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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회군의 배경,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옳았나

키스세븐지식 2015. 12. 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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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회군의 배경,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옳았나] 




역사에서 만약이란 없겠지만, 고려 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의 배경과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습니다. 위화도회군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촉발한 일대 사건이며, 동시에 이성계가 개인의 야망을 위해 일으킨 군사쿠데타이고 하극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박정희 시대에는 긍정적인 역사적 결단으로 평가 받았습니다. 반면 북한에서는 역적으로 평가한다고 합니다. 





위화도 회군 이전의 국제 정세 


위화도회군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1388년이 될 때까지의 흐름을 잘 봐두는 것이 좋습니다. 

918년 고려의 건국 이후 고려는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기풍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자부한 고려는, 중국에 사대적인 신라를 흡수하였고 대륙을 주름잡던 발해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13세기 원나라의 7차례 침공을 받은 후에는 원나라의 식민지처럼 지냈습니다. 그 후 14세기에 세워진 명나라는 원나라와 전쟁을 벌였고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고려는 원과 관계없이 독자적인 자주국방의 의지를 다졌습니다. 



(위화도회군 진행도. 압록강 위화도의 위치는 지금의 신의주시 인근이다)


14세기 후반 명나라는 원을 북쪽 몽골로 밀어냈으나 요동 때문에 골치 아파합니다. 요동에는 원의 지방 태수 나하추가 맹위를 떨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368년 나하추가 투항하면서 명의 요동에 대한 근심은 사라지고 북쪽으로 축소된 북원에 전략이 집중됩니다. 

더불어 명은 요동의 공백이 생기자, 원이 지배했었던 철령 이북의 땅에 새 주인이 생겼다며 고려를 압박했습니다. 원에 사대하던 권문세족을 물리치고 우왕과 힘을 합친 최영 등의 신흥무인세력은 이에 발끈하며 힘의 공백이 생긴 요동을 쳐야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북원은 1388년 9월 결국 멸망하고 더 작은 나라로 축소되어 명맥만 유지하게 됩니다. 



(최영 장군. 왕에게 충성했으며 패거리를 만들지 않고 업무에만 충실했던 인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정치적 암투도 있었다 


이미 14세기 중후반에 세 차례나 요동에 출병하여 성과를 봤던 고려는, 1388년 여름에 5만의 군사를 일으켜서 요동으로 출병시켰습니다. 하지만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이 전쟁이 탐탁지 않았습니다. 이긴다고 해도 최영의 입지만 강화시킬 것이며, 진다면 그 책임을 뒤집어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영은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양쪽 모두 친하지 않았지만 왕의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반면 이성계가 최영과 연합하여 우왕을 옹립했으나,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최영을 견제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하기 전에도 두 차례나 회군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무조건 진격을 명했습니다. 



(위화도회군을 주도한 이성계. 위화도회군은 정치적 대결이라는 측면도 있다)


이성계는 위화도회군 전에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 농사철인 여름에 싸우는 것, 남쪽의 왜구를 방어하는 것, 장마철이라 무기와 군대에게 안 좋다는 것'을 이유로 4대 불가론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은 어떤 나라든 전쟁 전에 걱정할만한 일반적인 이유들일 뿐 특별한 내용은 없습니다. 

위화도의 위치는 압록강의 의주 근방이며 작은 섬입니다. 이성계는 같이 출병했던 조민수를 설득해서 위화도회군을 강행합니다. 위화도회군 소식을 들은 우왕과 최영은 황급히 방어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위화도회군으로 내전을 일으킨 이성계의 군대에게 1천명의 군대로 맞서기는 무리였습니다. 위화도회군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을 숙청하고, 동료인 조민수 마저 제거하며 권력을 찬탈했습니다. 



(현재의 위화도의 모습. 중국 쪽에서 바라본 위화도 위치의 배경이다)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냐, 개인의 탐욕을 위한 반란이냐로 이견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위화도회군만을 놓고 보면 안 된다는 필요성이 생깁니다. 바로 국제정세입니다. 

명나라는 한동안 요동지역의 원나라 세력 때문에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동이 평정되고, 고려가 요동정벌을 시도한 1388년은 북쪽으로 쫓겨난 북원마저 소멸해 가는 시기였습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북원에 좀 더 집중을 해야 할 시기이며, 안으로는 새 왕조의 입지를 다질 시기입니다. 이러한 힘의 공백을 이용해 영향력을 키우겠다는 것이 최영의 계획이었습니다. 



(고려 말에 영토수복 전략에 의해 되찾은 지역. 출처: zum.com)


물론 고려가 동원한 겨우 5만의 군사로 수십만의 동원 능력이 있는 명나라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30만 명을 동원했던 나라입니다. 원 간섭기 이후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겨우 5만 명이라면 명과의 전면전이 아니라 요동에서의 국지전이 목표가 아닐까 보입니다. 국지전은 전쟁 뿐 아니라 이후의 외교협상력도 중요한 전략입니다. 이미 고려는 서희가 담판으로 강동6주를 찾아 온 전력이 있는 나라입니다. 즉, 위화도회군은 위화도회군 전의 배경과 요동정벌 이후의 외교협상까지 가 봐야 하는 국가전략인데 이성계의 4대 불가론에서 이런 점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위화도회군으로 무산된 요동정벌의 관건은 전쟁 후 고려의 외교력일 것입니다. 전쟁 후 명나라와의 협상에서 얼마나 발언권을 높일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요동정벌에 성공했다면 고려는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진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번지거나 요동을 다시 내 놓아야 하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얼마나 실리를 취하며 지능적으로 후퇴하느냐가 중요하지만, 위화도회군으로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는 것은 아쉬움입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요동정벌로 고려가 이익을 볼지 손해를 볼지는 더 진행돼봐야 알 수 있는 만약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은 개인의 시각만으로 대사를 결정지어버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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