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바 망간기념관과 이정호 - 일제의 조선인 강제징용 유일 기념관]
일본에는 한 개인의 끈질긴 노력과 희생으로 일제시대 조선인 강제징용 기념관이 운영되었습니다. 노예 같은 처참한 강제노역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이정호는 단바 망간기념관을 열었고 아들 이용식이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와 운영자금 문제로 폐관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글의 순서]
이정호와 단바망간기념관
이정호, 이용식 - 대를 잇는 노력
단바 망간기념관의 폐관과 응원
[관련 링크]
단바 망간기념관 일본어 홈페이지 http://tanbamangan.sakura.ne.jp/
이정호와 단바망간기념관
일본 '쿄토' 인근의 '게이호쿠'에는 이정호가 재산과 인생을 다 바쳐서 건립한 기념관이 있습니다. 이정호의 '단바망간기념관(丹波マンガン記念館)'은 일제시대의 조선인 강제징용의 처참한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 광산 기념관입니다.
이정호씨는 열여섯 살 되는 해부터 노예처럼 강제 노역을 했었는데, 잔악한 역사가 묻히는 것이 안타까워서 사실을 알리기 위한 기념관을 세웠다고 합니다.
(사진: 일본 쿄토 인근 게이호쿠에 있는 기념관 모습. 광산 땅굴 자체가 기념관인 것이다. [이정호와 단바망간기념관] / ⓒ blog.livedoor.jp/kobateck)
이정호 관장 등의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은 일본의 세계전쟁에 필요한 광물인 '망간'을 캐기 위해서 노예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산골 깊은 광산에 고립당한 채, 1m도 안 되는 좁은 갱도를 따라 들어가서 망간을 캐야 했습니다. 심지어 폭 30cm, 높이 60cm의 공간에서는 누워서 땅굴을 파는 등, 하루 종일 웅크린 자세로 일해야 했습니다.
(사진: 열악한 환경의 조선인 강제노동 현실을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운영자금의 부족으로 어려운 현실이다. [이정호와 단바망간기념관] / ⓒ carlan.at.webry.info)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세 평 남짓한 공간에 20여 명이 생활을 해야 했으니 노예생활과 다름없었습니다. 잠은 쪼그리고 자야했고 밥을 먹을 때는 서서 먹어야 했습니다. 저급한 보리밥에 고사리 같은 것을 먹으며 견뎠습니다.
그런데도 하루 일당이 밥값과 비슷해서 돈을 모아 탈출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사진: 지식채널에 소개된 화면. 일본 노동자와의 차별 속에서 조선인들은 강제노역 또는 취업사기로 끌려 갔다. [이정호와 단바망간기념관] / ⓒ EBS)
인간의 노동공간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이곳에서 하루 200kg의 망간을 지고 나와야 했습니다. 도망가다가 잡히면 폭행을 당했으며, 갱도가 무너져서 죽으면 개를 묻듯이 매장하고는 또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죽어 간 억울한 혼백을 기념관으로 남겨야 한다는 소망에, 개인 재산과 인생을 모두 쏟아 부어 이정호가 단바망간기념관을 세운 것입니다.
이정호, 이용식 - 대를 잇는 노력
이정호의 단바 망간기념관은 쿄토에서 162번 국도를 따라 50km 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 1940년대에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대포 등 금속 무기를 강하게 만드는데 필요한 망간을 채굴하던 광산이 있던 자리입니다.
이 곳에는 줄잡아 3000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 연행, 또는 일자리 사기 등으로 끌려와서 일을 했습니다.
(사진: 진폐증을 앓고 있는 이정호. 탄광 노동자들은 변변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 죽어갔다. [이정호, 이용식 - 대를 잇는 노력] / ⓒ EBS)
하지만 전쟁이 끝나도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어가야 했습니다. 바늘 형태의 망간 가루가 남아서 폐를 찌르고 각혈과 호흡곤란을 동반하는 '진폐증'으로 다시 죽어가야 했습니다. 이정호도 또한 그렇게 인생을 마감하는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이용식을 부르더니 지금까지 모은 전 재산으로 기념관을 설립해야겠다고 했답니다.
(사진: 생전의 이정호와 아들 이용식의 모습. 이들 가족의 이야기는 한국인이 꼭 알아야 할 일화이다. [이정호, 이용식 - 대를 잇는 노력] / ⓒ EBS)
아들은 의아했습니다. 수익이 되겠는지, 아니 수익은 고사하고 유지나 할 수 있겠는지 물었습니다. 이정호는 단바 망간기념관이 자신의 무덤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처참한 조선인의 역사를 남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땅을 팔고 가족을 제외한 모든 것을 팔아서 20억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6년여의 노력 끝에 단바망간기념관을 건립했습니다.
(사진: 일본인 블로그에 소개된 단바 망간기념관의 이용식. 이렇게 모형으로 당시를 볼 수 있다. [이정호, 이용식 - 대를 잇는 노력] / ⓒ ameblo.jp/nobody0728)
1980년대에 폐광한 광산을 사들이고 방문객이 들어갈 수 있도록 갱도를 넓히는 작업을 했습니다. 처음엔 채굴기가 없어서 직접 손으로 굴을 팠다고 합니다. 오래된 광산이 무너질까바 다이너마이트도 터트리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이니 어떤 때는 하루 10cm 밖에 파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정호는 단바 망간기념관에 전시할 자료를 3년여의 기간 동안 수집을 하였고 마침내 1989년 개관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정호는 죽는 순간에도 돈을 아끼기 위해 자신의 시체를 수장시켜 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단바 망간기념관의 폐관과 응원
온갖 고생 끝에 이정호는 단바망간기념관을 개관한 후 사망하였고, 아들 이용식이 그 뜻을 이어 받아서 운영을 맡았지만 새로운 고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한해 8000만 원에 육박하는 운영비가 다시 목을 조여 왔습니다.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전시하는 기념관이므로 여러 가지 방해를 하였습니다. 지자체는 지역 이미지를 손상시킨다고 해서 길을 내는 것도 못마땅해 했고, 난데없이 조사를 나오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국고지원은 받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사진: 인봉닷컴에 소개된 이정호 부자의 모습. 전 재산과 인생을 역사기념을 위해 희생하였다. [단바 망간기념관의 폐관과 응원] / ⓒ inbong.com)
이정호의 단바 망간기념관은 공익시설인데도 불구하고 일본은 개인재산 세금을 물리고 있는 중입니다. 일본은 "강제연행" 역사를 전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며 대출도 안 해 주고 불법침입광업권 등의 핑계로 압박했습니다. 어떤 일본 학자는 조선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왔다는 거짓 책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유일의 조선인 강제징용 광산 기념관인 이정호의 단바 망간기념관은 결국 2009년 폐관을 해야 했습니다. 일본의 보수화가 심해지면서 방문객은 거의 사라지고 적자가 거듭된 이유입니다.
(사진: 일본지식인, 재일동포, 재외동포, 한국인의 지원이 시작되며 윤도현 밴드도 지원에 참가하였다. [단바 망간기념관의 폐관과 응원] / ⓒ tanbamn.blog104.fc2.com)
하지만, 일본 내에도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학자들이 있어서 후원의 모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재일교포와 제외동포, 한국인들의 모금이 시작되었고 윤도현밴드 등의 연예인도 동참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2011년 재개관을 했지만, 언제라도 다시 문을 닫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겨우 연장을 할 따름입니다. 운영자 측과 일본 지원조직 간의 불화로 2016년 '지구촌동포연대' 등의 후원회 지원 사업이 중단되는 등의 고난도 겪었습니다.
(사진: 일본에서 운영되는 기념관의 홈페이지. 아래에 링크가 있으니 웹페이지 번역기능으로 방문할 수 있다. [단바 망간기념관의 폐관과 응원] / ⓒ tanbamangan.sakura.ne.jp)
이정호 가족의 단바망간기념관은 총 3km에 이르는 갱도 막장 중에서도 겨우 300m만을 복원해서 당시의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을 볼 수 있는 기념관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시설을 이정호와 그 가족들이 오직 개인의 힘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독일의 잘못을 기념하고 국익을 위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수국가 일본은 은폐하고 왜곡을 하느라고 역사적 사실을 거부합니다. 개인의 피나는 노력이 언제까지 이것을 이겨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