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철수
메러디스 빅토리호 레너드 라루 선장
흥남철수 작전은 약 20만 명이나 되는 군인과 민간인을 부산, 경남으로 실어 옮기는 거대한 작전이었습니다. 이때 흥남철수 작전 수송선이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가장 많은 인명을 구한 배로 기네스북에 올랐습니다.
한편,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 레너드 라루 선장에 대한 정보는 그 후 갑자기 사라집니다. 이후 라루 선장은 어떻게 살았을까... 여기에 대한 정보를 찾아 정리했습니다. (만약 흥남철수 요약 정리를 보려면 아래의 링크를 이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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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흥남철수 - 메러디스 빅토리호 레너드 라루 선장
흥남철수와 김백일, 현봉학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당했던 미해병과 미7사단은 거의 전멸당할 뻔했습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겨우 포위망을 뚫은 그들은 함흥으로 이동해서 옮겨질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흥남 철수 작전의 원래 목적은 탈출한 군인들을 수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10만 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북한군이 돌아와서 못된 짓을 저지를까 봐 피하려던 시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흥남에는 전투함, LST 수송선 등이 있었지만 민간인을 대피시킬 배는 없었습니다. 피난민들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김백일' 장군은 한국군은 피난민들을 엄호하며 육지로 남하하겠다고 버텼습니다. 또한 통역 고문관이었던 '현봉학'은 미10군 사령관 '알몬드'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무기를 잔뜩 실은 LST선 사이사이에 사람을 태우면 얼마나 더 태울 수 있는지를 설명하며 간곡히 설득했습니다.
레너드 라루 선장
주저하던 미군은 마침내 피난민도 태우고 탈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선박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미군 장교들과 돌아다니며 피난민을 태워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적어도 13척 이상의 수송선들이 따라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0만 명의 피난민들이 배에 탈 수 있었습니다.
이 배들은 군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람을 도우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 배들 중에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도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배들이 그렇듯이, 이 배 역시 물건을 싣는 수송선이었습니다. 사람이 탈 수 있는 공간은 12명의 승조원이 탈 수 있는 공간이 전부였습니다.
당시 이등 항해사의 증언에 의하면, '레너드 라루' 선장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최대한 많이 태우겠다고 했답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사람을 중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증언에 의하면, 배에 실려 있던 무기들을 버리고 피난민을 태우라고 했다고 합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기적
아무리 많아도 2천 명 정도의 무게까지 실을 수 있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1만4천 명의 피난민들이 올라탔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자칫하면 선원들의 생명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결정이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선원들도 충실히 그를 따랐습니다.
사람을 실을 수 없는 공간... 그들은 배 아랫 공간의 수송칸 맨 아래부터 사람을 채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꽉 차게 되면 그 위에 철재와 판자로 된 갑판을 얹었습니다. 또 가득 차면 그 위에 다시 갑판을 얹고 사람을 태웠습니다. 이런 식으로 5개의 화물칸은 적어도 3개 층으로 사람을 태웠습니다.
그리고도 공간이 모자라자 상단 갑판까지 사람을 꽉 채우고 배가 출발했습니다. 그날은 12월 23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산에 도착한 것은 12월 25일... 선원들은 화물칸의 사람들이 다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살아 있었습니다. 오히려 5명의 아기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사라진 레너드 라루
이렇게 한국전쟁에서 선뜻 피난민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 레너드 라루... 그런데 이상하게도 흥남철수 작전을 한 뒤로 그의 정보는 뚝 끊기고 말았습니다. 알고 보니, 미국에서 성 베네딕도회의 뉴튼 수도원에서 수도자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뒤늦은 나이에 사제도 아니고, 노동으로 봉사하는 수사가 된 레너드 라루 선장... 그가 그렇게 은둔생활을 한 것은 한국전쟁이 나고도 무려 47년이나 더 지난 뒤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저 묵묵히 종교에 헌신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를 찾아낸 것은 당시 이등 항해사였던 '로버트 러니'였습니다. 나중에 해군 제독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흥남철수 작전에서 함께한 동료들이 계속 그리웠던 것입니다. 반갑게 다시 만났지만, 레너드 라루는 그저 알 일을 했을 뿐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고 합니다.
다시 끈을 이어주고 떠난 라루 선장
또다시 시간이 흐르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 레너드 라루는 갑자기 한국인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노환으로 인해 숨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었습니다. 또한 그가 있던 뉴튼 수도원이 재정난으로 사라질 위기에 빠진 어느 날, 한국의 신부님들이 방문하기도 하는데...
그런데 이 위기가 의외의 곳에서 풀렸다고 합니다. 바로 한국에 있는 왜관 수도원에서 운영을 인수하기로 한 것입니다. 레너드 라루를 방문한 사람들은 왜관 수도원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당시 함경도에 세워진 덕원 수도원을 지원해 준 곳이 미국의 뉴튼 수도원이었고, 함흥철수로 덕원 수도원이 내려와 왜관 수도원이 된 것이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북한군의 만행 때문에 덕원 수도원은 총 50명 중 38명이 순교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 오히려 왜관 수도원이 뉴튼 수도원을 돕게 되었는데... 그리고 위기를 벗어나 인수가 끝난 뒤 이틀 후, 레너드 라루는 거짓말처럼 눈을 감았습니다. 1만4천 명의 한국인을 구한 그는, 다시 한국과 미국의 끈을 연결해 주고 8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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