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 5세와 쑤난타 왕비 - 쭐랄롱꼰 국왕의 태국의 노예제도 폐지]
세월호 침몰사고로 수많은 학생이 희생되었어도, 한국은 오히려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어떤 보수단체들은 오히려 희생자 가족들을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비극에 닥쳤을 때, 무엇을 바로잡아야 할지를 생각하지 못하면 역사에서 배울 것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태국에서는 쑤난타 왕비의 배 침몰사고 이후 노예제도를 바로 잡는 개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라마 5세 국왕과 수난타 왕비의 일화를 관찰하며 태국은 어떤 나라였는지도 알아봅니다.
[글의 순서]
1. 라마 5세와 쑤난타 왕비의 태국
2. 수난타 왕비의 어이없는 익사사건
3. 태국 노예제도와 쭐랄롱꼰 국왕
라마 5세와 쑤난타 왕비의 태국
'쑤난타 왕비'는 태국 근대화의 상징적인 군주인 '라마 5세 쭐랄롱꼰' 국왕(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จุลจอม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의 부인입니다. 라마 5세는 1910년 조선이 경술국치를 겪을 때와 같은 시기까지 태국을 다스렸습니다.
태국의 노예제도가 사라지게 된 것에는 수난타 왕비(พระนางเจา สุ นันทา กุมารี รัตน์)에게 일어난 어이없는 죽음이 있었습니다. 1880년, 왕비와 어린 공주가 물에 빠져 죽어 가는데도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던 비극이 발생한 것입니다.
(사진: 쭐랄롱꼰 국왕이 가장 총애했던 것으로 알려진 쑤단타 왕비. 왕비의 익사사고로 인해 라마 5세의 깨달음이 생기고, 태국의 노예제도는 폐지되었다. [라마 5세와 쑤난타 왕비의 태국] / ⓒ khirsis)
태국은 남한면적의 5배 정도의 국토를 가지고 7천만 명에 근접한 인구가 사는 나라입니다. 원래 국명은 '시암'이었지만 지금은 '타이왕국'이라고 하며, "자유의 왕국"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처럼 태국은 제국주의시대에도 일본이나 유럽의 식민지가 아니었습니다.
동쪽의 일본 제국주의와 서쪽의 서양 제국주의의 힘의 균형을 교묘하게 잘 이용한 덕분입니다. 이때의 국왕이 바로 라마 5세였습니다.
(사진: 태국의 대왕으로 불리는 라마5세의 사진. 산업과 정치, 체제 등 여러 방면에서 태국이 식민지가 되지 않고 근대화되도록 공헌하였다. [라마 5세와 쑤난타 왕비의 태국] / ⓒ wikipedia.org)
쑤난타 왕비의 남편인 라마 5세는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대왕처럼 "대왕"이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라마 5세 쭐랄롱꼰는 라마 4세 때 불공평하게 외국과 맺은 조약을 개선하고, 절대왕정을 포기하여 입헌군주국으로 변화시켰으며, 태국의 근대적 기틀을 만들어냈습니다.
태국은 불교나라이며 국왕은 신격화되어 추앙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태국 국왕은 총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방, 행정, 입법, 사법에서 권한을 행사하며, 태국 주식의 15%를 가진 거대자본가이기도 합니다.
(사진: 말년기의 쭐랄롱꼰 국왕. 우리나라의 고종과 같은 시대를 살다가 간 태국의 왕이다. 현재도 태국은 왕이 권력의 일부를 가진 나라다. [라마 5세와 쑤난타 왕비 - 쭐랄롱꼰 국왕의 태국의 노예제도 폐지] / ⓒ rabbit.co.th)
수난타 왕비가 어이없게 익사한 사건의 원인인 노예제도는 옛날 절대왕정의 문제점이었습니다. 당시 태국의 국민은 국가 노역으로 1년에 4~6개월을 일하거나 돈으로 내야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국민이 농사를 안 짓고 오랜 노역에 다녀오거나 돈을 낸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신 돈을 내줄 후견인에게 들어가서 노예로 사는 국민이 늘어났고, 결국 전 국민의 1/3이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신분제도는 점점 더 엄격해져 갔으나, 1905년에 태국의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습니다.
수난타 왕비의 어이없는 익사사건
19세기 말, 태국은 그 이전의 풍습대로 신분, 계급의 차별이 매우 심한 나라였습니다. 당시 절대왕정을 유지하던 대부분의 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국민들은 왕을 쳐다봐서도 안 되고 신체를 접촉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태국의 노예제도가 비극적이게도 쑤난타 왕비와 어린 공주를 어이없게 익사시키는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개혁군주였던 라마 5세 쭐랄롱꼰에게는 남다르게 반성할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사진: 라마5세와 쑤난타 왕비, 1세된 공주의 가족사진. 하지만 얼마 후 수난타 왕비와 공주, 태아는 익사사고로 숨진다. 태국의 새로운 개혁이 일어나는 비극이다. [수난타 왕비의 어이없는 익사사건] / ⓒ pantip.com)
태국 국왕 라마 5세 쭐랄롱꼰에게는 적어도 4명의 부인과 80여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아내는 수난타 왕비였는데, 여름궁전인 '방파인'에 머물던 라마 5세는 왕비가 보고 싶어서 그곳으로 오라고 불렀습니다.
1880년 5월의 어느 날, 쑤난타 왕비는 짜오프라야강을 따라서 배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짜오프라야강은 태국에서 가장 큰 강으로 방콕을 통과하여 남쪽으로 흐릅니다. 남쪽에 큰 곡창지대가 있기 때문에 과거의 태국에서는 교통의 대동맥 역할을 했습니다.
(사진: 태국의 방콕을 흐르는 짜오프라야강의 현재 모습과 지도상의 모습. 태국 남부의 곡창지대에까지 연결되어서 교통의 중심으로 사용되었었다. [수난타 왕비의 어이없는 익사사건] / ⓒ wikipedia.org)
쭐랄롱꼰 국왕의 부인인 쑤난타 왕비는 국왕의 이복여동생입니다. 태국은 근대까지도 근친혼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대부분의 왕들이 아버지가 다른 어머니에게서 낳은 딸들과 결혼했습니다. 라마 5세의 공식적인 4명의 왕비 중 수난타 왕비를 포함한 3명이 이복누이입니다.
태국 왕실은 근친혼이 기본적이기 때문에 다른 혈통으로서 왕비가 된 부인은 친족 왕비보다 한 등급 낮은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근의 태국 국왕은 1부 1처제로 한 명의 부인만 두고 있습니다.
(사진: 쭐랄롱꼰 왕의 수많은 왕비들과 후궁들. 수십명의 부인을 더 거르렸다는 얘기도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근친혼을 한 이복여동생들이 다수라는 것이다. [수난타 왕비의 어이없는 익사사건] / ⓒ cdninstagram.com)
당시 수난타 왕비는 20세의 나이였고, 임신 5개월의 상태에다 한 살 된 공주도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파인에 거의 다 와서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쑤난타 왕비와 딸이 '왓 꾸'사원 근처의 강을 지나는 순간, 갑자기 배가 전복되며 승객들이 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짜오프라야강은 물살이 세거나 위험한 강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노예가 그 광경을 보고 있었으나 아무도 쭐랄롱꼰 국왕이 총애하는 수난타 왕비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왕비를 구했더라도 왕족의 몸에 접촉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진: 쑤난타 왕비의 익사사고는 짜오프라야강 인근의 왓 꾸 사원 앞 강물에서 일어났다. 노예들은 물에 빠진 왕족을 두려워하면서 구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수난타 왕비의 어이없는 익사사건] / ⓒ wikipedia.org)
임신 5개월의 쑤난타 왕비는 물속에서 구해 달라고 허우적댔습니다. 한 살 된 공주만이라도 살리고 싶었겠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렇게 세 명의 왕족이 허무하게 죽어가야 했습니다. 태어나지도 못한 아기와 1세의 어린 공주도 노예제도의 사회적 문제에 의해서 죽음을 당한 꼴이 되어야 했습니다.
라마 5세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고 있었는데도 수난타 왕비와 딸이 익사해 죽었다는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쭐랄롱꼰 국왕은 태국의 노예제도를 폐지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현재도 짜오프라야강에서는 작은 배를 이용한 교통이 많이 이용되고 있다. [라마 5세와 쑤난타 왕비 - 쭐랄롱꼰 국왕의 태국의 노예제도 폐지] / ⓒ Takeshi Hirano)
태국 노예제도와 쭐랄롱꼰 국왕
독실한 불교국가 태국에서 승려는 공무원 대우를 받는 직업입니다. 심지어 왕들도 국왕이 되기 전에 승려가 되었다가 수행이 끝나면 되돌아오곤 합니다. 쭐랄롱꼰 국왕도 라마 5세로 즉위하기 전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 아버지인 라마 4세는 세상이 변하는 것을 감지하고 서양인 교사를 붙여주었습니다. 덕분에, 이전의 왕들과 달리 세상의 변화를 일찍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일화에 등장하는 서양인 가정교사가 '앤'이며, 라마 4세인 '몽쿳 국왕'과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 그 유명한 <왕과 나>입니다.
(사진: 영화 <왕과 나>는 라마5세의 부친인 라마4세의 이야기이다. 서양인 가정교사의 교육덕분에 라마 5세는 근대식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었다. 뒤쪽에 100명이 넘는 자식들이 보인다. 주연은 율 부린너. [태국 노예제도와 쭐랄롱꼰 국왕] / ⓒ The King and I)
태국의 노예제도는 15세기에 생긴 '싹디나 제도'에서 출발합니다. 싹디나 제도는 국민들이 국가로부터 토지를 할당받아서 경작하다가, 죽으면 다시 반납하는 제도입니다. 즉 생계수단을 매개체로 하여 국왕은 전 국민을 영향권 아래에 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싹디나 제도로 인하여 계층이 수직으로 나뉘고 상급계층의 지배를 받는 구조가 되어버려서 태국 전체가 노예제도에 묶이고 말았습니다. 쑤난타 왕비의 죽음은 이런 사회 제도의 문제점 때문인 것입니다.
(사진: 노예제도로 인한 태국 국민들의 힘겨운 삶. 당시 태국 국민의 1/3이 노예제도 하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것은 뿌리깊은 계급사회로 굳혀졌다. [태국 노예제도와 쭐랄롱꼰 국왕] / ⓒ 미상)
태국 국왕 중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쭐랄롱꼰 국왕은 비통함에만 머물지 않고 과감하게 사회개혁을 결심했습니다. 수난타 왕비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던 노예들을 벌줄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예해방을 시켜준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후 세월호 가족과 그들을 위로하던 사람들이 공격받은 한국의 상황과는 달랐습니다. 존경받는 지도자란 자신만의 입장에서 국민을 억누르는 자가 아니라, 국민의 어려운 부분을 해결해 주는 자여야만 합니다.
(사진: 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왕으로 꼽히는 쭐랄롱꼰 국왕의 기념관. 지금도 태국 국민들은 그를 살아있던 부처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태국 노예제도와 쭐랄롱꼰 국왕] / ⓒ chonburitime.com)
그래서 태국 국민들은 라마 5세 쭐랄롱꼰 국왕을 대왕이라고 부르며, 쑤난타 왕비가 참사를 당한 5월 31일에는 국가적인 큰 행사를 치릅니다. 라마 5세가 너무도 아꼈던 수난타 왕비의 죽음은 결론적으로 국민에게 해방과 자유를 준 사건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왕비를 아끼고 국민을 아꼈던 라마 5세는 불교국가 태국에서 부처로 모셔집니다.
아낌의 차이가 느낌의 차이를 만들고 그것이 역사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같은 비극에서도 사람마다 느끼는 반성의 차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