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트베크 인질 사건
독일 인질 사건
1988년 서독에서 발생한 3일간의 충격적인 인질극으로 독일의 언론 지침이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그 사건의 이름은 글라트베크 인질 사건입니다. 14세 소년과 18세 여성, 경찰관 1명이 죽게 된 이 사건으로 언론의 문제점이 크게 드러난 것입니다. 독일 언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당시 인질극이 어떤 과정이었는지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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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트베크 인질극 사건 - 언론의 문제, 독일 인질 사건
1988년 독일 언론 사건
1988년, 당시 서독에서 인질극이 발생했습니다. 범인들은 은행을 털고 인질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언론의 과도한 취재 경쟁으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범인들은 버스로 납치했는데, 기자들 때문에 인질 2명이 죽고 경찰관 1명이 교통사고를 당해 죽게 된 것입니다. 이후 독일에서는 인질범과의 인터뷰를 금지하게 됩니다.
글라트베크 인질극의 범인들은 한스-위르겐 뢰스너와 그의 여자친구 마리온 뢰블리히, 그리고 디터 데고프스키입니다. 모두 1954년 ~ 1957년 사이의 나이였습니다. 뢰스너는 수많은 절도와 강도 행위를 저질렀고, 총 11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데고프스키는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뢰블리히는 복잡한 남자 관계가 있었습니다.
14살 때부터 절도죄를 저지르던 뢰스너는 1987년 뢰블리히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뢰블리히는 이미 10대 때부터 임신을 했었고, 세 번이나 결혼을 실패한 끝내 청소년인 딸과 함께 뢰스너와 살았습니다. 뢰스너와 데고프스키는 감옥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IQ는 겨우 79밖에 안 되었다고 합니다.
글라트베크 인질극 사건
사건은 한스-위르겐 뢰스너와 디터 데고프스키가 도이체 은행 지점을 털고 두 명의 직원을 인질로 잡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도주를 시작하면서 여자친구인 마리온 뢰블리히가 합류하고, 그들이 대중교통 버스를 납치하면서 인질의 수가 27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중에는 어린이 다섯 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후 일부 인질들을 석방했지만, 두 명의 인질을 남겨두고 경찰과 대치했습니다. 경찰은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고, 인질범들은 언론 기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언론들의 취재 경쟁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기자들은 인터뷰에서 범인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내보냈습니다.
인질범들에게 커피와 길 안내 등 편의를 제공해서 시간의 여유가 생기게 했으며, 인질범들에게 사진 촬영을 하자며 포즈를 취하도록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범인들은 이런 대우에 의해, 인질극을 장난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언론은 사건을 자극적으로 보도하여 대중의 관심을 끌려고 하였고, 인질들의 고통은 기사에서 외면했습니다.
언론의 문제, 독일 인질 사건
심지어 한 기자는 인질범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길 안내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경찰의 작전 수행에도 방해가 되었습니다. 인질범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기자들의 차량이 경찰 차량의 이동이 불편하게 만들어서 작전에 문제가 생기게도 했습니다.
결국 14세 소년 에마누엘레 데 기오르기가 인질범에게 살해당했고, 18세 여성 질케 비쇼프는 경찰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더구나 인질범을 추격하던 중 경찰관 한 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등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습니다. 결국 경찰이 인질범들의 차량을 들이받아 제압하면서 막을 수 있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재판에서 한스-위르겐 뢰스너와 디터 데고프스키는 종신형과 24년 형을 선고받았고, 마리온 뢰블리히는 9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한편 국민들의 비판이 빗발쳐서 내무부 장관이 사임했습니다. 또한 언론은 인질 사건에서 범인들과 인터뷰를 할 수 없도록 금지되었습니다. 글라트베크 인질극 사건은 독일 사회에 큰 변화를 준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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