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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총론) / 제3장 구사(舊史)의 종류와 그 득실의 간략한 평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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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총론) / 제3장 구사(舊史)의 종류와 그 득실의 간략한 평가

키스세븐지식 2023. 4. 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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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총론)

제3장 구사(舊史)의 종류와 그 득실의 간략한 평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책 조선상고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총 12권)

그러나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중요 부분에 형광색을 하여 요약 파악에 쉽도록 도움이 첨부된 포스팅입니다. 

(참고: 《조선상고사》(저자 신채호)는 저작권 만료로 현재 CC0이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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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총론

제3장. 구사(舊史)의 종류와 그 득실의 간략한 평가

 

 

조선의 역사에 관한 서류를 찾는다면 신지(神誌)부터 비롯되겠는데, 신지는 권벽(權擘:선조 때 사람)의 응제시(應製蒔:임금의 명에 의해 지은 시)에서 단군 때 사관(史官)이라고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로소 보건대 단군은 곧 수두[蘇塗] 임금이요, 신지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수두 임금의 수좌(首佐)인 벼슬 이름 신치[臣智]이니 (蘇塗와 臣智의 자세한 것은 思想史에 보임), 역대의 신치 들이 해마다 10월 수두 대제(大祭)에 우주의 창조와 조선의 건설과 산천지리의 명승과 후세 사람의 거울 삼을 일을 들어 노래하였는데, 후세의 문사들이 그 노래를 혹은 이두문(吏讀文)으로 편집하고 혹은 한자의 오언시(五言詩)로 번역하여 왕궁에 비장하였으므로 신지비사(神誌秘詞) 또는 해동비록(海東秘錄) 등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고려에 와서는 저작자의 성명을 알 수 없는 삼한고기(三韓古記)해동고기(海東古記)삼국사(三國史) 등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가 있었으나, 지금에 전하는 것은 삼국사기와 일연유사뿐인데 그 전하고 전하지 아니하는 원인을 생각하건대 김부식, 일연 두사람만의 저작이 우수하여 전해진 것이 아니라, 대개 고려 초엽부터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나아가 북쪽의 옛땅을 회복하자는 화랑의 무사가 한 파를 이루고, 사대(事大)로 국시(國是)를 삼아서 압록강 안에 구차히 편안하게 있을 것을 주장하는 유교도(儒敎道)가 한 파가 되었다.

두파가 대치에서 논전을 벌이기 수백 년만에 불교도 묘청(妙淸)이 화랑의 사상에다가 음양가(陰陽家)의 미신을 보태어 평양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교도 김부식에게 패망하고, 김부식은 이에 그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하여 삼국사기를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동.북 두 부여를 떼어버려 조선문화가 유래한 곳을 진토(塵土) 속에 묻고 발해를 버려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을 초개(草芥)속에 던지고 이두문(吏讀文)과 한역(漢譯)의 구별에 어두워서 한 사람이 몇 사람이 되고 한 곳이 몇 군데가 된 것이 많으며, 내사(內史)나 외적(外籍)의 취사(取捨)에 홀려서 앞뒤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것이 많아 거의 사적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불행히 그 뒤 얼마 안 가서 고려가 몽고에 패햐여 흘필렬(忽必烈:쿠빌라이)의 위풍이 전국을 놀라게 하여 황궁(皇宮)이니 제궁(帝宮)이니 하는 명사(名詞)들이 철폐되고, 해동천자(海東天子)의 팔관악부(八關樂府)가 금지되고, 이로부터 만일 문헌에 독립자존(獨立自存)에 관한 것이 있으면 일체 꺼려 피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때라 허다한 역사 저서 중에서 유일한 사대사상의 고취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그에 딸려 있는 삼국유사만이 전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 당대의 사승(史乘)을 말한다면, 고려 말엽에 임금과 신하들이 고종(高宗)이전의 나라 형세가 강성하던 때의 기록은 더욱 몽고의 꺼리고 싫어함에 걸릴까보아 두려워서 깍아버리거나 고치고, 오직 말을 낮추고 후한 예폐(禮幣)로 북쪽 강대국들에게 복종하여 섬기던 사실만을, 혹은 부연하고 혹은 지어내서 민간에 퍼뜨렸다. 이러한 기록들이 곧 이조의 정인지(鄭麟趾)가 찬술한 고려사(高麗史)의 원전이 되었고, 이조 세종(世宗)이 비상하게 사책(史冊)에 유의하였으나, 다만 그의 할아버지인 태조(太祖)와 아버지인 태종(太宗)이 호두재상(虎頭宰相) 최영(崔塋)의 북벌군 중에서 모반하여 사대(事大)의 기치를 들고 혁명의 기초를 세웠으므로 권근(權近).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조선사략(朝鮮史略)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을 편찬하게 함에 있어 몽고의 압박을 받던 고려 말엽 이전의 조선의 각종 실기에 의거하여 역사를 짓지 못하고 몽고의 압박을 받은 이후 외국에 아첨한 글과 위조한 고사에 의거하여 역사를 지어 구차스럽게 사업을 마치고, 정작 전대(前代:고려)의 실록은 민간에 전해짐을 허락하지 않고 규장각(奎章閣) 안에 비장해두었는데 임진왜란의 병화(兵火)에 죄다 타버렸다. 그 뒤에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의 자리를 빼앗고, 만주 침략의 꿈을 품고서 강계(江界)에 둔병(屯兵)을 경영하다가,

자기네 태조의 존명건국(尊明建國)의 주의에 충돌되어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간하는 일이 분분하고,
지나 대륙에 용맹하고 억센 명나라 성조(成祖)가 있어 조선에 대한 감시가 엄중하고,
마침내 명나라 사신 장영(張寧)이 엄중히 둔병의 이유를 힐문하므로,
세조의 그 무(武)를 숭상하고 공을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조선 문헌의 정리를 자임(自任)하여 불경을 간행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외에 사료의 수집에도 전력하여 조선 역대 전쟁사인 동국병감(東國兵鑑)과 조선 풍토사인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하고(동국병감은 文宗때, 여지승람은 成宗때 편찬), 그밖에도 허다한 서적을 간행하였으니 비록 큰 공헌은 없으나 얼마간 공적은 있었다 할 것이다. 선조(宣祖).인조(仁祖) 이후에는 유교계에 철학.문학의 큰 인물이 배출되고 사학계도 차차 진보되어 허목(許穆)의 단군.신라 등 각세기(世紀)가 너무 간략하기는 하나 왕왕 독특한 견해가 있으며, 유형원(柳馨遠)은 비록 역사에 관한 전문 저서가 없으나, 역대 정치제도를 논술한 반계수록(磻溪隋錄)이 또한 사학계에 보탬이 적지 않았으며,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설(東國地理說)이 비록 수십 줄에 지나지 않는 간단한 논문이지마는 일반 사학계에 큰 광명을 열어서 그 뒤 정약용(丁若鏞)의 강역고(彊域考)며, 한진서(韓鎭書)의 지리(地理)며,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木)에 실린 강역론(彊域論)이며, 그 밖의 조선 역사 지리를 설(設)하는 사람은 모두 한 선행의 그 간단한 지리설을 부연하였을 뿐이다.

나로서 보건데, 그 지리설 중에 삼한과 조선을 분리함이 범엽(范曄:後漢書의저자)이 전한 동이열전(東夷列傳)의 지리를 설명함에는 족하나, 이로써 조선 고대 3천 년 동안의 지리를 단정하여, “동국(東國)은 옛날부터 한강 이남을 삼한(三韓)이라 하고 한강 이북을 조선이라 하였다.” 라는 결론을 내렸음은 너무도 맹목적이요, 무단적 (武斷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선생이 삼신(三神) .삼경(三京) .삼한(三韓). 삼조선(三朝鮮).의 연락적 관계와 발조선(發朝鮮). 발숙신(發肅愼). 부여조선(夫餘朝鮮). 예맥조선(濊貊朝鮮). 진국(震國). 진번조선(眞番朝鮮). 진한(辰韓). 마립간(麻立干). 마한(馬韓). 모한(慕韓) 등이 동음이역(同音異譯)임을 몰랐으므로 이 같은 큰 착오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이열전에 보인 삼한의 위치는 선생이 비로소 간단명료하게 분석해서 밝혀 기왕에 역사의 기록만 있고 역사의 연구는 없었다고 할 만한 조선사학계에서 선생이 처음으로 사학의 실마리를 열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안정복은 평생을 열사 한 가지에만 노력한, 5백 년 이래 유일한 빈한한 선비로서 서적의 열람이 부족하여 삼국사기 같은 것도 그 늘그막에야 겨우 남이 베낀 틀린 글자가 많은 것을 얻어보았으므로 그가 저술한 동사강목에 궁예(弓裔)의 국호를 마진기(摩震紀)라 한 웃음거리를 남겼으며, 지나의 서적 중에서도 참고에 필요한 위략(魏略)이나 남제서(南濟書)를 같은 것이 있음을 몰라서 고루한 구절이 적지 아니하다.

게다가 시대에 유행하는 공구(孔丘:孔子)의 춘추(春秋)며, 주희(朱憙:朱子)의 강목(綱目)의 웅덩이에 빠져 기자본기(箕子本紀) 아래 단군과 부여를 덧붙이로 하였으며, 신라 마지막 판에 궁예와 왕건을 참주(僭主)로 한 망발도 있고 너무 황실 중심의 주의를 고수하여 정작 민족 자체의 활동을 무시함이 많았었다.

그러나 연구의 정밀하기로는 선생 이상 가는 이가 없었으므로 지지(地志)의 잘못의 교정과 사실의 모순의 변증(辯證)에 가장 공이 많다 하여도 좋을 것이다.

유혜풍(柳惠風)의 발해고(渤海考)는 대씨(大氏3백 년 동안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의 사업을 수록하여 1천여 년이나 사학가들이 압록강 이북을 베어버린 결함을 보충하였고 이종휘(李鍾?)의 수산집(修山集)은 단군 이래 조선 고유의 독립적 문화를 노래하여 김부식 이후 사학가의 노예 사상을 갈파하였는데, 특별한 발명과 채집(採集)은 없다 하더라도, 다만 이 한 가지만으로도 또한 영원히 남을 일이다.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는 오직 지나. 일본 등의 서적 가운데 보이는 우리역사에 관한 문자를 수집하여 거연히 방대한 저술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삼국사(三國史)에서 빠진 부여. 발해. 가락(駕洛). 숙신(肅愼) 등도 모두 한 편의 세기(世紀)를 구성하였으며,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없는 저근(姐瑾). 사법명(沙法名). 혜자(慧慈). 왕인(王仁) 등도 각각 몇 줄씩의 전기(傳記)가 있고 궁중어(宮中語). 문자. 풍속. 등의 부문이 있다.

게다가 그의 조카 한진서(韓鎭書)의 지리속(地理續)이 있어서 뒷사람들의 고증의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또한 역사학에 두뇌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다만,

너무 글자 사이에서 조선에 관한 사실을 찾다가 민족 대세의 관계를 잃었으니 곧 부루(夫婁)와 하우(夏禹)의 대 국제교제로 볼 오월춘추(吳越春秋)의 주신(州愼)의 창수사자(蒼水使者)와 2천 년 동안 흉노와 연(燕)과 삼조선(三朝鮮)이 혹은 화의하고 혹은 싸운 전후 큰 일들을 다 빠뜨렸고,
유교의 위력에 눌려 고죽국(孤竹國)이 조선족의 갈래임을 발견치 못하는 동시에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성명을 빠뜨렸고,
서적의 선택이 정확하지 못하였으니, 진서(晉書)의 속석전(束晳傳)에 의하면, “우(禹)임금이 백익(伯益)을 죽이고, 태갑(太甲)이 이윤(伊尹)을 죽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는 것이 죽서기년(竹書紀年)의 진본(眞本)이요, 현존한 죽서기년은 가짜인데, 이제 그 가짜를 그대로 기재하였으며,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무릉서(武陵書)는 당나라 사람의 위조인데, 그대로 신용하여 인용하였고, 이 밖에 지나인이나 일본인이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서 우리 나라를 속이고 모욕한 것을 많이 그대로 수입하였으니, 이것이 그 책의 결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조 일대의 일을 적은 역사로 말하면, 내가 일찍이 정종조(正宗朝) 한때의 기록을 엮은 수서(修書)라는 아주 잔글자로 쓴 2백 권의 거질(巨帙)을 보았었고, 만일 관서(官書)인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야첨재(朝野僉載) 등을 비롯하여 허다한 개인 저술의 역사서까지 친다면 몇 백의 수레에 찰 것이다.

 


이 태조(李太祖) 이하의 사실을 적은 역사로는 조야집요(朝野輯要)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 몇몇 책을 대강 훑어본 이외에는 자세히 다 읽어본 것이 없으므로 아직 그 낫고 못함을 말하지 못하거니와, 대개 열에 일고여덟이 사색(四色)의 당쟁사(黨爭史)임은 단언할수 있을 것이니 아, 이조 이래 수백 년 동안의 조선인의 문화사업은 이에 끊어졌도다.

이상에 열거한 역사서를 다시 말한다면 대개가 정치사요, 문화사에 해당하는 것은 몇이 못 됨이 첫째 유감이요,

정치사 중에서도 동국통감, 동사강목 이외에는 고금을 회통한 저서가 없고, 모두 한 왕조의 흥하고, 망한 전말로 글의 수미(首尾)를 삼았음이 유감이요,

공구의 춘추(春秋)를 역사의 절대적인 준칙으로 알아 그 의례를 본받아서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누르기를 위주하다가 마지막에는 자기나라까지 비방하는 편벽된 논란을 벌임이 셋째 유감이요,

국민의 자감(資鑑)에 이바지하려 함보다 외국인에게 아첨하려 한 의사가 더 많고(李修山 일파를 제하고) 자기 나라의 강토를 조각조각 베어주어 마지막에 가서는 건국 시대의 수도까지 모르게 만들었음이 넷째 유감이다.

우리의 사학계가 이와같이 눈멀고, 귀먹고, 절름발이 등 온갖 병을 죄다 가져서 정당한 발달을 얻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너무 자주 내란과 외환(비교적 오래 편안했던 이조 일대는 제하고)과 자연의 재난이 잦았던 것은 그만두고라도 인위(人爲)의 장애를 이룬 것을 들건대,

1) 신지(神誌) 이래의 역사를 비장해두는 버릇이 역사의 고질이 되어 이조에서도 중엽 이전에는 동국통감, 고려사 등 몇몇 관에서 간행한 책 이외에는 사사로이 역사를 짓는 것을 금하였으므로 이수광(李?光)은 내각에 들어가서야 고려 이전의 비사(秘史)를 많이 보았다 하였고 이언적(李彦迪)은 사벌국전(沙伐國傳)을 지어가지고도 친구에게 보임을 꺼려했다. 당대 왕조의 잘잘못을 기록하지 못하게 함은 다른 나라에도 간혹 있거니와, 지나간 고대의 역사마저 사사로이 짓거나 읽는 것을 금함은 우리 나라에만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를 읽는 이가 별로 없었고,

2) 송도(松都)를 지나다가 만월대(滿月臺)를 쳐다보라. 반쪽의 기와가 남아 있는가? 한 개의 주초가 남아 있는가? 막막히 넓은 밭에 이름만 만월대라 할 뿐이 아닌가? 슬프다, 만월대는 이조의 아버지뻘로 멀지 않은 고려조의 대궐인데, 무슨 병화에 탔다는 설도 없이 어찌 이와같이 정(情)이 없는 빈터만 남았는가?

이와 똑같은 예로서 부여에서 백제의 유물을 찾아볼 수 없으며, 평양에서 고구려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이에서 나오는 결론은 뒤에 일어난 왕조가 앞의 왕조를 미워하여 역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파괴하고, 태워버리기를 위주한 것이다. 신라가 일어나매 고구려.백제 두 나라 역사가 볼 것이 없게 되었고, 고려가 되매 신라의 역사가 볼 것이 없게 되었으며, 이조가 대신하메 고려의 역사가 볼것이 없게 되어 매양 현재로서 과거를 계속하려 아니하고 말살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에 쓰일 자료가 박약해졌으며,

3) 현종(顯宗)이, “조총(鳥銃)의 길이가 얼마나 되오?”하니, 유혁연(柳赫然)이 두 손을 들어, “이만합니다.”하고 형용하였다. 기주관(記注官:기록을 맡은 관리)은 그 문답한 정형(情形)을 받아쓰지 못하고 붓방아만 찧고 있었다. 유혁연이 그를 돌아보며, “전하께서 유혁연에게 조총의 길이를 물으시니(相問鳥銃之長於柳赫然) 혁연이 손을 들어, ”자, 남짓이 하고 이만합니다,“고 대답하였다(然擧手尺餘以對曰如是)라고 쓰지 못하느냐?” 하고 구짖었다, 숙종(肅宗)이 박태보(朴太輔)를 친히 문초하는데, “이리저리 잔뜩 결박하고 뭉우리돌로 때려라.”하니, 주서(注書) 고사직(高司直)이 서슴없이, 필(必)자 모양으로 결박하여 돌로 때려라(必字形縛之無隅石擊之).“라고 썼다 그래서 크게 숙종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들이 궁정의 한 가화(佳話)로 전하는 이야기이지마는, 반면에 남의 글로 내 역사를 기술하기 힘듦을 볼 것이다. 국문이 늦게 나오기도 했지마는, 나온 뒤에도 한문으로 저술한 역사만 있음이 또한 기괴하다. 이는 역사 기록의 기구가 부족함이요,

4) 회재(晦齋:李彦迪)나 퇴계(退溪:李滉)더러 원효나 의상의 학술사상(學術史上) 위치를 물으면 한 마디의 대답을 못 할 것이요, 원효와 의상에게 소도(蘇塗:솟대)나 내을(奈乙:박혁거세의 탄생지)의 신앙적 가치를 말하면 반분의 이해를 못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조의 인사들이 고려 시대의 생활의 취미를 모르며, 고려나 삼국의 인사들은 또 삼한 이전의 생활의 취미를 모를 만큼 반식(飯食). 거처(居處). 신앙. 교육 등 일반 사회의 형식과 정신이 모두 몹시 변하여 오늘의 아메리카 사람으로 내일 러시아 사람됨과 같은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 이는 역사 사상의 연락이 끊어짐이라, 어디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구명할 동기가 생기랴? 이상 몇 가지 원인으로 하여 우리의 역사학이 올바르게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3백 년 동안 사색(四色)의 당파 싸움이 크게 국가에 해를 끼쳤다 하지마는, 당론이 극렬할수록 제각기 나는 옳고 저는 그르다는 것을 퍼뜨리기 위하여 사사로운 기술이 성행하고 당의 시비가 매양 국정에 관계되므로 따라서 조정의 잘잘못을 논술하게 되어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사사로운 저작의 금지가 깨뜨려져서 마침내 한백겸. 안정복. 이종휘. 한치윤 등 사학계에 몇몇 인물이 배치되었음도 그 결과이다.

혹 어떤 이는, “사색 이후의 역사는 피차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어 그 시비를 가릴 수가 없어서 가장 역사의 난관이 된다.”고 하지마는, 그들의 시비가 무엇인가 하면 아무 당이 이조의 충신이니, 역적이니, 아무 선생이 주자학의 정통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들뿐이라,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서릿발 같은 칼을 휘둘러 임금의 시체를 두 동강이 낸 연개소문을 쾌남아라 할 것이요,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여 명륜당(明倫堂) 기둥에 공자를 비평한 글을 붙인 윤백호(尹白湖)를 걸물(傑物)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냉정한 두뇌로써 회재.화담(花潭:徐敬德). 퇴계.율곡(栗谷:李珥) 등의 학술상 공헌의 많고 적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자학의 정통이 되고 안 됨은 희담(戱談)이 될 분이요, 노론(老論).소론(少論).남인(南人).북인(北人)의 다툼은 그 정치상에 미친 영향의 좋고 나쁨을 물을 뿐이며, 이조의 충성된 종 되고 못 됨은 잠꼬대에 지나지 않을 뿐이요, 개인의 사사로운 덕의 결점을 지적하여 남의 명예를 더럽히고 혹은 애매한 사실로 남을 모함하여 죽인 허다한 사건들은 그 반면에 있어서 당시 사회 알력의 나쁜 습속으로 국민과 나라를 해친 일종의 통탄할 사료가 될 뿐이다.

만일 시어머니의 역정과 며느리의 푸념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일에 낱낱이 재판관을 불러 그 굽고 곧음을 판결하려 한다면 이는 스펜서의 이른바 이웃집 고양이 새끼 낳았다는 보고 같아서 도리어 이로써 사학계의 다른 중대한 문제를 등한히 할 염려가 있으니, 그냥 던져둠이 옳다. 그리고 빨리 지리 관계라든가, 국민생활 관계라든가, 민족의 성쇠라든가 하는 큰 문제에 주의하여 잘못을 바로잡고 참된 것을 구하여 조선 사학계의 표준을 세움이 급무 중의 급무라 생각한다.

 

 

 

[조선상고사 (총론) / 제3장 구사(舊史)의 종류와 그 득실의 간략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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