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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 실화 - 명성황후 시해범 살해 논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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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 실화 - 명성황후 시해범 살해 논란

키스 키스세븐 2017. 10. 18.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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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 실화 - 명성황후 시해범 살해 논란]

김구의 백범일지는 거의 온 국민의 필독서입니다. 하지만 백범일지를 토대로 영화가 만들어지거나 할 때마다 기록이 잘못 됐다는 논란이 끊이질 않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의 김창수(김구 본명)가 치하포 사건에서 명성황후 시해범이라며 살인을 한 것은 논란이 많습니다. 




[글의 순서]

1. 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 역사

2. 김구(김창수)의 치하포 사건 논란

3. 김구 치하포 사건 추론과 최초의 전화 논란




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 역사


백범 '김구' 본명은 '김창수'입니다.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창수가 '치하포 사건'을 겪은 해는 스물 한 살이 되는 1896년의 일입니다. 

김구가 태어난 1876년은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이 있었고 일본의 조선 침략이 노골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이때부터 1910년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까지는 조선인에게 매우 암울한 때였습니다. 김구가 명성황후 시해범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치하포사건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진: 김구의 사진과 김창수 실화를 영호로 만든 대장 김창수의 포스터. 왼쪽이 조진웅, 오른쪽이 송승헌이다. [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 역사](사진: 김구의 사진과 김창수 실화를 영호로 만든 대장 김창수의 포스터. 왼쪽이 조진웅, 오른쪽이 송승헌이다. [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 역사] / ⓒ www.kiss7.kr 편집)


1895년 일본의 낭인(직업 없이 돌아다니는 자)들에게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터졌습니다. 김창수(김구 본명)가 치하포 사건에서 명성황후 시해범이라며 살인을 하게 되는 때는 을미사변 일어나고 몇 개월 후였습니다. 

일제는 '흥선대원군'의 쿠데타라고 왜곡하려 했지만, 당시를 목격한 서양인들에 의해 그들의 만행이 국제적으로 다 들통 났습니다. 그러니 일본인을 보는 백성들의 눈은 당연히 적개심으로 불타던 때입니다. 


사진: 이종학의 명성황후 초상과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명성황후가 거쳐했던 것으로 알려진 옥호루의 사진. [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 역사](사진: 이종학의 명성황후 초상과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명성황후가 거쳐했던 것으로 알려진 옥호루의 사진. [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 역사] / ⓒ 이종학)


1896년 2월, 고향으로 가던 중에 김창수는 황해도 치하포의 한 주막에 묵게 되었습니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터진지 얼마 되지 않은 터에, 주막에 묵던 어떤 일본인이 조선인 행세를 하는 것을 수상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결국 명성황후 시해범이라고 판단을 내린 김창수(김구)는 살인을 저질렀고, 일본인이 가진 돈 중 75냥으로 나귀를 사서 집으로 떠나며 남은 800냥을 조선인들에게 줘버렸습니다. 이것이 김구 치하포 사건의 내용입니다. 


사진: 구글 지도에서 치하포를 찾은 곳. 김구 치하포 사건 실화의 장소는 황해도에 있다. 김구의 본명이 김창수였다. [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 역사](사진: 구글 지도에서 치하포를 찾은 곳. 김구 치하포 사건 실화의 장소는 황해도에 있다. 김구의 본명이 김창수였다. [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 역사] / ⓒ 구글 지도, www.kiss7.kr 편집)


김창수는 치하포 사건으로 체포된 후 인천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일제의 침략이 계속되는 시기이므로 일본인을 살인했다는 것은 아주 큰일이었습니다. 재판에서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범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는 주장을 했지만,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만약의 역사에서 김창수(김구)가 치하포 사건으로 사형 당했다면, 현대사에서 우리가 아는 김구는 없을 뻔 했습니다. 


사진: 영화 자료화면. 김구가 치하포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범에게 복수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 역사](사진: 영화 자료화면. 김구가 치하포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범에게 복수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 역사] / ⓒ 영화 대장 김창수)


김구가 치하포 사건으로 사형수가 되어 있던 어느 날, 사형집행에 대한 국왕의 재가를 얻기 위해 문서들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승지가 이상한 문자를 발견합니다. 국모보수'(國母報讐. 국모가 당한만큼 되갚아 준다)는 글자를 보자 고종에게 다시 보고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고종은 급히 지시해서 사형을 연기시켰습니다. 이때는 인천까지의 첫 전화가 개통된 지 3일 밖에 안된 시기였는데, 이 일로 인해 전화가 개통되는 바람에 김구가 목숨을 건졌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김구(김창수)의 치하포 사건 논란


먼저 알아둘 것은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는 역사책이 아닌 자서전이라는 것입니다. 1925년부터 거의 20년에 걸쳐서 개인의 기억에 의해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틀리는 부분도 많고, 자기 변호적인 문장도 많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거짓말을 했다느니, 미화했다느니 논란을 부추기는 말들이 있어서 논쟁이 생깁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김창수(김구 본명)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냐는 것이며, 사실 유무는 역사기록을 통해서 확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진: 백범 김구와 백범일지 사진. 역사적 오류가 있고 개인적 변호도 있지만, 민족을 위한 민족지도자로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김구(김창수)의 치하포 사건 논란](사진: 백범 김구와 백범일지 사진. 역사적 오류가 있고 개인적 변호도 있지만, 민족을 위한 민족지도자로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김구(김창수)의 치하포 사건 논란] / ⓒ www.kiss7.kr 편집)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치하포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말투가 이상하여 관찰을 하니 장사치처럼 위장한 왜놈이란 걸 알았다. 칼을 차고 다니니 명성황후 시해범이거나 공범 같았다. 공범이 아니라도 왜놈은 조선의 독버섯이다."라는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창수(김구)는 주막에서 밥을 먹는 수상한 일본인을 폭행한 후 소지품을 뒤졌는데, 이름이 '쓰치다 조스케'이고 일본군 중위란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사진: 김창수 실화인 김구의 치하포 사건 대결 영화 자료화면. 원래 김구의 성격은 다혈질이고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라는 반론도 있다. [김구(김창수)의 치하포 사건 논란](사진: 김창수 실화인 김구의 치하포 사건 대결 영화 자료화면. 원래 김구의 성격은 다혈질이고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라는 반론도 있다. [김구(김창수)의 치하포 사건 논란] / ⓒ 영화 대장 김창수)


김창수(김구)는 기습적으로 폭행을 했습니다. 갑작스런 공격에 나동그라졌던 쓰치다가 칼을 휘둘렀고, 김창수가 칼을 피하면서 오히려 빼앗아서 공격했다고 합니다. 그가 직접 표현한 당시의 상황을 보면, 김구는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것처럼 '환도'로 난도질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김구는 치하포 사건에서 결국 살인을 하게 되었고, 쓰치다 조스케의 돈을 빼앗아 식당 주인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했다고 합니다. 그가 쓴 돈은 홧김에 즉석에서 당나귀를 사버린 75냥 정도였습니다. 


사진: 영화 자료화면. 김창수 실존인물인 김구는 18세에 동학운동의 아기장군으로 불렸고 20대에 감옥에서 죄인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김구(김창수)의 치하포 사건 논란](사진: 영화 자료화면. 김창수 실존인물인 김구는 18세에 동학운동의 아기장군으로 불렸고 20대에 감옥에서 죄인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김구(김창수)의 치하포 사건 논란] / ⓒ 영화 대장 김창수)


하지만, 일본측 외무성의 자료에는 쓰치다가 상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현대의 연구 자료에서도 쓰치다가 일본 낭인이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고, 대마도 출신의 상인이었다는 기록만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쓰치다 조스케의 입장에서는 김구와 치하포 사건에서 마주친 것이 불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백범일지 외에는 쓰치다 조스케가 군인이라는 자료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김창수(김구)가 민간인을 죽이고 강도짓을 했다는 논란의 주장을 합니다. 


사진: 김창수 실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의 한 장면. 치하포 사건은 민간인 살인사건과 국모의 복수라는 두 가지 시선이 존재한다. [김구(김창수)의 치하포 사건 논란](사진: 김창수 실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의 한 장면. 치하포 사건은 민간인 살인사건과 국모의 복수라는 두 가지 시선이 존재한다. [김구(김창수)의 치하포 사건 논란] / ⓒ 영화 대장 김창수)


더구나 당시 재판 조서에 의하면, 김구는 치하포 사건에 대해서 쓰치다 조스케의 행동 때문에 격분했던 것으로 나옵니다. "주막이라 해도 아침식사는 연장자부터 차례가 있는 법인데, 칼을 찬 왜인이 불손하게 먼저 차려 달라고 하여 분개했고, 알아보니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 맨손으로 때려 죽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물론 재판에서 김창수(김구)가 명성황후 시해범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일본군으로 의심되는 자를 죽였다고 주장했겠지만, 조서에도 쓰치다 조스케가 일본군 중위라는 기록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김구 치하포 사건 추론과 최초의 전화 논란


백범일지에서 백범 김구는 치하포 사건을 비중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김구에게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그만큼 치욕적이고도 크나 큰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김창수(김구 본명)가 민간인을 죽이고 강도짓을 했다는 주장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쪽에서 김구를 깎아내리기 위한 경우가 많습니다. 겉 표면만 보면 일면 맞는 말이며, 실제로 김구가 임시정부 요인시절에 행한 테러, 납치 등과 얽혀서 나쁜 인간성으로 전도되는 구실이 됩니다. 


사진: 정치적 경쟁자인 이승만과 김구. 서로의 지지자들은 이들의 문제점을 잡아 비판하는 일이 자주 있다. [김구 치하포 사건 추론과 최초의 전화 논란](사진: 정치적 경쟁자인 이승만과 김구. 서로의 지지자들은 이들의 문제점을 잡아 비판하는 일이 자주 있다. [김구 치하포 사건 추론과 최초의 전화 논란] / ⓒ 미상)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김구는 치하포 사건에서 죽인 일본인을 명성황후 시해범이라고 정말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는 낭인이 아닐지라도 자신과 쓰치다 조스케의 인연을 조선과 일본과의 악연처럼 대입해서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쳇말로 표현할 때, 김창수(김구 본명)의 치하포 사건은 주막에서 아침을 먹는 도중 열 받았는데, 칼을 차고 거들먹거리는 것이 일본에 대한 복수심으로 옮아붙으며 저지른 참극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사진: 김구 치하포 사건 실화를 영화한 장면. 그러나 이 영화는 치하포 사건보다는 힘없는 백성과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이 주제이다. [김구 치하포 사건 추론과 최초의 전화 논란](사진: 김구 치하포 사건 실화를 영화한 장면. 그러나 이 영화는 치하포 사건보다는 힘없는 백성과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이 주제이다. [김구 치하포 사건 추론과 최초의 전화 논란] / ⓒ 영화 대장 김창수)


또 김구가 치하포 사건에서 빼앗은 1000냥 정도의 돈도 800냥 이상을 주민들에게 줘버린 것을 봤을 때, 김창수(김구)를 단순한 강도 폭력배로 치부하려는 측의 주장과는 거리가 큽니다. 

쓰치다가 명성황후 시해범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지만, 시해범이라는 증거도 없는 민간인이므로 김창수의 행위는 정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김구라는 인물의 전체를 놓고 볼 때, 치하포 사건을 가지고 단순한 테러범이나 강도잡범으로 모는 것도 지나친 침소봉대입니다. 백범 김구에게 우리가 몰랐던 이면도 있었다는 정도의 상식으로 알면 될 것 같습니다. 


사진: KT에서 볼 수 있는 고종의 최초의 전화 상상도. 김구 치하포 사건 실화에서 고종이 전화를 했다는 것은 아직 공식적 역사 사실은 아니다. [김구 치하포 사건 추론과 최초의 전화 논란] (사진: KT에서 볼 수 있는 고종의 최초의 전화 상상도. 김구 치하포 사건 실화에서 고종이 전화를 했다는 것은 아직 공식적 역사 사실은 아니다. [김구 치하포 사건 추론과 최초의 전화 논란] / ⓒ KT)


또 한 가지 김구의 치하포 사건에 얽힌 논란은 고종이 전화를 걸어 사형 직전의 김구를 살려냈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김창수(김구 본명)를 거짓말쟁이로 모는 주장으로 변질되는데, 정황을 보자면 고종이 자신을 살려줬다는 것은 김구도 남이 전한 얘기를 통해 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엔 최신 문물이었던 전화를 사용했다는 정도를 들었을 것인데, 그 사이의 모든 과정을 조사해서 백범일지에 적었을 리는 없습니다. 


사진: 치하포사건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에서 김창수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 김구의 본명은 20대까지 사용되었다. [김구 치하포 사건 추론과 최초의 전화 논란](사진: 치하포사건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에서 김창수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 김구의 본명은 20대까지 사용되었다. [김구 치하포 사건 추론과 최초의 전화 논란] / ⓒ 영화 대장 김창수)


한국 최초의 전화는 1896년 궁궐에 설치되었습니다. 한성과 인천 사이의 민간인 전화개설은 1900년에 있었으니, 1897년의 사형 연기 이유를 적은 백범일지와 맞지 않기는 합니다. 

그러나 황제가 한 명의 사형수를 살리기 위해 인천의 재판소까지 직접 전화를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고종이 궁궐에서 전화로 지시한 것을 인천에 전보로 전달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즉, 백범일지에 나오는 최초의 전화사건은 역사와 다르긴 해도 큰 맥락에서는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김구와 요인들의 기념사진. 김구가 명성황후 시해범이라고 주장하며 살해한 사건으로 사형을 받았다면 우리는 민족지도자 김구를 몰랐을 수도 있다. [김구 치하포 사건 추론과 최초의 전화 논란](사진: 김구와 요인들의 기념사진. 김구가 명성황후 시해범이라고 주장하며 살해한 사건으로 사형을 받았다면 우리는 민족지도자 김구를 몰랐을 수도 있다. [김구 치하포 사건 추론과 최초의 전화 논란] / ⓒ 한국학 중앙연구원)


백범 김구는 성인이 되려던 사람이 아닙니다. 지도자가 되고 정치인이 되려던 사람입니다. 당연히 김구에게도 잘못이 있을 수 있고 신격화가 아니라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김창수(김구) 치하포 사건은 김구 자신에게도, 쓰치다 조스케에게도 역사의 비극입니다. 이 부분의 백범일지는 역사기록과 맞지 않으나, 피 끓는 청년시절에 느낀 망해가는 나라에 대한 울분도 남의 일은 아닙니다. 다만 대한민국의 후손들이 그 감정을 잊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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