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김준엽 총장 - 장준하의 인연과 독재에 맞선 학자]
전 김준엽 고려대 총장은 1940년대에는 일제에 맞서며 광복군에 있었으며, 1980년대에는 독재에 맞서며 대학 총장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또한 김준엽은 장준하와 각별한 사이였고, 전두환에게 맞서다가 물러난 학자였습니다. 정치권력의 유혹도 있었지만 끝내 제자를 사랑하는 학자로 남은 김준엽의 삶을 추적해 봅니다.
[글의 순서]
1. 독재정권 아래서의 대학의 현실
2. No라고 말한 고려대 김준엽 총장
3. 광복군 김준엽과 장준하의 인연
4. 총장을 계속하라는 시위의 김준엽
독재정권 아래서의 대학의 현실
197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이 있었습니다. 그해 12월, 나라가 혼란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군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치권력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 등에 의해 1981년 제5공화국이 시작되었습니다.
재야 시민을 비롯하여 민주인사들은 이에 반발했고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보수주의 국민 중에는 지지하는 사람이 꽤 많았고, 아직도 대구, 경북 지역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5%나 나오기도 합니다.
(사진: 고려대 김준엽 총장이 낸 저서 <장정>. 배경은 12.12 쿠데타를 일으켰던 전두환과 하나회 군인들. [독재정권 아래서의 대학의 현실] / ⓒ namu.wiki)
당시는 정부가 일제강점기 때처럼 모든 국민을 감시하던 때였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정치는 수십 년 전 일제시대로 퇴화한 시대인 것입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박정희의 1961년 쿠데타와 정권찬탈 과정을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각 대학마다 '안기부(현재의 국정원)', 경찰, '문교부(현재의 교육부)'에서 사람이 나와서 상주하며 감시를 했습니다. 각 대학마다 학생을 감시하는 그들에게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뇌물을 주고 접대비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1982년, 군사정부는 고려대의 '김상협' 총장을 국무총리로 불러 들였고, 후임으로 '김준엽' 총장이 취임했습니다.
No라고 말한 고려대 김준엽 총장
고려대 김준엽 총장은 원칙주의자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명예박사 학위수여 등을 정부의 지시대로 하던 때였지만, 김준엽 총장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서 문교부와 마찰이 생기곤 했습니다. 총장실까지 찾아와서 간섭을 하며 대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는 정부 감시자들에게도 호락호락하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정부는 그를 미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장준하'와 김준엽이 친분을 가지고 있으니 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광복군에서 활동한 경력과 명성이 있기에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사진: 현재의 고려대 본관 건물. 이곳에서 김준엽 총장이 업무를 보았다. [No라고 말한 고려대 김준엽 총장] / ⓒ Ksiom)
1983년 고려대 학생들이 학생회관을 점거하고 시국농성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수백 명의 학생이 배고픔과 경찰연행의 공포 속에서도 민주화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고려대 김준엽 총장은 시간마다 확성기를 들고 외쳤습니다. "학생들은 몸을 다치지 말라"고 하며 "밖에 앰뷸런스를 대기시켜 놓았으니, 다치거나 아픈 학생이 병원으로 가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경찰 공권력 투입이 지연되고, 학생들은 총장이 지켜준다는 사실에 오히려 힘을 내게 되었습니다. 이 시위는 전두환 정부 기간 동안 유일하게 단 한명의 학생 연행도 없었던 시위로 기록되었습니다.
(사진: 독재정치가 압력을 가하는 중에도 학생의 안전과 학칙을 원칙으로 했었다고 한다. [No라고 말한 고려대 김준엽 총장] / ⓒ EBS)
독재정권 때에는 총학생회라는 것도 없었습니다. 대신 '학도호국단'이라는 것이 정부가 지시하는 대로 학생회의 일을 처리하던 시절입니다. 심지어 고등학교까지도 정부에서 관리감독을 하였습니다. 대학의 총장들도 정부가 지시하는 대로 일하며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려대 김준엽 총장은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총학생회를 설치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마치 일제강점기 때 같던 감시에서 벗어나려던 학생들의 편을 들어 준 것입니다. 이 영향은 계속 번져서 마침내 1985년 전국의 학도호국단이 폐지되는데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사진: 졸업식에서 연설 중인 김준엽 총장. 정권이 제자를 제적하는 것을 온 몸으로 막은 스승이다. [No라고 말한 고려대 김준엽 총장] / ⓒ EBS)
최대의 갈등은 1984년 '민정당 당사 점거농성 사건'이었습니다. 고대, 연대, 서울대, 성대 학생 260여 명이 정부여당인 민정당(현재의 자유한국당 전신이며 전두환의 소속정당) 당사에서 시위를 벌였던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이 학생들을 제적하라고 압박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문교부장관인 '권이혁'은 총장들은 모아 놓고 당장 제적시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눈치만 보던 다른 총장들과 달리, 고려대 김준엽 총장은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학생에게 제적은 사망선고와 같은 것인데, 총장이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광복군 김준엽과 장준하의 인연
독재에 맞서서 학생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고려대 김준엽 총장은 1920년에 태어났고 1940년대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동양사학을 전공하던 중에 학도병 징집을 당했지만, 본인의 말로는 광복군에 가기 위해서 일부러 일본군에 자원입대를 했다고 합니다. 광복군은 중국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계획을 세우고 자원입대를 한 사람이 또 있었는데, 그가 바로 장준하입니다. 김준엽처럼 장준하도 전쟁 중에 광복군이 있는 곳까지 갈 수가 없기에, 일본군에 자원한 뒤 탈영할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사진: 함께 광복군에 들어와서 일본군과 싸웠던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의 20대 시절 모습. [광복군 김준엽과 장준하의 인연] / ⓒ 미상)
이들은 중국에 배치된 뒤 계획대로 탈영을 했습니다. 먼저 탈영한 김준엽과 장준하는 어느 마을에서 마주쳤습니다. 이들은 동행하기로 결정하고 임시정부가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이후, 김준엽과 장준하는 평생을 같이 하는 사이가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므로 목숨을 건 대장정이었습니다. 도중에 일본군에게 잡히거나, 중국군에게 간첩으로 몰릴 수도 있기 때문에 열차를 이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려 6000리나 되는 길을 걸었습니다. 양쯔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7개월이나 걸려서 임시정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사진: 고려대 김준엽 총장이 활동할 때의 광복군들이 마지막 광복군이었다. [광복군 김준엽과 장준하의 인연] / ⓒ KBS)
이런 고생 끝에 이들은 광복군에서 활약하게 되었고, 김준엽과 장준하는 미국 CIA의 전신인 '미국전략첩보대(OSS)'에서 훈련을 받으며 '조선 침공작전'을 준비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더 지속되어 광복군과 일본의 전면전이 대등하게 벌어졌다면, 우리나라는 전승국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분단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자폭탄에 의한 일본의 항복으로 작전은 취소되고, 1945년 김준엽과 장준하는 이범석 장군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장준하는 정치인으로, 김준엽은 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진: 귀국 후 정치인과 학자로 길을 걸어간 장준하(왼쪽)과 김준엽(오른쪽) [광복군 김준엽과 장준하의 인연] / ⓒ poweroftruth.net)
하지만 1961년 박정희가 불법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1967년, 박정희는 한 번 더 대통령을 하려고 대선에 나섰습니다. 야당이었던 장준하는 박정희에게 남로당 경력(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공산주의 단체)이 있었던 사실을 공격하였고, 선거에서 자신이 반공주의자라고 홍보했던 박정희는 '국가원수모독죄'라며 감옥에 넣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장준하를 "재야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인기가 높아졌는데, 1975년 갑작스러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절친한 김준엽과 장준하의 인연은 눈물 속에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총장을 계속하라는 시위의 김준엽
학자의 길을 걸은 김준엽은 동양역사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와 '중국 공산당사'를 집필한 것입니다. 요즘도 보주수의자들은 종북몰이를 하고 있지만, 당시에 이런 책을 낸다는 것은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연구는 남한 내에서는 거의 연구가 불가능한 것이므로 가치가 높습니다. 광복 이전에 중국에 있으면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직접 느끼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김준엽은 고려대에 30연간을 재직하면서 결국 1982년 고려대 총장에 오릅니다.
(사진: 한국사에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독립운동가들이다. 친일파의 자손들은 잘 살지만, 독립운동가의 자손들은 어렵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총장을 계속하라는 시위의 김준엽] / ⓒ KBS)
총장에 올랐지만 고난은 더욱 심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정부의 말을 잘 듣지 않는 학생들을 모두 제적하고 감옥에 넣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고려대 김준엽 총장은 오로지 원칙대로만 하려고 했습니다. 정부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학칙에 위배되었을 때만 제적할 것이라고 단호히 거부를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트집을 잡으려던 문교부는 비리를 잡겠다며 감사반을 보냈습니다. 고려대를 샅샅이 뒤졌는데 뜻밖의 불미스러운 일이 터졌습니다. 당시에는 교직원 자녀 특례입학이란 것이 암묵적으로 시행되던 때였는데, 이렇게 입학한 25명의 학생을 제적하라고 압력이 내려왔습니다.
(사진: 고려대 교육TV 방송에 나온 고려대 김준엽 총장의 모습. 헌법에 임시정부 계승을 명시한 인물이다. [총장을 계속하라는 시위의 김준엽] / ⓒ KUTV)
지금이야 당연히 취소될 입학이지만, 그때는 일반적인 관례였기에 김준엽의 갈등은 매우 심했습니다. 결국 25명의 청춘을 살리기 위해 총장직을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공식 일정인 졸업식이 있던 날, 고려대에서는 아주 보기 힘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총장직 사퇴를 취소하라"는 시위가 벌어진 것입니다. 지금까지 "총장을 사퇴하라"는 시위는 많았어도 총장을 계속해 달라는 시위는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총장직을 계속하라는 시위대는 경찰과 충돌하고 말았지만, 고려대 김준엽 총장은 퇴임식도 없이 쓸쓸히 그만두었습니다.
(사진: 대한민국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고려대 시위. 총장을 계속 해 달라는 시위는 유일무이하다. [총장을 계속하라는 시위의 김준엽] / ⓒ KBS)
학자로 돌아온 김준엽에게는 정치적 제의도 많았습니다. 김대중, 김영삼이 국무총리를 제의했지만 "총장보다 높은 자리는 없다"면서 거절하였습니다. 전두환의 후임인 노태우도 국무총리에 앉히려고 제의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스승이란 자가 학생들을 제적시킨 정권에게 고개를 숙일 수는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가장 큰 김준엽의 공로를 꼽으라면, 1987년 헌법 개정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포함시켜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방향을 확고히 잡은 것입니다. 고려대 김준엽 총장은 2011년 세상을 떠났지만,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을 하나쯤 마련해 주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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