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인이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에 정착하다
아프리카까지 진출한 정화 함대
7차에 거쳐 해양 원정을 나가서 인도, 페르시아만, 동아프리카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중국 측 기록으로는 길이가 130m를 넘으며 1700톤 급의 함선을 가진 수백 척의 대선단이었고 2만 명이 넘는 선원이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 각지에서 명에 받치는 조공을 받아 돌아왔다고 합니다. 혹자는 아메리카를 처음 탐사한 사람은 콜럼버스가 아니라 정화 함대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관계가 확인되지 않는 분분한 의견일 뿐입니다.
서양의 선단이 250톤 급의 3척 정도로 항해를 한 것과 비교하자면 엄청난 규모이긴 하지만, 중국인의 과장된 역사 기록 습관이 보이는 대목입니다. 130m는 현대 이론으로 봤을 때 당시 건조 기술로 만들 수 있는 한계를 너무 초과한 수치라고 합니다. 더구나 중국을 알지도 못하는 나라로 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것도, 모든 선물과 친교를 중국에 복속하여 신하국으로써 조공을 바쳤다고 쓰는 중국식 역사기록법으로 보입니다.
이후 명나라는 유교이념과 내부 보수화로 인해 해양 개척을 막고 정화 함대의 항해 기록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더 이상의 원정 항해를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사회가 보수적이 되면 새로운 사업이나 개혁으로 사회가 변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는 역사적 특징입니다.
정화 함대의 뒷 이야기
혹자는 정화함대의 주목적이 명나라의 건문제를 찾기 위해서였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영락제가 반란을 일으킨 후 이전 왕이었던 건문제가 사라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에 대해 건문제가 난징 함락 때 불에 타 죽었다는 소문도 있고, 극적으로 살아나서 멀리 도망을 갔다는 소문도 있기에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명나라의 영락제가 함대를 구성하여 보냈다는 의견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정확한 사실관계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영락제는 북방 및 동남아시아 정벌과 함께 팽창정책을 추진했었습니다. 이에 따라 정화 함대는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인도네시아, 인도, 아프리카 해안에 세력을 구축하고자 했었던 것입니다. 특히 믈라카 왕국은 정화 함대가 무역교두보로 중요하게 여겼고 사업을 진행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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