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전투(백강구전투)
- 백제 멸망을 되살리려던 백제 부흥운동의 세계대전
백제 멸망의 해는 660년입니다. 그러나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격으로 인한 전쟁 이후에 진짜 최후의 전투가 또 있었는데, 그 전쟁을 백강전투, 혹은 백강구전투라고 합니다. 이 백강전투는 백제, 왜, 신라, 당이 벌인 동아시아의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백제는 완전히 소멸하고 왜의 정세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백제의 멸망, 의자왕을 대신한 풍왕
백강전투를 중국에서는 백강구전투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백촌강전투라고 합니다. 백강구는 지금의 금강입구로 여겨집니다. 일본의 역사교육에서 백강전투는 한국보다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소홀하게 다루는 편입니다. 당시 백제인들은 왜의 지배층 중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의 입장에서 백강전투는 국운을 건 대규모 참전이었습니다. 일본의 왜는 가야가 세우고 백제가 지배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아직 제대로 고대국가도 되지 못한 왜가 총력을 다하여 백강전투에 참전했다는 것은 백제와의 관련설에 무게를 실어주는 사건입니다.
(사진: 백강전투는 백강구전투라고도 하며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운동의 결정적인 실패가 된 역사 사전이다. / ⓒ wanhuajing.com)
백제가 멸망하고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간 후, 백제지역에서는 도침과 귀실복신, 흑치상지 등이 군사를 일으켜서 백제 부흥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에 가 있던 백제왕자 부여풍을 모셔와서 왕으로 세웠고, 당나라는 유인궤 등을 보내서 공격하였습니다. 부여풍은 풍왕이라고도 하고 풍장왕이라고도 합니다. 의자왕의 다섯째 아들로 여겨집니다. 삼국사기에는 부여풍이 왜에 인질로 가 있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사대주의자 김부식이 백제를 깎아내리려고 의도적으로 허위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풍장왕 부여풍이, 비극적이게도 형인 부여융과 전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 백강전투입니다.
(사진: 백강전투(백강구전투)는 지금의 금강 하구에서 백제, 당나라, 왜가 벌인 동아시아 최초의 세계대전이다. / ⓒ 교과서)
서기 600년대의 세계전쟁 백강전투(백강구전투)
나당연합군의 침략 때는 의자왕을 돕지 않던 지방 호족들도 지원을 하며 한때는 성공하는 듯했습니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전 국토가 바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백제 지방군이 도와주기 전에 부하의 배신으로 의자왕이 잡혀간 것이므로 아직도 백제는 200여 개의 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내분으로 인해 도침이 복신에게 살해당하고, 복신은 부여풍에 의해 죽었습니다. 복신의 반란을 눈치챈 부여풍이 먼저 복신을 처치한 것입니다.
이때를 이용해 당나라와 신라 문무왕은 백제부흥군의 수도인 주류성으로 협공을 가해 왔습니다.
(사진: 도침, 복신의 백제 부흥운동과 흑치상지의 활동지도. 왼쪽의 주류성과 백강을 중심으로 한 백제군의 세력권이다.)
당나라는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에게 해군을 주어 공격 병력을 더 보내왔습니다. 663년, 당과 신라 연합군뿐 아니라 자신의 형인 부여융마저 당나라 편이 되어 쳐들어오자 부여풍은 다급해졌습니다. 부여풍은 일본에 거주할 때 왜의 실권 가문인 소가씨 가문과 친분이 있었으므로 지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소가 가문도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까닭에 백제의 멸망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마침내 왜는 큰 결단을 내립니다. 임진왜란에 버금갈 정도의 병력을 파견해 부여풍을 돕기로 한 것입니다. 드디어 4개국 이상이 참전하는 동아시아 사상 최초의 세계대전이 백강에서 벌어집니다.
(사진: 백강전투(백강구전투)를 재현한 모형도. 의자왕의 다섯째 아들인 부여풍이 백제 부흥군으로, 첫째 아들인 부여융이 당나라군으로 대결을 벌였다.)
백제의 실질적인 멸망, 아쉬운 백강전투
왜는 수백 척의 배와 4만여 명의 병력을 백강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당과 신라의 수만 명이 백강전투(백강구전투)에서 충돌하게 되니 거대 규모의 동아시아 세계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백제, 신라, 당, 왜의 총 병력은 20만 명이라는 설도 있고 10만 명 이하라는 설도 있습니다.
당의 부여융은 왜의 수군보다 먼저 백강에 도착하여 백강전투(백강구전투)에서 유리한 지역을 선점하였습니다. 하지만 백강전투 초기의 흐름상으로는 백제군과 왜가 수적으로 우세했으므로 백제의 부흥이 현실이 되는 듯싶었습니다. 백제 기병은 육로에서 신라와 맞섰고, 왜는 백강 입구에서 당과 맞섰습니다. 그러나 당군은 바닷물의 간조 차와 화공을 이용해서 왜군을 대파했고, 백제 기병도 패하고 말았습니다.
(사진: 왜가 총력을 다해 백제를 구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던 원인을 설명하고 방송프로그램의 한 장면 / ⓒ KBS)
왜군은 1천여 척의 배로 수적 우세를 믿고 무식하게 공격을 가하다가 4전 전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후진국이었던 왜의 선박 기술과 전술 차이를 여실히 드러낸 백강전투(백강구전투)였습니다.
결국 백강전투의 패배로 풍장왕은 고구려로 도망가게 되는데, 어떤 이들은 663년 백강전투를 백제의 실질적인 멸망의 해로 보기도 합니다.
이후 백제 유민의 대규모 일본 망명이 이루어집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백강전투(백촌강전투)로 엄청난 변혁기를 맞이한 셈입니다. 또한, 백강전투로 왜의 정권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왜의 덴무왕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에 오르듯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이후에 왜는 최초의 율령을 반포하고 이름도 왜에서 일본으로 바꾸며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게 됩니다.
(사진: 왜가 사력을 다해 백제를 구하려 했던 것은, 왜가 백제의 나라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로써 백제 부흥운동은 막을 내린다. / ⓒ KBS드라마)
이미 백제 왕족의 영향이 있던 왜였지만, 백제 유민의 대거 유입은 사회적인 큰 변혁을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일본은 한국과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신라는 당의 지배하에 스스로 들어갔고 백제지역은 혹독한 시련을 당합니다. 백강전투 전에도 10만 명을 동원한 당군을 전멸시켰던 고구려도 결국 내분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백제 의자왕의 다섯째 아들인 부여풍 풍장왕은 형인 부여융에게 패하여 고구려로 도망갔지만, 얼마후 고구려마저 멸망하여 당나라에 끌려갔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풍장왕의 최후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만약 백강전투에서 당과 신라를 격파했다면 당은 고구려 침략에 집중하기 어려웠을 것이므로 고구려 멸망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역사에서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백강전투(백강구전투)는 동아시아에서 당나라의 독주를 막는 마지막 저항이었을지도 모를 전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