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스터즈, 한류스타 원조걸그룹 - 저고리시스터즈의 다방의 푸른 꿈]
수십 년 전, 원조걸그룹이 있었습니다. 김시스터즈라는 걸그룹은 이미 1950년대에 미국 진출까지 했었습니다. 첫 한류스타인 셈인데, 팝음악의 본토인 미국에서도 흥행에 성공한 한국인으로 평가 받습니다. 그런데, 이들 이전에 이미 한국 최초의 원조걸그룹이 또 있었으니, 바로 저고리시스터즈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프로젝트 걸그룹인 셈인데, 김시스터즈는 저고리시스터즈의 멤버의 딸이라는 독특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글의 순서]
1. 한류스타 원조걸그룹 김시스터즈
2. 영화 다방의 푸른 꿈 - 김시스터즈 이야기
3. 한국 최초의 원조걸그룹 저고리시스터즈
한류스타 원조걸그룹 김시스터즈
1953년, 세 명의 소녀는 걸그룹을 결성하여 '김시스터즈'라는 이름으로 '미8군'의 무대에 섰습니다. 김숙자, 김애자, 김민자로 구성된 이들은 겨우 10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가창력과 퍼포먼스로 관중을 휘어잡았고 미8군무대에서 유명해졌습니다.
한국은 1950년부터 3년간 치른 '6.25전쟁'으로 피폐했기 때문에 연예산업이 거의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연예인들은 미군이 운영하는 쇼무대에서 돈벌이를 해야 했는데, 일제강점기에 '저고리시스터즈'로 활약했던 이난영은 김시스터즈를 한류스타 원조걸그룹으로 키워냈습니다.
(사진: 미국 라스베거스에서의 공연 모습. 춤, 노래, 연주, 퍼포먼스 등 모두 다 출중한 엔터테인먼트였다. [김시스터즈, 한류스타 원조걸그룹 - 저고리시스터즈의 다방의 푸른 꿈] / ⓒ vintag.es)
김시스터즈의 입소문은 미군 병사들에 의해 전해져서 미국의 한 에이전트와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1959년, 8개월짜리 공연계약을 맺고 미국 '라스베가스'로 떠났습니다. 해방 이후 최초의 해외진출이며 원조 한류스타의 첫걸음인 것입니다. 어찌 보면 세계 최초의 원조걸그룹으로 평가받는 '슈프림즈'보다도 먼저 도전한 걸그룹인 셈입니다.
월 400달러의 조건으로 시작한 김시스터즈는 1년 후 한 주에 1만5천 달러를 받는 유명인으로 급성장하게 됩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천 달러도 안 되던 시대였지만, 이들은 라스베이거스에서 고액 세금납부 4위에 오를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분장실에서의 김시스터즈. 이들의 모습은 영화 다방의 푸른 꿈에서 다시 볼 수 있다. [한류스타 원조걸그룹 김시스터즈] / ⓒ time.com)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할 때의 김시스터즈는 17세와 15세로 된 원조걸그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 기타, 드럼, 베이스, 색소폰, 백파이프 등 20여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룰 줄 알았고, 가창력과 춤까지 갖추었기에 한두 시간 정도의 공연은 가볍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이 있었습니다.
미국 순회공연 등에서 유명세가 더해지자, 당시 유명 쇼프로그램이었던 '에드 설리번 쇼'에도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에드 설리번 쇼는 비틀즈가 세계무대로 진출할 때 처음 출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김시스터즈는 비틀즈보다도 많은 22회를 출연한 한류스타였습니다.
(사진: 유명 TV프로그램인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한 김시스터즈. 이 TV쇼는 비틀즈의 세계진출로도 유명하다. [한류스타 원조걸그룹 김시스터즈] / ⓒ wikipedia.org)
한류스타 원조걸그룹 김시스터즈는 '동양에서 온 마녀'라는 애칭을 얻으며 유명 잡지인 '라이프'지에도 등장했습니다. 특히 '찰리브라운'이라는 곡은 흥겨운 락앤롤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국내 뉴스 중에는 빌보드 7위에도 랭크되었다는 기사들이 있지만, 실제로 빌보드차트에서는 찾을 수가 없으니 좀 더 조사되어야 하겠습니다.
김시스터즈는 이후 14년 간 미국에서 연예활동을 하다가 멤버의 결혼과 함께 해체되었습니다. 저고리시스터즈의 이난영이 키워낸 최초의 한류스타인 이들 중, 김숙자씨는 미국에, 김민자씨는 헝가리에 70이 넘게 정정하며 김애자씨는 폐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사진: 락앤롤 등의 빠른 노래를 주로 불렀던 1950년대 말의 가수. 한국에도 방문하여 방송 출연을 하곤 했다. [한류스타 원조걸그룹 김시스터즈] / ⓒ KTV 방송캡처)
영화 다방의 푸른 꿈 - 김시스터즈 이야기
최근 싸이, 원더걸스 등이 미국 빌보드에 오르며 화제가 됐었지만,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은 1950년대 말이다 보니 해외에서 크게 활약한 김시스터즈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초의 한류스타 원조걸그룹인 김시스터즈의 시작은 생활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저고리시스터즈로도 활동한 바 있는 이난영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알아주던 가수였습니다.
그러나 6.25동란이 일어나자 남편은 납북되고 먹고 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마침 저고리시스터즈의 경험이 있던 이난영은 소녀트리오를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두 딸과 조카를 가수로 키우기로 하고 시작하였습니다.
(사진: 어린 시절부터 가수활동을 시작한 김시스터즈는 저고리시스터즈의 이난영이 기획한 여성 트리오였다. [김시스터즈, 한류스타 원조걸그룹 - 저고리시스터즈의 다방의 푸른 꿈] / ⓒ pictori.net)
가수 김해송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김숙자, 김예자와 작곡가였던 오빠 이봉룡의 딸인 이민자가 멤버로 합류하였습니다. 나중에 김시스터즈가 성공한 후에는 아들들로 구성된 '김브라더스'도 결성하였지만 김시스터즈만큼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저고리시스터즈 때의 경험을 살려 원조걸그룹을 만들어 내는 훈련이 시작되었지만, 가난한 시절의 힘겨움과 너무 어린 나이에 지치는 날이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에는 보기 힘들었던 바나나, 성공하면 바나나를 먹을 수 있다는 이난영의 말에 힘겨운 훈련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때 나이는 겨우 13세, 11세였다고 합니다.
(사진: 특히 김시스터즈의 장점이라면 자유로운 악기 연주가 더불어져서 음악적 다양성이 풍부했다는 것이다. 미국시장에서 통한 비결이기도 하다. [영화 다방의 푸른 꿈 - 김시스터즈 이야기] / ⓒ vintag.es)
영어를 배운 적이 없어서 한글로 음을 적어가며 연습한 팝송... 결국, 미8군 무대에 데뷔하며 진짜 바나나를 먹을 수 있었게 되었습니다. 미군의 사기를 위해 운영되던 미8군 무대를 통해 입소문이 퍼졌고, 마침 일본을 방문 중인 미국의 한 에이전트가 이들을 오디션하기 위해 한국으로 오겠다고 하며 한류스타의 길이 열렸습니다.
지금의 걸그룹은 한 소절씩 나눠서 부르지만, 원조걸그룹 김시스터즈는 전곡을 하모니로 같이 부르며 여성 보컬그룹의 장점을 잘 살려냈습니다. 잘 훈련된 가창력과 춤, 악기 연주 등 엔터테인먼트의 재능이 호평 받았으며, 공연 분위기를 주도하는 퍼포먼스도 강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은 최초의 걸그룹인 저고리시스터즈 출신이다. 딸, 조카와 함께 미국 TV방송에 출연하여 노래하고 있다. [영화 다방의 푸른 꿈 - 김시스터즈 이야기] / ⓒ Ed Sullivan Show 캡처)
한국에서는 '김치깍두기', 미국에서는 '찰리브라운'이 히트곡으로 대표되는 김시스터즈는 아시아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걸그룹입니다. 저고리시스터즈가 최초로 활동한 원조걸그룹이라면, 김시스터즈는 최초로 앨범을 발표하며 활동한 걸그룹입니다. 김시스터즈가 미국에서 성공한 후 윤복희, 김치캐츠, 패티김, 김보이스 등이 미국 진출을 이루어졌고, 1959년 이후 한국에서도 여러 여성 그룹이 생겨났습니다.
리메이크하여 부른 찰리브라운을 들어보면 우리말로 익살맞은 멘트도 들어 있어서, 그들이 얼마나 자유자재로 음악을 표현했는지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당시 미국 탑스타였던 프랭크 시나트라와의 공연도 대단합니다.
(사진: 김시스터즈의 해외진출 이후 아들들로 이루어진 김보이스도 진출하였다. 미국 TV방송에서 함께 연주 중인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스. [영화 다방의 푸른 꿈 - 김시스터즈 이야기] / ⓒ 1960년대 미국TV 캡처)
한국 최초의 원조걸그룹 저고리시스터즈
한국 최초의 원조걸그룹이라고 하면 저고리시스터즈가 꼽힙니다. 김시스터즈가 정규멤버와 정규앨범을 가진 걸그룹이라면, 저고리시스터즈는 지금으로 치자면 프로젝트 걸그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시스터즈가 해외에서 이름을 알려 가난했던 한국을 세계에 알렸다면, 저고리시스터즈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노래로 위로하였습니다.
저고리시스터즈는 1935년 결성되었고 4인조 여성보컬그룹으로 시작을 하였습니다. 이난영과 박향림, 장세정, 이화자로 구성되었습니다. 또 이준희, 김능자, 서봉희가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곧이어 김해송, 박시춘, 송희선, 현경섭, 이복본으로 구성된 남성 보컬그룹 '아리랑보이즈'도 선을 보였습니다.
(사진: 한국 최초의 원조 걸그룹으로 꼽히는 저고리시스터즈의 사진. 이난영, 박향림, 장세정 등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걸그룹이었다. [김시스터즈, 한류스타 원조걸그룹 - 저고리시스터즈의 다방의 푸른 꿈] / ⓒ 이준희)
최초 원조걸그룹으로 결성된 멤버들의 이력도 쟁쟁합니다.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로 한국 가요계의 한 획을 그인 가수입니다. 너무나 애절한 목소리 때문에 슬픈 이미지가 강하지만, 원래 모습은 매우 발랄한 했으며 한국의 초기 재즈 가수이기도 합니다. '다방의 푸른 꿈'이라는 곡은 이난영의 재즈적 음악성이 살아 있는 명곡입니다.
'박향림'은 히트곡 '오빠는 풍각쟁이야'로 유명한데,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작곡하였으며 2000년대에 들어와 다시 인기를 끌기도 했었습니다. '장세정'은 '연락선은 떠난다'로 유명하며 '이화자'는 민요가수, '서봉희'는 무용가로서 화려한 공연을 했습니다.
(사진: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김정구와 공연하는 저고리시스터즈의 모습. [한국 최초의 원조걸그룹 저고리시스터즈] / ⓒ 미상)
원조걸그룹으로 불리는 저고리시스터즈는 OK레코드사의 기획 작품입니다. 당시 OK레코드는 '타양살이'의 '고복수'와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을 히트시킨 기획사 겸 앨범회사였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저고리시스터즈는 지금의 걸그룹처럼 노래와 춤의 다양한 공연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아리랑보이즈의 김해송과 저고리시스터즈의 이난영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난영이 부른 다방의 푸른 꿈을 작곡한 사람이 김해송이었습니다. 해방 후 김해송과 이난영 부부는 KPK악극단을 조직하여 꾸준한 연예계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런 부모의 피가 한류스타 김시스터즈에게 그대로 전해진 것 같습니다.
(사진: 팝송 My Way로 유명한 프랭크 시나트라와의 공연 후 기념사진. 마를린 몬로 등과도 공연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원조걸그룹 저고리시스터즈] / ⓒ 미상)
그러나 김해송은 6.25전쟁에서 납북되었다고 합니다. 이난영은 김해송 없이 KPK쇼단을 구성해서 연예활동을 이으려 했고, 결국 최초의 원조걸그룹 저고리시스터즈로부터 김시스터즈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다방의 푸른 꿈'은 한류스타 원조걸그룹 김시스터즈의 결성과 연습과정, 데뷔와 미국활동기를 담은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영화의 제목이 다방의 푸른 꿈인 이유는 한류스타 김시스터즈를 길러낸 저고리시스터즈의 이난영이 불렀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이난영의 꿈이 김시스터즈로 연결되는 실화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지금은 잊혀진 사람들이지만, 이들이 바탕을 닦은 한국 걸그룹의 역사는 80년을 흘러오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