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출신의 가수 왕수복과 이효석의 사랑, 왕수복과 노천명의 삼각관계]
왕수복은 1930년대를 주름잡았던 가수입니다. 초대형급 가수로 대우를 받았지만, 어느 한편엔 기생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상처가 남아야 했습니다. 현대 한국 연예인의 1세대이기도 했던 왕수복은 이효석, 김광진과의 스캔들, 노천명과의 연적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들의 삼각관계에 대한 드라마같은 이야기를 해 봅니다.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과 가수 왕수복
소설가이며 산문가인 이효석의 글은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합니다. "메밀 꽃 필 무렵", "청포도사상", "낙엽을 태우며" 등이 이효석의 대표작품으로 꼽힙니다. 이효석은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작가였습니다. 동성동본 아내에 대한 아버지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지만, 부인과 딸이 병에 걸려 일찍 죽습니다.
이때 치료비를 벌기 위해 친일행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이효석은 부인과 딸이 연달아 죽자 절망 속에서 고통 받았습니다. 이효석은 방황 중에 일본 도쿄에 들렀는데, 이때 왕수복을 만나게 됩니다.
(사진: 작가 이효석의 가족사진. 행복한 가정생활은 아내와 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효석을 방황하게 만들었다.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과 가수 왕수복] /ⓒ http://blog.daum.net/yedam2323)
왕수복은 그 이전에 이미 유명 가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민족말살 정책을 펴며 우리말 가사조차 금지하자 왕수복은 고민하게 되었고, 마침내 대중가수를 은퇴한 후 일본에서 정통 성악을 배우던 중에 이효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왕수복의 나이 24세, 이효석은 34세 때의 일입니다.
왕수복은 나름 시대를 앞서나간 신식여성이었고 이효석은 독특한 작품으로 화제를 모으던 작가였습니다. 그의 소설에 빠져있던 왕수복은 한 눈에 반해서 이효석을 마음에 두게 되었습니다. 이효석이 평양에서 교직에 있었으므로, 왕수복은 이효석을 따라 평양에 가서 언니가 하는 다방을 봐 주었습니다.
(사진: 경성제국대학 시절의 이효석 사진. 1907년 출생하여 1942년 작고한 이효석은 일제강점기 때의 작가이자 언론인, 수필가이며 시인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과 가수 왕수복] / ⓒ 미상)
하지만 이효석은 아직 아내와 딸의 상중에 있어서, 왕수복의 다방에 들러 아무 말 없이 커피만 마시다가 나오곤 했습니다. 절망 같은 삶에서 만난 왕수복은 이효석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교제하지 말라며 이효석의 제자들이 왕수복을 찾아갔었지만, 교양미 넘치는 언변에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하지만 왕수복이 바라던 소설 같은 삶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혼인생활을 시작한 후, 겨우 2년 만에 이효석은 수막염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도 못 버티고 죽습니다. 왕수복의 첫 번째 사랑은 불의의 병마에 의해 죽음으로 이별해야 했습니다.
(사진: 대학교수이기도 했던 이효석. 이효석은 작품 메밀꽃 필 무렵이 교과서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하다. 엘리트 문학가와 연예계 왕수복의 만남은 파격적인 것이기도 했다.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과 가수 왕수복] / ⓒ 미상)
[기생출신의 가수 왕수복과 이효석의 사랑, 왕수복과 노천명의 삼각관계]
왕수복과 김광진의 사랑, 노천명과의 연적
노천명은 시인이며 신문기자입니다. "사슴"이라는 시로 유명하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칭송하는 "출정하는 동생에게"같은 시를 써서 친일자로도 꼽힙니다. 매우 내성적이며 도도했고 남자들에게는 결벽증적인 모습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변 남자기자들의 증언을 보면 성격을 안 좋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6.25전쟁 이후 북한 공산당을 칭송했던 것이 드러나 20년 징역 선고를 받기도 했었습니다. 이렇게 전투적인 노천명에게도 사랑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상대자는 경제학자 김광진이었습니다. 이 김광진이 왕수복, 노천명과의 드라마같은 삼각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사진: 노천명은 사슴을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이라고 표현하여 유명한 작가이자 기자이다. 초기에는 감성적인 시를 썼으나, 후반에는 종교적 참회의 글들이 많다. [왕수복과 김광진의 사랑, 노천명과의 연적] / ⓒ 미상)
조선일보 기자였던 노천명이 연극에 출연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김광진은 연극을 보러 갔다가 노천명에게 반하고 맙니다. 하지만 김광진은 노천명을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하여 아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도도하던 노천명도 김광진에게 애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김광진은 아내와 이혼하고 노천명과 재혼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이 스캔들을 김광진의 동료 교수가 소설로 써 내서 시끄러워지게 됩니다. 김광진은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아내가 극렬 저항하여 이혼에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삼각관계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또 다른 삼각관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진: 김광진은 일제강점기의 경제학자였다. 노천명과 사귀다가 왕수복에게 반하여 노천명을 버렸다. 나중에는 왕수복과 월북하여 북한에서 고위급으로 지냈었다. [왕수복과 김광진의 사랑, 노천명과의 연적] / ⓒ 미상)
그렇게 시간이 자꾸 흐르고 있을 즈음, 김광진은 우연한 기회에 왕수복과 합석하게 되었습니다. 이효석과 김광진을 다 알고 있던 동료 교수를 통해 김광진을 소개받은 것은 왕수복이 26세, 김광진은 40세일 때이고, 왕수복이 이효석을 잃은 지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은 때입니다. 이혼은 지지부진해지고, 노천명으로 인해 김광진이 염증을 느끼는 시기였으므로 김광진은 쉽게 왕수복에게 반하였습니다.
결국 김광진과 왕수복은 사귀게 되었고, 노천명은 차인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왕수복은 김광진과 결혼했고, 남북한이 분단되자 김광진은 김일성의 경제교사 역할을 하며 대접 받고 살았습니다.
(사진: 노천명은 본의 아니게 왕수복과의 사이에 김광진을 두고 삼각관계를 이루었었다.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생활을 하기도 한 노천명의 말년은 친일과 친북 활동으로 좋지 않았다. [왕수복과 김광진의 사랑, 노천명과의 연적] / ⓒ 미상)
[기생출신의 가수 왕수복과 이효석의 사랑, 왕수복과 노천명의 삼각관계]
최초의 가수왕 왕수복, 기생에서 연예인이 되기까지
왕수복은 1910년대에 태어났습니다. 수복은 오래 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려운 형편에서 살았습니다. 학교도 못 다니고 일곱 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다니며 남의 집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흥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 집의 가정교사가 감탄하며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음악선생님을 따로 소개해 주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개인레슨까지 시켜주려고 했지만, 학비가 없어서 결국 포기해야 했습니다. 왕수복의 언니도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서 기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왕수복도 기생이 되어 돈을 벌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평양 권번이고 십대 초반에 왕수복은 평양 기생학교 1기생이 되었습니다.
(사진: 평양권번 기생학교 출신인 왕수복은 삼천리 잡지가 조사한 인기 가수에서 조선 최고의 가수에 올랐다. 이효석, 김광진과의 염문으로도 유명하다. [최초의 가수왕 왕수복, 기생에서 연예인이 되기까지] / ⓒ http://blog.daum.net/jc21th)
왕수복은 평양권번 기생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노래와 춤뿐만 아니라, 사군자도 배워서 그림솜씨도 인정받을 정도였습니다. 마침 국내에 유성기(레코드 플레이어)가 확산되고 있던 터라, 레코드 회사에서는 유명 기생인 왕수복과 음반을 발매하였습니다. 이 때 왕수복의 나이가 겨우 17세일 때입니다. "고도의 정한" 등 수많은 곡이 히트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레코드회사마다 모셔가려고 했고, "삼천리"잡지의 조사에서 조선 최고의 가수왕에 올랐습니다. 전국적인 인기 때문에 이미 1930년대에 비행기를 타고 전국 공연을 다닐 정도였다고 합니다. 광고와 라디오 방송 섭외도 줄을 이었습니다. 한국의 근대적 연예인 1세대인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앨범판매 기록인 120만장을 왕수복이 해 냅니다.
(사진: 일제 강점기의 종합 월간 잡지인 삼천리. 여자 가수부분을 보면 왕수복이 1위지만 전체 가수에서도 1위다. 2위 선우일선, 3위 이난영, 4위 전옥, 5위 김복희가 보인다. [최초의 가수왕 왕수복, 기생에서 연예인이 되기까지] / ⓒ daesan.or.kr)
하지만 일제는 한국어 말살 정책으로 가요에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직업이 기생이라는 편견은 왕수복에게 괴로움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왕수복은 은퇴를 하며 일본으로 떠나버립니다. 일본에서 왕수복은 성악을 공부하여 메조소프라노가 되었습니다.
(사진: 현대적 미인과는 사뭇 거리가 있지만, 당시에는 목소리와 외모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던 왕수복이다. [이효석과의 사랑, 김광진과의 스캔들, 노천명과의 삼각관계] / ⓒ daesan.or.kr)
이때 이효석을 만나고, 고국에 돌아와서 이효석이 죽은 후에는 김광진을 만나게 됩니다. 김광진을 사귈 때의 노천명과의 삼각관계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결국 김광진은 왕수복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고향이 평양인데다가 김광석이 김일성의 경제정책을 맡으면서, 김광진과 왕수복은 북한에 살게 되었습니다. 이 둘은 죽을 때까지 북한에서 공산당의 대우를 받으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춘하추동 방송 유튜브 채널)
현대의 사람들에게는 왕수복의 외모와 가창력이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넘치는 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연예인이었음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