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수 - 중국집 배달원이었던 기부 천사의 삶과 교통사고]
세상에는 80%의 부를 독점하고도 기부나 복지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고, 한 달 몇 십만 원의 벌이로도 쪼개서 남을 도와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 씨는 어려운 삶에서도 기부를 실천해서 모범적인 삶을 살았지만, 아쉽게도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철가방 우수씨에서도 김우수의 선행은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글의 순서]
1.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의 선행
2. 기부 천사 김우수와 어린이재단
3. 기부천사 중국집 배달원의 삶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의 선행
2009년, 갑자기 유명해진 중국집 배달원이 있었습니다. '김우수'씨는 TV방송과 신문 등에 기부 천사로 소개되었습니다. 기부하는 금액이 커서 화제가 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한푼 두푼 쪼개서 자신보다 더 어려운 어린이들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한 달에 70만 원 정도를 버는 수입에서도 몇 년간이나 어린이재단을 후원했다는 아름다운 사연은 칭찬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사진: 기부천사 김우수의 생전 모습. 어린이재단에 후원해 주던 아이들의 사진을 들고 기뻐하는 모습이다.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의 선행] / ⓒ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방송 등 각종 언론에서 "기부 천사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라는 이름으로 화제가 되자, 청와대에서 그를 초대하여 선행을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자리이니 좀 차려 입고 가라고 사람들이 말했지만, 그는 한사코 배달복 차림으로 청와대에 갔습니다. 자신에게는 그 옷이 가장 떳떳하다고 말했을 정도로 김우수는 소박하고 검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2012년 최수종 주연으로 영화 <철가방 우수씨>이 개봉하기도 했습니다.
(사진: 영화 철가방 우수씨의 포스터. 최수종 주연으로 기부천사 김우수의 감동적인 실화를 다룬 영화다. 윤학렬 감독 2012년 작품.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의 선행] / ⓒ 철가방 우수씨)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는 어린이재단을 통하여 기부 천사로 살아왔습니다. 그 중에는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청소년 가장이 된 아이들도 있었고, 아동 학대와 가정불화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새벽 5시면 신문배달을 하고 주말에는 13시간씩 중국집 배달원을 하며 받는 70여만 원의 돈으로 쪽방 생활을 하던 기부 천사 김우수였습니다. 그 돈으로 매달 5만 ~ 10만원씩이라도 꼬박꼬박 5년간이나 어린이재단에 기부를 해 온 것입니다.
(사진: 기부문화의 중요성은 기부받은 아이들이 좋은 심성으로 자라나서 사회가 다시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기부 천사 김우수의 선행은 그래서 중요하다.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의 선행] / ⓒ Karolina Grabowska)
이렇듯 인간적인 아름다운 삶을 살던 그가 2011년 뜻하지 않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U턴을 하다가 승합차와 충돌한 것입니다. 119에 의해 병원에 실려 갔지만 이미 가망 없는 생명이었습니다.
더구나 가족이 없던 김우수는 허전하게 혼자 병실에 쓸쓸히 누워있었습니다. 기부천사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장례식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고, 인터넷 누리꾼들은 슬픔을 함께 했습니다.
기부 천사 김우수와 어린이재단
기부 천사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가 외롭게 세상을 떠난 것은 그가 고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산에서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났는데, 7살 때 고아원에 버려졌습니다. 그래서 김우수는 가족도 친척도 모르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채로 열두 살 나이에 고아원을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그 후 길거리 구걸과 시장 짐꾼 등의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갔습니다. 어른이 되서도 오토바이 짐꾼일로 어둡게 살아갔다고 합니다.
(사진: 영화 철가방 우수씨의 한 장면.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는 어린 시절을 구걸로 살았던 기억으로 추억한다. [기부 천사 김우수와 어린이재단] / ⓒ 철가방 우수씨)
기부 천사 김우수의 젊은 날은 불운의 나날이었다고 합니다. 오토바이 사고로 8일간이나 혼수상태로 지내기도 했고, 심지어 일하던 곳에서 월급을 떼이기도 했습니다. 버려지고 배운 것도 없는 김우수에게 세상은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막일로 번 돈은 술과 노름으로 탕진했습니다.
그러던 중 돈이 없다고 박대하던 술집에서 불을 지르려고 하다가 교도소 생활까지 해야 했습니다. "돈이 없다고 무시하느냐"며 홧김에 벌인 일이었습니다.
(사진: 중국집 배달부 김우수의 실화를 소재로 한 연극도 있었다. 김한길 연출, 원종철, 임학순 출연. [기부 천사 김우수와 어린이재단] / ⓒ 행복배달부 우수씨)
이 1년 6개월의 감옥 생활은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로 유명해지는 인연을 만들어 줍니다. 교도소 출소를 6개월 남긴 어느 날, 어린이재단에서 발행하는 <사과나무>라는 책을 읽고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정폭력과 빈곤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어린이들을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어린이재단에 전화를 걸어 도움에 참여하고 싶다고 하면서 기부 천사 김우수는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진: SBS방송의 기부천사 고 김우수의 방송장면.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방문한 고시원에는 도움을 받은 어린이의 편지가 남아 있었다. [기부 천사 김우수와 어린이재단] / ⓒ SBS)
기부천사가 되면서 김우수는 하루 2갑의 담배와 술을 끊었습니다. 그 돈으로 도와준 아이들이 감사의 편지를 보내오면,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피곤이 싹 가신다며 즐거워했습니다.
한 달에 25만원을 내는 고시원 생활을 하면서도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는 매월 12만원이 들어가는 4000천만 원짜리 종신보험도 들었습니다. 그것도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어린이재단 앞으로 들었던 보험입니다. 폐수술로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져도 단 한 번의 빠짐없이 3만원이라도 꼬박꼬박 기부를 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기부천사 중국집 배달원의 삶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는 연고자가 없어서 빈소를 차리지 못할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며 어린이재단에서 장례를 맞기로 했고, 기부 천사의 마지막을 돕겠다며 장례업체도 나섰습니다. 정부인사, 정당 정치인들이 다녀갔고, 한 번도 그를 보지 못한 전국의 시민들이 안타까움에 찾아왔습니다. 도움을 받던 어린이와 보호자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습니다. 평생 서럽고 고된 삶을 살았지만 기부천사 김우수의 마지막은 감동의 교훈이 되었습니다.
(사진: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가 기부했던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홈페이지. 이 사이트의 주소는 https://www.childfund.or.kr/이다. [기부천사 중국집 배달원의 삶] / ⓒ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중국집 배달원을 하던 김우수는 1시간이나 미리 나와 준비를 하던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휴대폰에는 중국집 사장과 고시원 총무 등 몇 명을 제외하고는 친구 연락처나 주고받은 문자도 없었습니다.
창문도 없이 1.5평의 쪽방에 1인용 간의 침대가 전부인 그의 방에는 도와주던 아이들의 사진과 감사 편지가 소중하게 놓여있을 뿐이었습니다. 멀리 에티오피아에서 가족이 먹고 살 농작물을 사게 되었다며 고맙다고 보내 온 편지도 있었습니다.
사진: 기부 천사 김우수가 거처하던 고시원의 CGNTV의 방송장면. 소박한 식사식기와 후원했던 아이들의 사진이 같이 있다. 이 작은 공간에서 아이들을 생각하며 살았다. [기부천사 중국집 배달원의 삶] / ⓒ CGNTV)
겨우 두세 벌 옷이 전부인 그는 그동안 모은 300백만 원의 주식이 유일한 재산이었습니다. 가난한 삶에서도 남을 돕는 기쁨에 살아 온 기부 천사 김우수는 조조영화를 보고 2000원짜리 스포츠복권을 사는 것이 자신을 위한 유일한 여유였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한 달에 한번 자전거 여행을 다녀오고 1만 원짜리 운동화를 잘 샀다며 기뻐하던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라고 기억합니다. 결혼을 하고 싶은 이성도 있었지만, 고아였던 상처로 인해 포기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사진: 방송기자연합회에 유혁근 기자가 올린 기사. 헬멧을 쓰고 행복한 웃음을 짓는 기부천사 김우수의 영정이 보인다. [기부천사 중국집 배달원의 삶] / ⓒ KBS 유혁근)
엄마와 단 둘이 살아가는 7세 소녀를 도우며 기부 천사가 된 김우수는 1년 후 그들이 자립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보람을 느끼고 5년간을 그렇게 살아왔다고 합니다.
막대한 자본으로 이익을 챙기면서도 복지정책에는 비판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사회의 한 구석에는 자신도 어려우면서 오히려 남의 어려움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장기 기증을 원했던 중국집 배달원 김우수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남을 돕는다는 것이 "돈이 아니라 마음"이었음을 다시금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