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용한 지식 칼럼/역사&사건

엘리자베스 블랙웰 - 최초의 여의사, 투표로 의대에 들어가다

2017. 8. 11.

[엘리자베스 블랙웰 - 최초의 여의사, 투표로 의대에 들어가다]


미국 최초의 여의사 엘리자베스 블랙웰이 의과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입학을 결정하기 위해서 의과학생들이 투표를 하고 나서야 가능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패미니즘적 관점이나 개인의 성공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차별과 기회의 평등에 관한 역사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유리벽은 양성이든 계층이든 집단이든, 어디서도 위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의 순서]

1. 최초의 여의사와 의대 투표

2.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일생

3. 퀘이커교와 의료 현실의 문제점






최초의 여의사와 의대 투표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1849년 미국 최초의 여의사가 된 사람입니다. 블랙웰이 최초의 공식 전문의가 된 것은 여권신장 뿐 아니라, 차별에서 기회의 평등을 만들었다는 것에서 의의가 큽니다. 그 이전까지는 유리벽이 매우 높아서 여자가 의사 같은 책임감 있는 직업을 갖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여기에 도전한 사람이 엘리자베스 블랙웰과 그 동생 '에밀리 블랙웰'이고, 에밀리도 세 번째 여의사가 되었습니다. 


사진: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초상화. 양성불평등의 유리벽을 이겨내고 첫 여성 의사가 되었다. 의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재학생들의 찬반 투표를 받은 일화가 유명하다. [최초의 여의사와 의대 투표](사진: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초상화. 양성불평등의 유리벽을 이겨내고 첫 여성 의사가 되었다. 의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재학생들의 찬반 투표를 받은 일화가 유명하다. [최초의 여의사와 의대 투표] / ⓒ Joseph Stanley Kozlowski)


블랙웰은 어릴 적에 '해리엇 빗처 스토우'를 만나 여자도 꿈을 가지고 직업을 선택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스토우는 유명한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여류소설가입니다. 이 소설은 노예문제를 제기하여 미국이 흑인의 인권을 보장하고 노예해방의 문을 여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 동생 에밀리도 그런 언니를 보면서 깨닫는 삶을 살게 되고, 이후에도 엘리자베스 블랙웰에게 큰 도움을 주면서 병원 일을 하게 됩니다. 


사진: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동생 에밀리 블랙웰의 사진. 의대에 들어가기 쉽지 않은 시대에 역경을 이겨내고 세 번쨰 여성 의사가 되었다. 언니와 함께 병원사업 등을 하였다. [최초의 여의사와 의대 투표](사진: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동생 에밀리 블랙웰의 사진. 의대에 들어가기 쉽지 않은 시대에 역경을 이겨내고 세 번쨰 여성 의사가 되었다. 언니와 함께 병원사업 등을 하였다. [최초의 여의사와 의대 투표] / ⓒ findagrave.com)


하지만 의사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해 온 그녀에게 최초의 여의사가 되는 길을 쉽지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이 입학하려는 대학들은 여자가 의대에 들어온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847년 뉴욕의 '제네바 의과대학'에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재학생들도 참여한 투표를 통해서 입학을 결정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투표에서 부결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공평한 모양새를 만들겠다는 심산이었습니다. 


사진: 엘리자베스 블랙웰이 입학을 결정하기 위해 찬반투표를 했던 것으로 유명한 뉴욕의 제네바 의과대학. 1800년대의 모습이다. [최초의 여의사와 의대 투표](사진: 엘리자베스 블랙웰이 입학을 결정하기 위해 찬반투표를 했던 것으로 유명한 뉴욕의 제네바 의과대학. 1800년대의 모습이다. [최초의 여의사와 의대 투표] / ⓒ wikipedia.org)


그러나 재학생들은 장난삼아 찬성표를 던졌고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의외의 찬성 속에 입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의대생활은 잘 이루어졌습니다. 몇몇 보수적인 사람들은 해부학 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하기도 했지만, 자신들보다 나이 많은 그녀를 누나처럼 따르며 공부하는 학생들도 많았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녀는 뉴욕 제네바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여자 의사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일생


블랙웰의 국적은 영국입니다.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 등에서 활동하다가 영국에 가서 사망했습니다. 어릴 때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가정은 무려 9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매우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아들 딸 차이를 두지 않고 가정교사를 고용해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이들은 기독교의 한 종류인 '퀘이커교'를 믿었는데 영국에서는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사진: 퀘이커교의 예배 모습. 최초의 여자 의사가 된 그녀의 가정은 독실한 퀘이커교도였다. 이들은 진보적이며 명상을 하고 사회를 위해 선을 행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일생](사진: 퀘이커교의 예배 모습. 최초의 여자 의사가 된 그녀의 가정은 독실한 퀘이커교도였다. 이들은 진보적이며 명상을 하고 사회를 위해 선을 행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일생] / ⓒ Thomas Rowlandson)


10대 초반에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 이곳저곳을 이사하며 살던 중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언니 '안나', '매리언'과 함께 작은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의사가 될 꿈을 가진 엘리자베스는 틈틈이 의학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정식으로 의대에 진학할 계획이었지만 대학들은 성차별이 심해서 그녀를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사진: 의사는 상위층 직종이지만 여기에도 양성차별의 유리벽은 존재한다고 한다. 하지만 하위층의 유리벽은 더 심하고 광범위해서 의사 차별보다도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일생](사진: 의사는 상위층 직종이지만 여기에도 양성차별의 유리벽은 존재한다고 한다. 하지만 하위층의 유리벽은 더 심하고 광범위해서 의사 차별보다도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일생] / ⓒ Yerson Retamal)


제네바 의대에 입학한 것도 주민들은 놀라워하며 쳐다봤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병원들은 그녀를 의사로 취업시켜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프랑스 등으로 산부인과 연수를 돌았습니다. 

하지만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신생아를 돌보던 중, 임질성 안염에 감염되어 안구 제거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다시 뉴욕에 돌아왔지만 역시 취업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여성, 어린이 병원을 개업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최초의 여자 의사가 된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노년의 모습. 빈민의 아이를 양녀로 들여서 여생을 마칠 때까지 함께 했다고 한다. 그녀가 기르던 강아지들과의 가족사진인 셈이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일생](사진: 최초의 여자 의사가 된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노년의 모습. 빈민의 아이를 양녀로 들여서 여생을 마칠 때까지 함께 했다고 한다. 그녀가 기르던 강아지들과의 가족사진인 셈이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일생] / ⓒ 미상)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사회활동도 하였습니다. 빈민 진료소를 열었고 동생 에밀리와 함께 여성의과대학도 설립했습니다. 영국에서 친분을 쌓은 '나이팅게일'과 함께 '국립보건협회'를 창설한 뒤, 여성 의과학교도 설립했습니다. 

특히 남북전쟁 중의 활약은 뛰어나서, 구호협회를 창립하여 미국보건위생위원회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그녀는 최초의 여의사로서 여성 인권의 향상 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공헌하는 많은 일을 하여, 후대의 의대생들에게도 모범이 되었다고 합니다. 





퀘이커교와 의료 현실의 문제점


미국은 인권선진국처럼 보이지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정치 투표에 있어서 흑인 '참정권'을 인정한 것은 1870년입니다. 그런데 여성참정권은 그 보다고 훨씬 후인 1920년에야 가능했습니다. 그만큼 보수적인 국가란 뜻입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부모는 퀘이커교도였습니다. 기독교의 청도교 중에서도 좌파인 퀘이커교는 다른 교파와 달리, 인간 내면에는 선한 면이 있으므로 이를 잘 길러내면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진: 최초의 여의사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퀘이커교의 교리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노예해방을 지지했으며 빈민 사업을 했고 진보적인 삶을 살았다. [퀘이커교와 의료 현실의 문제점](사진: 최초의 여의사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퀘이커교의 교리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노예해방을 지지했으며 빈민 사업을 했고 진보적인 삶을 살았다. [퀘이커교와 의료 현실의 문제점] / ⓒ NewTestLeper79)


그래서 퀘이커교는 선한 일을 위해서 노예해방, 여성권익 등에 적극적이었고, 종교단체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도 퀘이커교를 믿었기 때문에 노예해방과 여성인권 등을 지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봉사적 가정교육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기에, 그녀는 최초의 여의사가 되어 남북전쟁 때 부상병을 보호하는 봉사를 하고, 빈민 진료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뉴욕 제네바 의과대학의 공고. 아래쪽을 보면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이름이 보인다.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기 위해 찬반 투표를 통해 입학하는 역사가 담긴 공문이다. [퀘이커교와 의료 현실의 문제점](사진: 뉴욕 제네바 의과대학의 공고. 아래쪽을 보면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이름이 보인다.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기 위해 찬반 투표를 통해 입학하는 역사가 담긴 공문이다. [퀘이커교와 의료 현실의 문제점] / ⓒ 국립의학도서관)


그리고 한 가지 더 함께 생각해 볼 것은, 지방보건의의 운영입니다. 현재 의사의 도시 집중률은 94%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방보건의 제도를 운영하고, 그 인원 중에는 병역의 의무를 지는 군인 의무병도 투입됩니다. 

그런데 인구 감소로 입대자가 줄어드는데다가 여의사 비율이 30%를 넘어서고 의학대학 여성 비율이 50%에 근접하면서 지방보건의 운영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다른 분쟁국가와 달리 한국은 병역의 여성제외 제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여의사가 자발적으로 사회봉사를 하지 않는 한 국가가 의료자원을 활용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상위층인 의료계에서도 유리벽이 존재하는데, 엘리자베스 블랙웰처럼 도전하고 유리벽을 깨는 모습은 점점 줄어들고 편하고 돈 잘 버는 직업으로 안착하려는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퀘이커교와 의료 현실의 문제점](사진: 상위층인 의료계에서도 유리벽이 존재하는데, 엘리자베스 블랙웰처럼 도전하고 유리벽을 깨는 모습은 점점 줄어들고 편하고 돈 잘 버는 직업으로 안착하려는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퀘이커교와 의료 현실의 문제점] / ⓒ Yerson Retamal)


또한 야간진료 등의 과중한 업무에서 육아와 가사를 이유로 여의사는 빠지고, 남의사에게 전담되는 비율이 매우 높습니다. 심지어 큰 병원은 산부인과에서도 이런 문제점이 종종 발생합니다. 하지만 정작 여의사의 30%는 아이를 낳을 계획이 없다고 합니다. 

의사라는 직업을 그저 개인의 돈벌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이해 못하겠지만, 사회적 직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넓은 시각이 있다면 양성이 동등하게 사회봉사에 참여하게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점에도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키스세븐지식은 키스세븐과 그룹 사이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