을 읽어주는 낭독가

2018. 9. 8.

[이야기꾼 전기수 - 조선시대 소설을 읽어주는 낭독가] 

지금은 TV와 스마트폰 등으로 볼거리가 넘쳐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소설을 읽어주는 전기수라는 직업도 있었습니다. 이야기꾼 전기수는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실제로 존재했는데, 지금은 내레이터나 동화구연가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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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어주는 전기수


우리는 심청가, 흥부가 등의 판소리에서 '아니리'를 하거나, 무성영화에서 '변사'가 대사를 읽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리는 "판소리" 중간에 말로 설명을 하는 부분이고, 변사는 영화 내용을 감정을 실어서 읽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직업으로 지금도 다큐멘터리 등에서 설명을 해주는 '내레이터'나 시각장애인, 어린이를 위해 동화를 읽어주는 '동화구연가'가 있습니다. 


사진: 홍길동 전.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소설 중의 하나이다.(홍길동 전.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소설 중의 하나이다. [이야기꾼 전기수, 조선시대 책 읽어주는 전기수, 이야기꾼 전기수] / ⓒ PD due to age)


한편 조선시대에는 '전기수'란 직업이 있었습니다. 전기수의 뜻은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읽어주는 노인(傳奇叟)"이란 의미이니, 즉 소설을 읽어주는 낭독가로 볼 수 있겠습니다. '전기'란 설화와 소설의 중간 단계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현대소설은 "문어체"가 많지만 중세 소설은 실제로 말을 전하는 듯한 "구어체"가 많았으니 입으로 읽기에도 좋았습니다. 


사진: 태평성시도라는 조선의 그림이다. 도시의 일상적인 생활을 보여준다.(태평성시도라는 조선의 그림이다. 도시의 일상적인 생활을 보여준다. [이야기꾼 전기수, 조선시대 책 읽어주는 전기수] / ⓒ Unknown)


이야기꾼 전기수는 장터에서 책을 읽어주거나 양반집을 방문해서 읽어주었습니다. 전국의 큰 시장에는 전기수들이 많이 있었으며, 서울의 경우 종로, 보신각, 인사동, 낙원동, 배오개 등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이야기를 즐기는 양반들은 집으로 불러서 듣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 같은 이야기에서부터 '심청전', '임경업전'과 중국의 '삼국지', '설인귀전' 등까지 다양하게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이야기꾼 전기수


병자호란 후 18세기가 되자 생활이 안정되어 가면서 양반뿐 아니라 서민들도 여가생활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풍속화와 소설 등 문화가 다양해지자 책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쇄된 책이 유교 경전 등의 내용이었으니 이야기로서 읽을 수 있는 책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쓴 책을 파는 사람들이 있었고, 책판매 상인 중에는 책을 읽어주고 돈을 받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진: 남졍팔난긔라는 조선시대의 소설.(남졍팔난긔라는 조선시대의 소설. [이야기꾼 전기수, 조선시대 책 읽어주는 전기수, 이야기꾼 전기수] / ⓒ Unknown)


이때 이야기꾼 전기수가 생겨났는데, 김홍도의 풍속화에도 등장할 만큼 꽤 인기를 누리던 직업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냥 책을 읽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실감 나게 감정까지 표현을 하니, 지금으로 치면 라디오 드라마의 성우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기록에 의하면, 임경업전을 듣던 청중이 너무 빠져들어서 실제와 구별 못하고 전기수를 살해했다고도 합니다. 


사진: 지나던 사람들은 전기수의 글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춰고 귀를 기울였다.(지나던 사람들은 전기수의 글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춰고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꾼 전기수, 조선시대 책 읽어주는 전기수] / ⓒ Unknown)


그들은 갓과 도포를 입고 책을 한 손에 들고 읽었지만, 이미 책의 내용을 다 암기하고 있었고 표현법까지 훈련을 통해 익힌 상태였습니다. 이야기꾼 전기수가 공식적인 직업이 아니라서 기록은 많지 않지만, 나름대로는 인기를 가진 연예인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방 관리의 아들이었던 '이자상'이라는 사람은 소설에 빠져서 과거를 포기하고 전기수가 되었다고 하니, 꽤 대중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 조선 말기 시장터의 모습을 찍은 희귀사진이다.(조선 말기 시장터의 모습을 찍은 희귀사진이다. [이야기꾼 전기수, 조선시대 책 읽어주는 전기수, 이야기꾼 전기수] / ⓒ Unknown)


이자상, 이업복, 김중진, 고수관, 송흥록, 염계달, 모흥갑 등이 유명한 이야기꾼 전기수였습니다. 전기수는 어떨 때는 시조처럼, 어떨 때는 연기처럼 이야기를 읽어줬는데 사람들이 모이면 중요한 대목에서 갑자기 말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들끼리는 이를 "요전법"이라고 불렀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관객들이 돈을 던져주면 그제야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며 먹고살았던 것입니다. 





조선 후기의 낭독가


이야기꾼 전기수가 공식적인 직업이 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양반집 아녀자들은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해서 전기수를 집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남녀가 유별한 시대이니 여장을 하고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영조, 정조 때는, 어떤 전기수가 야밤에 부녀자와 음탕한 짓을 하다가 들켜서 큰 사건이 된 적도 있었습니다. 이 일은 조정까지 알려져서 모든 전기수를 잡아들이고 유배를 보내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사진: 홍계희의 평생도. 조선시대 양반집 아녀자를 그린 그림.(홍계희의 평생도. 조선시대 양반집 아녀자를 그린 그림. [이야기꾼 전기수, 조선시대 책 읽어주는 전기수] / ⓒ 홍계희)


하지만 보수적인 양반층이 진짜 싫어했던 이유는 지정하지 않은 책을 서민과 아녀자가 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백성의 도리나 아녀자의 도리에 대한 책만 강요받던 시대에 부패한 권력의 문제점이나 서민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를 읽는 것이 싫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보수적인 기득권자들은 약자가 지식을 넓히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하는 것에 대해 "오염된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진: 옛 서적들을 모아 놓은 모습(옛 서적들을 모아 놓은 모습 [이야기꾼 전기수, 조선시대 책 읽어주는 전기수, 이야기꾼 전기수] / ⓒ 정읍시립박물관)


그러나 문맹률이 70%를 넘었던 시대에 서민들에게 이야기꾼 전기수는 독서를 대신하는 사람이었고 TV를 대신하는 연예인이었습니다. 소설을 읽어주는 전시수는 조선 후기와 말기, 그리고 해방 후에도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60년대까지도 빠짐없이 장터에 나타나던 전기수는 TV 보급과 함께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이제 문맹률 0%에 가까운 시대가 되고 그들은 기록에서도 찾기 힘든 잊힌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최근 국립박물관에서 새로 발견한 서경충효지.(최근 국립박물관에서 새로 발견한 서경충효지. [이야기꾼 전기수, 조선시대 책 읽어주는 전기수] / ⓒ 국립박물관)


이야기꾼 전기수는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중국에 갔던 사신이 '수호지'를 읽어주는 사람을 보았다는 기록도 있고, 한국, 중국, 일본이 공통으로 가지는 문화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그 맥이 남아서 '라쿠고(らくご)'가라는 이름으로 존재합니다. 일본은 전용 스탠딩 개그 공연관에서 지금도 공연이 열린다고 합니다. 1인 연극 형태로 자리를 잡고 살아남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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