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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지식 칼럼/역사&사건

마산 여양리 뼈무덤 - 여양리 학살사건(보도연맹 학살사건)

2017. 8. 19.

[마산 여양리 뼈무덤 - 여양리 학살사건(보도연맹 학살사건)]

2004년, 마산 여양리 뼈무덤 발견 소식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발굴 결과, 이들은 1950년에 있었던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피해자들이었습니다. 좌우익의 혼란 중에 공산당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까지 한국전쟁 중에 대량으로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국가에 의해 자행된 여양리 학살사건은 왜 일어났는지 역사를 따라가 봅니다. 




[글의 순서]

1. 마산 여양리 뼈무덤 발굴과 보도연맹 학살사건

2. 여양리 학살사건 뼈무덤의 사연

3.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진실





마산 여양리 뼈무덤 발굴과 보도연맹 학살사건


2002년에 온 태풍 '루사'로 인해 경남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둔덕마을 산태골에서는 무더기 유골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2004년 마산 여양리 뼈무덤 발굴은 160여 명이 총살을 당한 후 처참하게 매장 당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1950년 7월, 피해를 당한 민간인들은 트럭 등에 실려서 여양리 골짜기로 강제 이동되었습니다. 점심시간의 학생들도 이들을 봤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그들은 산속으로 분산되어 끌려간 후 총살에 의해 학살당하고 확인사살까지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사진: 마산 여양리 학살사건은 160여 구가 넘는 유골과 실탄 자료 등이 발견되며 학살의 잔혹함을 다시 보여주었다. [마산 여양리 뼈무덤 발굴과 보도연맹 학살사건](사진: 참고사진. 마산 여양리 학살사건은 160여 구가 넘는 유골과 실탄 자료 등이 발견되며 학살의 잔혹함을 다시 보여주었다. [마산 여양리 뼈무덤 발굴과 보도연맹 학살사건] / ⓒ Rudy and Peter Skitterians)


마산 여양리 학살사건은 1950년대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벌어졌던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일부입니다. 전국적인 규모로 자행된 이 학살사건으로 인해 남한에서는 약 20만 명 이상의 보도연맹 가입원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제노사이드(Genocide)는 북한이 턱밑까지 내려온 1950년 7월 전후에 집중적으로 자행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인구가 약 160만 명, 부산인구가 약 80만 명이었으니 서울인구의 1/8, 부산인구의 1/4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사진: 한국전쟁에서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20만 명이 이상이 대량학살 당한 제노사이트였다. 6.25전쟁의 비극. [마산 여양리 뼈무덤 발굴과 보도연맹 학살사건](사진: 한국전쟁에서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20만 명이 이상이 대량학살 당한 제노사이트였다. 6.25전쟁의 비극. [마산 여양리 뼈무덤 발굴과 보도연맹 학살사건] / ⓒ Korea_Geojedo_POW_Camp_Historic_Park)


마산 여양리 뼈무덤은 수많은 학살 장소 중 하나일 뿐일 정도로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대의 학살사건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승만의 독재 시도를 막아낸 후 민주당 정부에서 다시 조사를 하려고 했지만, 박정희 정부가 쿠데타로 들어서며 그냥 엎어버렸습니다. "피해자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반대세력이 이 틈을 타고 혼란을 일으킬 것이니 남북 평화시대가 오면 그때 가서 해결하라"는 말 뿐이었습니다. 마산 여양리 학살사건 피해자의 가족들은 더 이상 할 것이 없었습니다.


사진: MBC 뉴스방송 캡처. 2004년 마산 여양리 학살사건의 유공들을 발굴한 장면이 방송으로 보도되었다. [마산 여양리 뼈무덤 발굴과 보도연맹 학살사건](사진: MBC 뉴스방송 캡처. 2004년 마산 여양리 학살사건의 유공들을 발굴한 장면이 방송으로 보도되었다. [마산 여양리 뼈무덤 발굴과 보도연맹 학살사건] / ⓒ MBC경남)


마산 여양리 뼈무덤은 M1 소총에 의해 대량 살해된 피해자들의 유골이었습니다. 이 같은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제2공화국과 노무현 정부 때 진상조사가 시도되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과거 정부를 대신해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과거 대한민국의 역사 흐름을 보면 진보주의나 개혁 정부는 진상규명과 함께 관심을 가져왔으나, 보수정권들은 이 사건을 덮거나 모른 척하려고 했었습니다. 지금도 보수주의 일부에서는 이 행위를 정당화시키려는 자들이 있어서 논란이 되곤 합니다. 





여양리 학살사건 뼈무덤의 사연


보도연맹이란 '국민보호선도연맹'의 줄임말로, '오제도' 등의 이승만 정부 인사들이 남로당원 관리를 목적으로 만든 단체입니다. 오제도는 검사, 정치인 등을 거치며 1990년대까지 보수우익에서 활동하던 사람입니다. 

1948년 '여수반란사건'이 발생하자 이승만 정부는 남한 내 공산주의자를 모두 제거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박정희 전 대통령도 공산주의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붙잡혔습니다. 수사관들이 들여 닥쳤을 때 박정희는 암살용 총을 만들기 위해 총번호를 줄 톱으로 지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진: 백년전쟁 영상 캡처. 프레이저 보고서인가 아닌가의 논란이 있는 장면지만, 박정희가 당시 빨갱이로 체포되어 유죄를 인정받은 것은 사실이다. [여양리 학살사건 뼈무덤의 사연](사진: 백년전쟁 영상 캡처. 프레이저 보고서인가 아닌가의 논란이 있는 장면지만, 박정희가 당시 빨갱이로 체포되어 유죄를 인정받은 것은 사실이다. [여양리 학살사건 뼈무덤의 사연] / ⓒ 백년전쟁)


여세를 몰아서 이승만 정부는 1949년 좌익 활동을 했었던 사람들에게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국민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홍보를 하며 가입자를 모았습니다. 이들은 사상검증을 위해 불려나와 재확인을 받았고, 교육 중 매질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마산 여양리 뼈무덤에 매장된 사람 중에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는 것은, 보도연맹 가입자 모집이 경찰서와 공무원마다 할당제였기 때문입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피해자인 마산 여양리 학살사건의 피해자들도 그들을 믿고 연맹에 가입했을 것입니다. 


사진: 한국전쟁에 참전한 한 미군이 찍은 사진.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장면이다. 여양리 뼈무덤에서 160구가 발견되었고 전국적으로는 20만 명 이상이 살해당했다. [여양리 학살사건 뼈무덤의 사연](사진: 한국전쟁에 참전한 한 미군이 찍은 사진.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장면이다. 여양리 뼈무덤에서 160구가 발견되었고 전국적으로는 20만 명 이상이 살해당했다. [여양리 학살사건 뼈무덤의 사연] / ⓒ US Army)


공무원뿐만 아니라 동네 이장들도 할당된 인원을 모으기 위해 가입하면 쌀을 주겠다고 꼬시기도 했고, 심지어 10대 학생도 가입을 시켰었다고 합니다. 마산 여양리 뼈무덤의 유골은 이렇게 모집된 피해자들입니다. 

1년도 안 되서 33만 명이나 가입한 것은 당시에 문맹률이 높았던 것도 한몫했고 배가 고팠던 시절이라는 것도 한몫했습니다. 당시 경찰관의 증언에 의하면, 남로당원이 아닌 줄 알면서도 정부에서 많이 모으라니까 가입시킨 경우가 허다했다고 합니다. 


사진: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주는 국민보도연맹증의 앞면과 뒷면. 이들의 대다수는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지만 공무원 할당제 때문에 가입한 사람들이었다. [여양리 학살사건 뼈무덤의 사연](사진: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주는 국민보도연맹증의 앞면과 뒷면. 이들의 대다수는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지만 공무원 할당제 때문에 가입한 사람들이었다. [여양리 학살사건 뼈무덤의 사연] / ⓒ 대한민국 정부)


마산 여양리 학살사건의 피해자 중에서 누가 진짜 공산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인지도 알 수가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정부가 보도연맹을 만든 진짜 이유는 좌익분자들을 관리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수의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순진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6.25가 터져서 북한군이 몰려와도 서울 시민을 구호하기 위한 활동을 도왔다고 합니다. 

마산 여양리 뼈무덤의 피해자들도 정부에서 모이라고 하니까 순순히 모여서 가자는 데로 끌려갔다가 총살을 당했습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적은 추산이 20만 명이고 최대 추산은 120만 명에 이릅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진실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주는 연맹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감시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제거해야할 대상이라고 처음부터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6월에 터진 6.25전쟁은 북한군이 물밀듯이 내려와서 겨우 낙동강 전선에서 버티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는 몇몇 보도연맹원이 북한 편을 들며 배신을 했다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전국 20만여 명 중에 몇몇이 배신을 한 것을 가지고 정부는 어차피 배신할 자들이니 모두 처형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처음부터 예견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사진: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촬영한 보도연맹 학살사건 사진. 죽음을 앞두고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이 슬프다. 마산 여양리 뼈무덤은 지금까지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진실](사진: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촬영한 보도연맹 학살사건 사진. 죽음을 앞두고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이 슬프다. 마산 여양리 뼈무덤은 지금까지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진실] / ⓒ US Army)


그렇게 해서 2개월 밖에 안 되는 동안에 20만 명을 빨갱이라고 학살해 버린 것이 보도연맹 학살사건이고 그 중의 하나가 마산 여양리 학살사건입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일사분란하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전국에서 학살하려면 정부 상부로부터의 조직적인 명령이 없이는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즉, 정부가 일부러 학살을 자행했다는 얘기입니다. 당시 정부는 100명이 중에 단 한 사람만 빨갱이라면 100명을 다 죽여야 안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산 여양리 뼈무덤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사진: 참고사진. 방치되어 오래된 유골들은 참혹하다. 마산 여양리 뼈무덤에서 발견된 유골들은 지금 사유지에 세워진 임시 컨테이너에 방치되어 있다고 한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진실](사진: 참고사진. 방치되어 오래된 유골들은 참혹하다. 마산 여양리 뼈무덤에서 발견된 유골들은 지금 사유지에 세워진 임시 컨테이너에 방치되어 있다고 한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진실] / ⓒ StockSnap)


그러나 그 후, 어느 누구도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997년 제대로 된 진보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보수정부에서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보수우익에서 사상논쟁을 벌이며 반대파들을 종북이라고 뒤집어씌우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보수우익에서는 당시 몇몇의 배신자를 예를 들며, 20만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다 빨갱이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70년이 지나도 발전이 없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오마이뉴스 윤성효의 마산 여양리 뼈무덤 보도사진. 여양리 학살사건이 지난지 50여년 만에 햇빛을 본 유골들이다. 그 자손들은 지금도 억울해 하고 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진실](사진: 오마이뉴스 윤성효의 마산 여양리 뼈무덤 보도사진. 여양리 학살사건이 지난지 50여년 만에 햇빛을 본 유골들이다. 그 자손들은 지금도 억울해 하고 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진실] / ⓒ 윤성효)


이것은 아직도 일베 등 보수우익에서 비슷한 양상인데, 국가가 필요하다면 빨갱이 민간인 학살은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가 나오곤 합니다. 마산 여양리 학살사건을 보는 핵심은, 국가에 의한 자국민의 학살은 누가 봐도 정당해지지 않는다는 역사 시각이어야 합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한 그들의 주장처럼 빨갱이였으니 학살이 당연하다는 사람들은 자기 가족이 떼죽음을 당해도 똑 같은 말을 할 수 있는지, 자신이 학살돼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양리 뼈무덤의 피해자 같은 사람들이 미래에도 다시 발생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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