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를 보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것들
세계 최고의 그룹으로 역사에 남은 비틀즈의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는 비틀즈가 어떻게 대중음악사에서 위대한 그룹으로 남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더불어 빼놓지 않고 봐야할 것은, 비틀즈 멤버들 간의 우정과 음악에 대한 열정일 것입니다.
- Beatles : Eight Days a Week
에잇 데이즈 어 위크는 어떤 비틀즈 영화인가?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는 비틀즈가 주인공이지만 옛날 영화는 아닙니다. 21세기에 새로 제작되었으며 자료를 모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비틀즈의 각종 영상기록을 재구성해서 비틀즈는 어떤 가수였던가를 알려 줍니다.
영화의 감독은 론 하워드입니다. 뷰티플 마인드, 아폴로13호, 분노의 역류, 다빈치코드 등 유명한 영화를 감독했으며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경력도 있습니다.
(사진: 2016년 개봉한 비틀즈의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Eight Days a Week) 영화 포스터. [에잇 데이즈 어 위크는 어떤 비틀즈 영화인가] / ⓒ StudioCanal)
영국과 미국에서 2016년 9월에 개봉했으며 이미 전 세계에서 560만 달러 이상의 흥행을 기록했습니다. 미국 현지에서의 에잇 데이즈 어 위크의 지지율은 95%이며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7~8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 영화팬의 비틀즈 영화 기대치는 개봉 전에 이미 10점 만점에 10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극영화가 아니라서 다큐멘터리에 익숙하지 않은 영화팬이라면, 호불호가 가릴 수도 있으니 미리 생각하고 봐야 합니다.
(사진: 에잇 데이즈 어 위크의 감독 론 하워드. 다빈치코드, 뷰티플마인드 등을 감독했다. [에잇 데이즈 어 위크는 어떤 비틀즈 영화인가] /ⓒ Marco)
2016년 한국에서 비틀즈 영화는 5월에 "하드 데이즈 나이트"가 개봉했었습니다. 에잇 데이즈 어 위크와의 차이점이라면, 이번 개봉은 비틀즈의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영화인데 반해 1964년 제작했던 하드 데이즈 나이트는 비틀즈가 직접 자신들을 연기하고 연극적 요소가 있는 영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드 데이즈 나이트도 시네마 베리테(Cinema Verite)라는 점에서 매우 유명한 영화입니다. 대본, 세팅, 연출 없이 자유롭게 찍는 최초의 시네마 베리테 다큐멘터리영화였습니다.
(사진: 비틀즈 영화 어 하드 데이즈 나이트(A Hard Day's Night)의 포스터. 1964년에 제작된 시네마 베리테 다큐멘터리 영화다. [에잇 데이즈 어 위크는 어떤 비틀즈 영화인가] / ⓒ 미상)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의 주인공 비틀즈
세대차이가 크다보니 요즘엔 비틀즈의 이름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소개 글을 간추려 봅니다. 비틀즈는 1963년 데뷔한 영국의 락그룹입니다.
50~60년대에 걸쳐 락큰롤이 크게 유행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락큰롤을 기반으로 한 곡들이 많지만, 1966년 이후에는 음악적으로 급성장하면서 하드락, 프로그레시브, 사이키델릭, 펑크, 재즈, 포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음악장르의 선구자가 됩니다. 이 1966년 이전이 비틀즈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의 배경입니다.
(사진: 비틀즈의 멤버들. 왼쪽부터 폴 매카트니, 링고스타, 조지 해리슨, 존 레논.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의 주인공 비틀즈] / ⓒ Zoli Erdos)
비틀즈의 멤버는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스타입니다. 원래 드러머는 피터 베스트였는데 링고스타로 교체되었습니다. 이 중 존 레논은 1980년에 총에 맞아 암살됐고 조지 해리슨은 2001년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폴 매카트니와 링고스타는 아직도 음악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비틀즈의 시작은 1957년 존 레논의 그룹 쿼리맨에 폴 매카트니가 들어가면서부터였습니다. 비틀즈의 뜻은 여러 설이 있는데, 존 레논은 Beat-less로 말장난을 하다가 Beatles로 정해졌다고 말 했었습니다.
(사진: 마치 지금의 아이돌그룹 같은 분위기의 1963년 비틀즈 화보. 20대 초반의 풋풋한 그룹이다.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의 주인공 비틀즈] / ⓒ 미상)
독일 함부르크 등에서 라이브공연으로 먹고 살던 그들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매니저가 되면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처음엔 테카 레코드에서 정식 데뷔를 하려고 했지만, 4인조 밴드는 유행이 지났다며 퇴자를 놓습니다. 이 결정은 세기적인 최대의 실수 중 하나로 이야기되곤 합니다.
그래서 팔로폰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는데, 드럼을 치던 피트 베스트는 레코드사가 쫓아내고 링고스타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후 비틀즈는 대성공을 하게 되었고 1964년에는 미국 음반판매량의 60%가 비틀즈의 음반이 되었습니다.
(사진: 비틀즈와 함께 있는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 1966년까지 매니저를 했는데, 이 해까지가 비틀즈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의 배경이다. / ⓒ 미상)
비틀즈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의 뜻과 기대
음악을 좋아하는 영화팬에게 비틀즈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가 기대되는 점을 꼽으라면, 비틀즈의 공연 실황을 직접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현대 기술로 되살렸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영화복원기술 외에도 1965년 셰이 스타디움 야구장에서 열렸던 콘서트를 무려 30분간이나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반가운 일입니다.
당시에는 지금 같은 음향설비가 없었는데다가 관객석이 멀어서, 공연소리는 듣지 못하고 관중의 환호성 밖에 들을 수 없었다고 하니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사진: 셰이 스타디움 야구장에서의 콘서트 장면. 역사 최초의 스타디움 공연으로 1만명이 넘는 관중이 열광했다. [비틀즈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의 뜻과 기대] / ⓒ its all about Rock (:)
비틀즈의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에서는 우피 골드버그(시스터액트 시리즈 출연), 시고니 위버(에어리언 시리즈 출연), 리처드 커티스(영화 러브액추얼리 감독) 등이 인터뷰에 나서서 비틀즈가 활약할 당시의 체험담을 얘기해 줍니다.
당시 소녀였던 시고니 위버는 조금이라도 눈에 띄고 싶어서 머리를 맥주로 염색하고 공연에 갔었다는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비틀즈의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와 링고스타는 70이 넘었음에도 한국 공연을 오는 등 꾸준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진: 에어리언의 여전사 시고니 위버(왼쪽)과 시스터액트의 수녀 우피 골드버그(오른쪽)이 에잇 데이즈 어 위크에서 인터뷰 출연했다. [비틀즈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의 뜻과 기대] / ⓒ 영화캡처)
비틀즈가 활동한 시기는 1963년부터 1970년까지입니다.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는 1963년부터 1966년까지를 다룹니다. 비틀즈는 이 시기에만 공연을 했었고 엄청난 공연 스케줄 속에서도 작곡과 녹음을 하던 때였습니다.
에잇 데이즈 어 위크의 뜻은 이처럼 일주일을 8일처럼 살았던 때입니다. 그야말로 비틀즈의 전성기를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왜 그들은 1966년 이후에는 공연을 중단했을까도 함께 생각해 보면 좋습니다.
(사진: 비틀즈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의 뜻은 일주일이 8일이란 뜻. 그만큼 숨가쁘게 살았다는 얘기다. 사진은 1964년의 비틀즈. [비틀즈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의 뜻과 기대] / ⓒ 미상)
음악의 혁신, 비틀즈의 성공과 공연중단 뒷이야기
비틀즈가 미국무대로 진출할 때의 라이벌은 롤링스톤스라는 유명한 락그룹이었습니다. 이들은 학벌이 꽤 높았고 거친 음악과 공연을 했습니다. 반면 존 레논을 제외한 비틀즈 멤버들은 불우한 환경 속에 컸기 때문에 교육수준이 낮았습니다. 심지어 악보도 볼 줄 모르면서 작곡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말끔한 정장에 바가지를 연상시키는 댄디스타일 머리로 미국에 알려졌습니다. 락그룹의 반항적 이미지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왔는데, 이것은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전략이었습니다.
(사진: 영국 도시 리버풀의 거리에 있는 비틀즈의 동상. 비틀즈 수익의 95%가 세금으로, 영국은 경제공헌 훈장을 줬다.(음악훈장이 아님) [음악의 혁신, 비틀즈의 성공과 공연중단 뒷이야기] / ⓒ aintree iron)
비틀즈의 초창기에는 존 레논이 리드보컬로 전체를 이끄는 것 같았지만, 점차 폴 매카트니가 동등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처음엔 존재감이 없었던 조지 해리슨도 작곡에 참여하면서 음악성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이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피드백 주법을 사용하고 와와페달을 도입했으며 현악 4중주를 접목시켰고 테이프를 역재생시키는 백마스킹기술을 시도했습니다. 더구나, 이전의 가수들과는 다르게 싱글이 아닌 앨범 자체로서의 상품성을 완성시켰습니다. 공연 때마다 열광하던 팬들이 실신하는 사건이 연이었지만, 비틀즈도 점점 지쳐 가고 있었습니다.
(사진: 비틀즈는 1966년 이후로는 공연 없이 음악창작만 했으며 음악적으로 완성도 높은 성과를 이루었다. [음악의 혁신, 비틀즈의 성공과 공연중단 뒷이야기] / ⓒ Laurs)
그러다가 존 레논의 "비틀즈는 예수보다 유명하다"는 발언 때문에 미국은 난리가 납니다. 미국은 보수적인 국가였기 때문에 이것을 악마의 발언으로 받아들였고, 심지어 남부에서는 모의사형식까지 치러졌습니다. 더구나 필리핀 공연을 갔을 때는 독재자 마르코스의 개인파티 초대를 거부했다고 폭행을 당하며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마르코스는 필리핀의 박정희같은 인물입니다. 일본에서도 보수주의자들의 암살위협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처들로 인해 비틀즈는 더 이상의 공연은 하지 않았고, 1966년 이후 1970년까지 음악성을 높이는 앨범작업에만 몰두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