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폭군이며 칼리굴라의 조카인 네로황제의 자살과 최후]
로마 황제 네로는 로마의 폭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일화부터 칼리굴라의 누나인 네로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 살해, 정부인 포패아와의 바람에 대한 일화까지 네로황제에 대한 일화들은 흔히 막장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네로황제는 재위 14년 만에 쫓겨나고 자살로 비참하게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자살로 끝난 네로황제의 최후에는 클라우디아 악테라는 여인도 있었습니다.
카이사르에서 칼리굴라, 네로로 이어지는 로마 황제들
흔히 네로황제라고 하면 나쁜 짓만 일삼은 로마의 폭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재임 초기 5년 정도는 선정을 베풀었었고, 네로황제의 통치시대는 로마의 문화 부흥기이기도 했었습니다. 정치에는 폭군이었으나 문화, 건축에서는 잘한 면도 있습니다.
네로황제의 최후는 자살로 비참한 마지막을 맞았지만, 로마의 5대 황제이며 3대 황제인 칼리굴라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먼저 로마 황제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이렇습니다.
시이저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권력을 잡는 데는 성공하지만 암살당해서 로마 황제에는 오르지 못합니다. 대신 그의 양자인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1대 황제에 오르고, 2대 황제 티베리우스를 거쳐 로마 3대 황제에 칼리굴라가 오릅니다.
칼리굴라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이며 누나로 아그리피나가 있었는데, 아그리피나는 전남편의 소생인 네로를 데리고 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게 됩니다.
(로마 네로황제(좌)와 그 어머니 아그리피나(우)의 동상)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조카이고 티베리우스는 1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인데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인 아그리피나가 3대 황제 칼리굴라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와 결혼을 했으니 집안 내력이 참 복잡하기도 합니다. 칼리굴라와 아그리피나는 남매였으니 클라우디우스와의 결혼은 삼촌과의 결혼인 셈입니다.
비록 양자관계와 의붓아들이라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 얽히고설킨 집안 내 결혼을 통해서 네로는 로마의 5대 황제에 오르게 됩니다.
네로황제는 서기 1세기에 로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일찍 죽어서 어머니인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에게 재혼합니다.
그리고 아그리피나에게는 엄청난 정치적 야심이 있었으니, 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하고 네로를 왕위에 앉게 합니다.
아그리피나에게 클라우디우스는 세 번째 남편인데, 그녀의 두 번째 남편도 독살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클라우디우스에게 반역을 했다가 한번 쫓겨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로마로 돌아와 클라우디우스를 설득해서 친아들 대신 네로를 로마황제 후계자에 앉히는데 성공한 후 독살을 하였습니다.
(로마의 폭군 네로황제를 표현한 작품 - "콜로세움에서의 네로")
네로황제의 아내, 어머니, 그리고 여인들
네로황제는 서기 54년, 16세에 황제에 오릅니다. 예술적 재능이 있었던 네로황제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세우는 등 문화적 발전을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를 핑계 삼아 섭정을 하려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네로의 스승인 세네카와 한편이 되어 로마 정치를 주무릅니다.
네로황제를 옥타비아와 결혼시켜서 더 간섭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옥타비아는 기품이 있는 여자였고 그래서 로마시민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아그리피나는 네로가 말 잘 듣는 아들이길 바랬지만 네로는 어머니의 간섭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에 네로황제는 점차 반항적인 모습으로 변해가게 되었습니다.
네로는 강하게 반항하여 어머니의 정부를 추방하고 황제가 될뻔 했던 의붓형제도 독살하기에 이릅니다. 어머니가 의붓아버지를 죽인 방법과 똑같은 방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아그리피나는 위협을 느끼고 네로를 유혹하여 비정상적인 관계에 이르렀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영화 쿠오바디스의 한 장면. Quo Vadis는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뜻)
네로황제의 궁중에는 클라우디아 악테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노예출신의 왕궁시녀입니다. 한동안 네로는 악테와 사귀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클라우디아 악테는 신분의 차이 때문에 더 다가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포패아라는 여자가 나타납니다.
포패아의 남편은 네로황제가 동성연애를 하던 상대였습니다. 유부녀 포패아는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네로에게 접근했습니다.
네로가 부인과 사귀자 포패아의 남편이 이혼을 해 주어서 포패아는 네로황제의 사랑을 독차지 합니다.
포패아도 아그리피나처럼 야망이 많은 여자였습니다. 네로황제에게 달라붙어서 혼자 실권을 가지라고 부추깁니다. 어머니와 부인, 스승을 내쫓고 권력을 독차지하라고 하자, 안 그래도 어머니의 강압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네로는 어머니를 죽이기로 결심해버렸습니다.
아그리피나는 자신이 이미 독살을 해 봤기 때문에 항상 해독약을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네로의 하수인들은 배에 구멍을 내어 물에 빠트려 죽이기로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계획은 실패하고 아그리피나는 헤엄을 쳐서 뭍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수인들이 쫓아가서 살해했다고 하는 얘기가 전해옵니다.
(웅장한 규모의 콜로세움. 보이는 지하 위에 검투사 경기장이 있었다)
자살로 끝나는 로마 황제 네로의 최후
몇 년 뒤 네로황제는 아내인 옥타비아를 쫓아내고 포패아를 황후에 앉히기로 합니다.
조신한 옥타비아와 강제로 이혼한 후 외딴 섬으로 보내 버립니다. 그러자 로마시민들이 옥타비아를 제자리에 보내라고 시위를 했답니다.
그러나 몇 년 후, 네로는 포패아와의 결혼기념일 맞이하여 옥타비아에게 죽음을 내렸습니다.
이 일로 로마 원로회 뿐만 아니라 로마시민도 등을 돌렸는데, 네로의 타락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심지어 문화예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연극에 광대로 출연하거나 멀리 그리스의 성악대회에 참가한다고 일 년이나 자리를 비우기도 했답니다.
드디어 결정적인 사건이 터집니다. 바로 로마 대화재입니다. 서기 64년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14개 블록 중 10개 블록이 전소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일설에는 네로황제가 심심해서 로마 시내에 불을 질러놓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고도 하지만 정확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화재가 난 후 불탄 시민들의 땅을 마구 사들인 후, 자신의 건물을 짓기 위한 땅을 넓혔습니다. 충분히 오해를 살만한 행동이고 로마시민은 분노했습니다.
그러자 네로는 그 잘못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워서 죽이게 됩니다. 기독교의 성인인 바울과 베드로는 방화의 죄를 덮어쓰고 사형 당했습니다.
민심이 극히 나빠지고 반란까지 일어나서 로마가 혼란스럽게 되자, 서기 68년 로마의 원로원은 회의를 열어서 네로를 황제에서 해임시켜버렸습니다.
(대화재가 일어난 로마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로마 황제 네로)
네로는 왕궁을 버리고 쫓겨나야 했습니다. 황제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반대파들에게 복수를 당할 입장에 놓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황제에서 쫓겨난 네로는 도망을 쳐야했습니다. 모두가 네로를 버렸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함께하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은 클라우디아 악테였습니다.
사랑했지만 신분의 차이 때문에 멀리할 수밖에 없었던 악테가 끝까지 있어준 것입니다.
추격자들에게 죽을 지경에 이르자 네로는 자살을 합니다. 그의 나이 겨우 31세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악테가 있었습니다. 네로의 최후를 위해 눈물을 흘려준 마지막 한 사람입니다. 네로의 주검은 악테가 고이 묻어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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