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최초의 서양화가 - 나혜석거리의 페미니스트 "여자도 사람이외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은 어쩌면 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스트이며, 우리나라 최초로 유럽여행을 한 여성이기도 합니다.
나혜석은 최린, 이광수, 김우영과의 만남도 화제거리였습니다. 그녀를 기념하는 수원의 나혜석거리와, 일제강점기에 시대를 앞서간 여성의 이야기를 추적해 봅니다. 그녀의 말, "여자도 사람이외다"와 함께....
[ 글의 순서 ]
1. 최고의 삶을 살았던 나혜석
2. 여자도 사람이외다. 저항과 불륜
3. 불행하게 사라져간 나혜석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의 엘리트 시기
나혜석은 서양화가이며 문학 작가이며 조각가이고 여성운동가이며 사회운동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불리는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습니다. 현대에 와서 수원에서는 이를 기념하고자 효원공원 인근에 나혜석거리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조부 때부터 관직에 있어서 집안이 부유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딸을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조선말의 시기임에도 어릴 때부터 교육을 시켰습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학업과 미술을 다 잘했다는데, 졸업할 때는 수석까지 차지해서 신문에 나올 정도였습니다. 당시에는 여학생이 많지 않으니 흔치 않은 일입니다.
성인이 된 나혜석은 오빠들이 공부하고 있는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갔습니다.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조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서양화를 배운 나혜석은 최초의 서양화가의 길을 시작합니다. 또한 동인지 활동을 하며 "가부장제도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여성도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주장의 글도 썼습니다.
일본에서 서양문물을 접하고는 여성의 지위에 대한 '여성해방론'에 심취하게 되었고, 오빠가 빈민촌 사회운동을 하는 것을 보며 봉사활동에도 눈을 떴습니다. 이때 첫사랑 최승구를 만났으며 춘원 이광수와도 잠시 사귀었습니다.
귀국한 후에는 미술교사를 하며 계몽소설을 썼습니다. 나혜석의 소설 '경희'는 한국 최초의 페미니즘 문학으로 평가됩니다. '경희'는 춘원 이광수의 '무정'보다도 인기가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나혜석의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타이틀 뒤에는 소설, 희곡, 논설, 시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인 문학 작가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혜석은 인터뷰에서 "조선 여자도 사람이 될 욕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도쿄 유학생들과 함께 '2.8 독립선언'에도 참여했습니다. 귀국한 뒤에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3.1운동으로 인해 체포되었을 때, 변호사를 맡은 사람이 김우영이었고 풀려난 후 결혼을 하게 됩니다. 나혜석은 '삼천리'에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고 신문에 만화를 연재하는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나혜석이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을 때는 5000명이 몰릴 정도로 인기를 모았으며 그림은 고가에 거래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인지 '폐허'에 참여하고 여성들을 위해 야학도 열었습니다. 남편이 외교관이 되어 만주로 갔을 때, 나혜석은 김원봉에게 자금을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아기를 낳은 후 양육의 어려움을 표현한 글에서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강요된 교육이다"라는 문구 때문에 비판이 있기는 했지만, 엘리트 코스로 인생을 살아가는 나혜석의 삶은 풍요로웠습니다.
1920년대에는 남편을 따라 조선 여성 최초로 유럽, 미국, 러시아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여행은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의 작품이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렘브란트 등 거장의 그림을 직접 보고 인상파, 야수파에 감동하였으며, 이 기간의 나혜석의 화풍은 실제로 그러한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페미니스트 나혜석과 최린의 불륜
나혜석의 아버지는 차별 없이 교육하는 사람이었지만, 당시의 다른 부유층처럼 첩이 여럿 있었습니다. 나혜석은 이 때문에 힘들어 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라며 가부장제도의 모순에 의문을 가지며 컸습니다. 1910년대에 나혜석이 일본에서 유학 중일 때 현모양처를 강요하는 모순에 대한 글을 썼었는데, 이때도 고국의 아버지가 첩을 새로 얻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입니다.
그러던 중 나혜석은 첫사랑에 빠집니다. 그는 오빠 친구인 최승구였는데 조선에 본처를 두고 유학을 온 사람이라서 오빠가 반대했습니다. 최승구는 귀국하여 이혼을 원했지만 조강지처를 버리면 안 된다는 집안 어른들의 강한 반대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혜석은 최승구와 약혼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행동이 양가집 규수의 행실에서 오점일 수 있지만 나혜석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승구는 폐병에 걸려 있었고 25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나혜석에게는 매우 큰 정신적 충격이었기에 잠시 유학을 접었었으나 몇 년 후 다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때 오빠 친구인 '김우영'을 알게 되었고 짧은 기간 춘원 '이광수'와도 사귀었습니다. 하지만 이광수도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오빠가 심하게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 후 1919년 3.1운동에서 김우영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나혜석을 위해 변호하며 결혼을 승락받았습니다.
나혜석은 결혼을 승낙하며 네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평생 사랑할 것", "그림을 방해 말 것", "시어머니와 따로 살 것", "첫애인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입니다.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청첩장도 신문광고를 통해 돌렸습니다. 김우영은 모든 것을 받아 들였고, 실제로 신혼여행을 첫사랑의 묘지가 있는 전남 고흥으로 가서 묘비를 세워주었습니다.
그리고 1920년대, 남편과의 유럽 여행은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에게 큰 성장의 시간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시련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법률공부를 위해 베를린으로 가는 남편이 친구 '최린'에게 나혜석을 부탁했는데, 바람을 피게 된 것이었습니다.
최린은 3.1운동에서 천도교 대표로 참가했던 인물입니다. 나혜석과 최린의 불륜은 한인사회에서 소문으로 번지며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나혜석은 최린에게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혼은 하지 않겠다고 했었습니다. 친구와의 편지글에서도 "다른 남자와 사귀면 남편과 더 잘 지내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었습니다.
귀국한 후 나혜석은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는데, 그 고민을 최린과 계속 편지로 주고받았습니다. 결국 1930년대에 이혼을 요구하게 됩니다. 나혜석은 여자가 남자에게 위자료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재산분할 소송만으로 이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최린은 모른 척하고, 나혜석은 최초의 서양화가에서 불륜의 상징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울분에 찬 나혜석은 1934년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하며 가부장제를 거세게 비판하였습니다. "남자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여자에게만 요구한다"며 "여자도 사람이다, 인형이나 노리개로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니며 오직 취미다"라는 발언을 담으며 조선인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혜석은 꿋꿋하게 최린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는데, 이른바 '정조유린 소송'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혜석은 패소하고 말았습니다.
최초의 서양화가와 나혜석거리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여성이 평등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라는 페미니스트적 발언과 "일단 살아보고 마음이 맞으면 결혼하자"는 현대보다도 급진적인 발언도 있었지만, "육체적 신비를 모르면 연애가 아니다"는 등의 혼외정사 발언 때문에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사회를 오염시키는 퇴폐의 상직이라며 감시를 했습니다.
또한 박인덕, 허정숙과 함께 음란여성의 대명사로 지목되어 나혜숙은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사회의 모순을 비판한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스스로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 후 주장하는 문제점을 들어내며 호응 받는 여성 운동에서 멀어져갔습니다.
이혼과 사회적 냉대는 나혜석의 말년을 매우 힘들게 했습니다. 경제적 빈곤보다 더 힘든 것은 이혼으로 인해 아이들을 못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장남이 열두 살의 나이로 일찍 죽었는데 김우영이 반대하여 임종도 보지 못했습니다.
"자식은 악마다, 모성애는 강요된 교육이다"고 했었지만, 모성애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서야, 수소문 끝에 겨우 집을 찾아서 숨어 있다가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엄마를 기억하지 못하는 비극이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결국 절로 들어가 불교에 귀의하려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아서 다시 속세로 돌아옵니다.
"여자도 남자처럼 중노동을 할 수 있다"는 신념에 봉사활동을 하며 새 삶을 시작했지만, 운명은 끝까지 좋지 않았습니다. 화재로 그림은 불타버리고 빈곤에 파킨슨병까지 얻었습니다. 1940년대에는 양로원에 있다가 정신이상까지 온 후, 자식을 본다며 탈출하여 길거리를 헤매는 행려가 되었습니다. 길 가던 사람이 발견하여 시립 자제원에 입원했지만, 결국 무연고자 병동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나이 30대까지만 해도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으로 엘리트 인생을 살았으나, 말년은 버려진 채 절규처럼 살다간 것입니다. 비록 지나친 언행으로 세상의 비난을 받게 되었지만, 최초의 페미니즘과 봉사정신은 시대를 앞서간 여성으로 기억되기에 충분합니다.
경기도 수원시는 여류화가 나혜석을 기리기 위해 수원 팔달구 인계동 효원공원부터 인근 600m 거리에 '나혜석거리'를 조성했습니다. 이곳에는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의 동상이 있고 문화시설과 길거리 문화 포퍼먼스가 관광객을 부릅니다. 신문화를 여는 선구자 역할을 한 나혜석을 기념하고자 문화거리를 만든 것입니다.
나혜석거리는 각종 상점과 인가받는 노점이 많고 골목 곳곳에 음식점이 있어서 먹자골목 맛집으로 유명합니다. 화려한 삶과 궁핍한 삶을 거쳐 살아간 그녀, 가부장시대에서 새 시대를 원했던 그녀... 근대 미술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그녀를 나혜석거리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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