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 (원본)
삼조선(三朝鮮) 분립시대 - 제2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신조선'"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책 조선상고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총 12권)
그러나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중요 부분에 형광색을 하여 요약 파악에 쉽도록 도움이 첨부된 포스팅입니다.
(참고: 《조선상고사》(저자 신채호)는 저작권 만료로 현재 CC0이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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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원본) / 삼조선(三朝鮮) 분립시대 - 제2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신조선'"
신朝鮮의 서침(西侵)과 연(燕)· 조(趙)· 진(秦)의 장성(長城)
삼조선이 분립한 뒤 오래지 않아서 신조선왕 모갑 ( 某甲 ) 이 영특하고 용감하여 마침내 말·불 두 조선을 다시 연합해 지금의 동몽고 ( 東蒙古 ) 둥지를 쳐서 선비를 정복하고 연을 쳐 우북평 ( 右北平 )---- 지금의 영평부 ( 永平府 ) 와 어양 ( 漁陽 )---- 지금의 북경 ( 北京 ) 부근과, 상곡 ( 上谷 )---- 지금의 산서성 ( 山西省 ) 대동부 ( 大同府 ) 등지를 다 차지하여 불리지 ( 弗離支 ) 의 옛 땅을 회복했다. 연왕 ( 燕王 ) 이 크게 두려워서 세폐 ( 歲輪 ) 를 신조선에 바치고 신하를 일걷고 태자를 보내서 볼모를 삼게 하였는데, 모갑이 죽고 모을 ( 某乙) 이 왕이 된 뒤에는 연의 태자가 돌아가서 연왕이 되어 장군 진개 ( 秦開 ) 를 왕자라 속여서 볼모로 보냈다. 모을이 그 속임수를 깨닫지 못하고 진개의 민첩하고 지혜로움을 사랑하여 가까이 두었다.
진개는 나라의 모든 비밀을 탐지해 가지고 도망해 돌아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와 신조선을 습격, 신 ·말 ·불 세 나라의 군사를 깨뜨리고 서북 변경, 곧 전자에 신조선 왕 모갑이 점령한 상곡·어양·우북평 등지를 빼앗고 나아가 불조선의 변경을 습격해 요서 ( 遼西 )--- 지금의 노룡현 ( 盧龍縣 ) 과, 요동 ( 遼東 )--- 지금의 요양 ( 遼場 ) 부근을 함락시켜,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의 5 군을 두고, 2 천리 장성을 쌓아 조선을 막으니, 사기 조선열전 ( 朝鮮列傳 ) 에, “연의 전성시대에 일찍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 ( 全燕時嘗略屬眞番 朝鮮 ). ”고 한 것과 흉노열전에, “연의 어진 장수 진개 ( 秦開 )가 호 ( 胡 ) 에게 볼모가 되어 호가 깊이 믿었는데, 돌아와서 동호 ( 東胡 ) 를 습격하여 깨뜨리니, 동호는 1 천여 리를 퇴각하였다. 연이 또한 장성을 쌓고 조양 ( 造陽 ) 에서부터 양평 ( 襄平 ) 에까지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의 군을 설치하였다 ( 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東胡 東胡却千餘里 燕亦築長城 自造陽 至襄平 置上谷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 ). ”고 한 것과 위략에, 연이 장군 진개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 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 ( 滿潘汗 ) 에까지 이르렀다 ( 燕乃遺將 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 ). ”고 한 것이 다 이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진개가 볼모로 갔던 신조선이 아니므로, 사기에는 이를 흉노전과 조선전 두 곳에 나누어 기록하였고, 위략에는 비록 조선전에 기록하였으나, 진개의 볼모되었던 사실을 쓰지 아니하였다. 만반한은 조선의 역사 지리상 큰 문제이므로 다음 장에서 다시 말할 것이다.
이때 지나 북쪽의 나라로서 조선을 막기 위하여 장성을 쌓은 자는 연 한 나라뿐 아니다. 조 ( 趙 : 지금의 直匠省 서쪽 절반과 河南省 북쪽 끝과 山西省 ) 의 무령왕 ( 武靈王 ) 의 장성 ( 지금 山西의 북쪽 ) 이 또한 조선과 조선의 속민 ( 屬民 ) 인 담림 ( 澹林 )·누번 ( 樓煩 ) 등 때문에 쌓은 것이고, 진 ( 秦 : 지금의 陝西省 ) 소왕 ( 昭王 ) 의 장성은 의거 ( 義渠 ) 를 토멸하고 흉노를 막기 위하여 쌓은 것이지마는, 의거는 원래 조선 종족으로 지금의 감숙성 ( 甘肅省 ) 에 옮겨가서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 농사가 발달하여 문화가 상당히 발달되었고 병력이 강하여 진 ( 秦 ) 을 압박하였다. 진의 선태후 ( 宣太后 : 秦始星의 高祖母 ) 는 절세의 미인이었는데, 의거가 진을 토멸할까 두려워서 의거왕을 꾀어 간통하여 두 아들을 낳게 하고는 의거왕을 불러다 쳐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여버려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창해역사(滄海力士)의 철퇴와 진시황의 만리장성
신조선이 연·조와 격전을 벌이는 동안에 진이 강성해져서 마침내 한 ( 韓 )·위 ( 魏 )·조 ( 趙 )·연 ( 燕 )·제 ( 齊 )·초 ( 楚 ) 등 지나의 여러 나라를 다 토멸하니, 한인 ( 韓人 ) 장량 ( 張良 ) 이 망국의 한을 품고 조선에 들어와 구원을 청하였다. 왕 모병 ( 某丙 ) 이 장사 여씨 ( 黎氏 ) 를 소개해 주어, 진시황의 순행 ( 巡幸 ) 을 기회하여 120 근 철퇴를 가지고 양무현 ( 陽武縣 ) 박랑사 ( 博浪沙 ) 가운데서 그를 저격하다가 잘못 부거 ( 副車 ) 를 부수고 성공치 못하였다.
사기에 장량이 창해군 ( 滄海君 ) 을 보고 장사를 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어떤 이는 창해를 강릉 ( 江陵 ) 이라 하고, 창해군을 강릉의 군장 ( 郡長 ) 이라고 하며, 장사 여씨를 강릉 출생이라 하였지마는, 창해는 동부여의 딴 이름이고, 동부여 두 나라는 1) 북갈사 ( 北曷思 : 지금의 琿春 ) 2) 남갈사 ( 南曷思 : 지금의 咸興 ) 에 도읍했으니, 창해는 이 두 곳 중의 하나요, 강릉이 창해라는 설은 근거없는 말이다. 얼마 안 가서 진시황이 동북쪽의 조선과 서북쪽의 흉노를 염려하여 옛날의 연·조 ·진의 장성을 연결하여 건축하는데, 전 지나의 인민을 동원하여 부역에 종사하게 하고 장군 몽념 ( 寒恬 ) 으로 하여금 30 만 군사를 거느려 감독케 해서 동양 사상 유명한 이른바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기원전 210 년에 진시황이 죽고, 이세 ( 二世 ) 가 즉위하매, 이듬해에 진승 ( 陳勝 )·항적 ( 項籍 )·유방 ( 劉邦) 등 혁명 군웅이 봉기하여 진을 멸망시켰다. 이두산 ( 李斗山 ) 이 이를 논하여 말하기를, “진 ( 秦) 의 위력이 태고 이래로 짝이 없도록 팽창하여, 만성 ( 萬成 : 모든 사람 ) 이 바야흐로 시황을 천신 ( 天神 ) 으로 우러러보는데, 난데없이 벽력 같은 철퇴가 시황의 혼백을 빼앗고, 여섯 나라 ( 한 ·위 ·조 ·연 ·제 ·초 ) 의 유민의 적개심을 뒤흔들어 놓았으므로, 시황의 시체가 땅에 들어가기 전에 진을 멸망시키려는 깃발이 사방에 날렸으니, 이는 창해역사의 공이 아니랄 수 없다.”고 하였다 .
흉노 모돈(冒頓)의 동침(東侵)과 신조선의 위축
지나의 항적·유방 등의 8 년 동란이 계속되는 사이에 신조선왕 모정 ( 某丁) 이 서쪽으로 출병하여 상곡 ( 上谷 )·어양 ( 漁陽 ) 등지를 회복하고, 지금의 동부 몽고 일대 선비의 항복을 받아서 국위가 다시 떨치더니, 그 자손의 대에 마침내 흉노 모돈 ( 冒頓 ) 의 난을 만나 국세가 도로 쇠약해지고 말았다.
흉노는 제 1 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과 어계 ( 語系 ) 가 같고, 조선과 같이 `수두'를 신봉하여 조선의 속민이 되었었는데, 지금의 몽고 등지에 흩어져서 목축과 사냥에 종사하였다. 천성이 침략을 즐겨 자주 지나의 북부를 짓밟고, 신조선에 대하여도 배반과 귀부 ( 歸附 ) 가 무상하였는데, 기원전 200 년경에 두만 ( 頭曼) 이 흉노선우 ( 匈奴單于 : 흉노 大酋長의 호 ) 가 되어, 맏아들 모돈 ( 冒頓 ) 을 미워하고 작은 아들〔小子〕을 사랑하다가 모돈에게 죽고 모돈이 대신 선우가 되었다.
신조선왕은 그가 사납고 음흉함을 모르고 자주 물건을 요구하였는데, 모돈은 짐짓 그 환심을 사기 위해 신조선왕이 천리마를 구하면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주고, 신조선왕이 미인을 구하면 그는 그의 알씨 ( 閼氏 : 선우의 妻妾 ) 를 주니, 신조선왕은 더욱 모돈을 믿어 사자를 보내서 두 나라 중간의 천여리 구탈 ( 脫 ) 을 신조선의 소유로 달라고 하였다.
구탈이란 당시 중립 지대 빈 땅을 일컫는 말인데, 모돈이 이 청구를 받고는 크게 노하여, “토지는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 이것을 달라하느냐.” 하고 드디어 사자를 죽이고 전 흉노의 기병을 모두 내어 신조선의 서쪽인 지금의 동부 몽고 등지를 습격하여 주민을 유린하고 선비를 수없이 학살하였다. 신조선은 퇴각하여 장성 밖 수천 리의 땅을 버리고 선비의 남은 무리들은 선비산 ( 鮮卑山 )---- 지금의 내외 흥안령 ( 興安嶺 ) 부근으로 도주하니, 이로부터 신조선이 아주 미약하여 오랫동안 이웃 종족과 겨루지 못하였다. 엄복 ( 嚴復 : 淸末의 학자 ) 이 말하기를, “흉노를 물과 풀을 따라 옮겨다니는 야만족이니, 어찌 토지는 나라의 근본이란 말을 내었으랴? 이는 한갓 사마천의 과장된 글이 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기, 한서 등을 참고해 보면, 흉노가 음산 ( 陰山 ) 의 험한 목을 빼앗긴 뒤엔 그 지방을 지나는 자가 반드시 통곡하였다 하고, 연지 ( 燕脂 ) 가 생산되는 언지산 ( 焉支山 ) 을 빼앗긴 뒤에는 슬픈 노래를 지어 서로 위로하였으니, 흉노의 토지 수요 ( 需要 ) 가 비록 문화적 민족과 같지 못하다 하더라도 아주 토지에 대한 관념이 없다 함은 편벽된 판단인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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