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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필 박사 - 프랭크 스코필드의 생애와 호랑이스코필드장학문화재단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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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필 박사 - 프랭크 스코필드의 생애와 호랑이스코필드장학문화재단

키스세븐지식 2017. 11. 3.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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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필 박사 - 프랭크 스코필드의 생애와 호랑이스코필드장학문화재단]

국립현충원에는 한국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묻혀 있습니다. 여기에는 유일하게 외국인이 한 명 안장되어 있는데, 프랭크 스코필드(석호필 박사)입니다. 그는 1919년 3.1운동에 34번째 민족대표로 참가했으며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려 광복에 도움을 준 사람입니다. 한국의 민주화를 바랬던 석호필 박사는 한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970년 운명하였습니다. 




[글의 순서]

수의학자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삶

한국을 사랑한 석호필 박사의 의미


[엮인 글]




수의학자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삶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는 1889년에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명문학교의 교감을 지내며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일찍 사망하면서 마음의 변화가 커졌다고 합니다. 갑자기 지방의 작은 학교 강사로 자리를 옮기더니 점점 더 빈민가의 지방으로 옮기며 살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검소함이 몸에 배었습니다. 석호필 박사는 이렇게 가정형편이 좋지 못해서 고생스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사진: 캐나다에서 기념물로 남은 석호필 박사. 이 안내책자는 캐나다 트위터에 올려진 사진이다. [수의학자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삶](사진: 캐나다에서 기념물로 남은 석호필 박사. 이 안내책자는 캐나다 트위터에 올려진 사진이다. [수의학자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삶] / ⓒ OntVetCollege)


그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한국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아홉 살 되던 1897년의 어느 날, 아버지는 한국에서 유학 온 한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어린 석호필 박사는 그에게서 처음으로 아시아에 한국이란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국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유학생은 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여병현'입니다.) 


사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전경. 나중에 연세대학교 의료원이 된다. [수의학자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삶](사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전경. 나중에 연세대학교 의료원이 된다. [수의학자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삶] / ⓒ 독립기념관)


자꾸만 빈민 지역으로 가는 아버지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선교사들과 봉사의 습관이 잡혔고, 열다섯 살이 되면서는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2년 동안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프랭크 스코필드는 하류층의 노동착취를 보며 충격을 받았고, 빈부의 격차가 심각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산업혁명의 나라 영국에서는 빈부격차로 인해 더 이상의 진학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후, 19세에 캐나다로 유학을 간 후에는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캐나다의 주일학교 교인들과 석호필 박사의 한 때. [수의학자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삶](사진: 캐나다의 주일학교 교인들과 석호필 박사의 한 때. [수의학자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삶] / ⓒ 독립기념관)


석호필 박사는 소아마비에 걸려 한쪽 다리에 장애가 생기는 불운까지 겹쳤지만 끝내 우등생으로 졸업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수의학자이며 세균학자로 수의학 박사 학위를 따냈고 우유와 세균에 대한 학문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로 인해 석호필 박사가 조선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는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교장이 교수로 초빙을 하면서부터입니다. 





한국을 사랑한 석호필 박사의 의미 


그 후 프랭크 스코필드는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을 세계에 알리며 조선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섰고, 외국인 독립운동가로서 34번째인 민족대표 34인으로 거론되게 됩니다. 힘없는 조선의 백성들이 처참하게 짓밟히고도 강자인 일제에 의해 역사에서 지워질 뻔한 일들을 세계에 고스란히 밝히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일제의 위협도 있었지만, 당시 영국과 일본은 동맹관계였기 때문에 영국계인 석호필 박사를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진: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을 묘사한 그림. 3.1운동 후 있었던 만행을 화성시에서 전시 중이다. [한국을 사랑한 석호필 박사의 의미](사진: 일제의 제암리 학살사건을 묘사한 그림. 3.1운동 후 있었던 만행을 화성시에서 전시 중이다. [한국을 사랑한 석호필 박사의 의미] / ⓒ 경기도 화성시)


이후에도 조선을 도우려는 석호필 박사의 노력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의 비참한 형무소 생활을 알리기 위해 직접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하였고, '유관순', '어윤희' 등을 면담하며 일제의 비인간적 가학행위를 낱낱이 해외에 고발하였습니다. 또한 직접 '조선총독부'에 찾아가 비인도적 행위를 멈출 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랭크 스코필드는 강도를 가장한 암살 위기를 당했고, 일제는 그를 추방하려고도 했습니다. 


사진: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스코필드 박사가 다시 한국에 온 날의 환영회 모습. [한국을 사랑한 석호필 박사의 의미](사진: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스코필드 박사가 다시 한국에 온 날의 환영회 모습. [한국을 사랑한 석호필 박사의 의미] / ⓒ 해외문화홍보원)


세브란스 의학전문대학과의 계약도 끝나는 시점이라 프랭크 스코필드는 캐나다로 돌아갔지만, 거기서도 강연 등을 통해 조선의 비참함을 알리는 도움을 계속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한 후 대한민국은 1968년 광복 10주년 기념식에 석호필 박사를 초대하였습니다. 스코필드는 다시 한국에서 일하기를 원했고 서울대학교 수의병리학과에서 교수로 일했습니다. 


사진: 국립서울현충원의 모습. 현재 3명의 외국인이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한국을 사랑한 석호필 박사의 의미](사진: 국립서울현충원의 모습. 현재 3명의 외국인이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한국을 사랑한 석호필 박사의 의미] / ⓒ 한국관광공사)


프랭크 스코필드는 현재의 '혈액응고방지제'가 개발되는 기초를 마련한 수의학자였으며, 스코필드 기금을 마련해서 전세계의 후원금으로 가난한 한국의 복지사업에도 노력을 기울인 사람입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독재, 부패를 막아야 한다며 민주주의 운동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의해, 지금은 국립현충원에 묻혀 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현재 한국에는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뜻을 받들어서 "호랑이스코필드장학문화재단"이 운영 중에 있습니다. 이름이 호랑이 스코필드인 것은 프랭크 스코필드의 음을 따서 만든 한국식 이름 석호필(石虎弼)이 "호랑이처럼 용맹하게 돕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진: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 보습. 스코필드 박사는 기득권자와 독재자를 반대하였다. [한국을 사랑한 석호필 박사의 의미](사진: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 보습. 스코필드 박사는 기득권자와 독재자를 반대하였다. [한국을 사랑한 석호필 박사의 의미] / ⓒ 대통령기록관)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유신시대 한국의 경제 발전에 대해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성장은 이루었지만 빈부격차가 너무 심해졌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의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눈곱만치도 없다"고 말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또한 생전에 석호필 박사는 "강자에겐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약자에게는 비둘기 같은 자애로움으로 대하라"고 말해왔다고 합니다. 

생전의 석호필 박사에 대한 에피소드 중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한 교수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내게 범죄 성향이 좀 있나봐... 부자만 보면 훔쳐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싶단 말이야"


사진: 제자들과 기념 사진을 찍는 스코필드 박사. 그는 한국의 빈부격차가 줄어들길 소망하였다. [한국을 사랑한 석호필 박사의 의미](사진: 제자들과 기념 사진을 찍는 스코필드 박사. 그는 한국의 빈부격차가 줄어들길 소망하였다. [한국을 사랑한 석호필 박사의 의미] / ⓒ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국립현충원의 그의 묘지에는 프랭크 스코필드의 묘비에는 이렇게 유언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세요." 

석호필 박사가 민족대표 34인으로서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의 선행을 보인 것은 그러한 인간성에 의한 열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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