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곽재우, 이산겸 - 임진왜란의 의병장, 역적으로 몰리다]
익호장군 김덕령장군은 이몽학의 난 때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서 죽었습니다. 홍의장군 곽재우장군도 역모를 했다는 의심을 받은 후 은둔하여 살았습니다. 이산겸장군은 송유진의 난 때 역시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었습니다.
김덕령장군, 곽재우장군, 이산겸장군 등의 역모 사건을 통해 역사를 보는 이들은 이순신장군이 전사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이순신도 선조와 정치세력에 의해 역적으로 몰렸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임진왜란 이후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에서 의병활동이 침체기를 맞게 된 것도 김덕령, 이산겸 등 역적으로 누명을 쓰고 죽은 의병장들이 영향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역적의 누명을 쓴 김덕령장군은 죽어서 신격화되다
김덕령 의병장군은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진주로 진출하여 왜군의 호남진격을 막아낸 의병장입니다. 충장공 김덕령장군은 역모누명을 쓰고 죽은 뒤 민간설화에 계속 나타나며 도술을 부리는 장군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실 김덕령의 의병활동 성과를 보면 큰 전투에서 승리했다거나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덕령이 백성의 존경을 받으며 후세에도 길이 남게 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역모 사건으로 고문을 받는 장면 / 출처: KBS 드라마 캡처)
그 첫 번째는 김덕령장군이 의병활동을 시작할 당시의 암울한 의병시기 때문입니다.
김덕령은 고경명 휘하에 들어가 왜군에 맞서 싸우려 했지만 어머니 간병으로 형만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경명이 관군과 함께 펼친 금산전투에서 관군이 도망가는 바람에 왜군에게 패하여 고경명과 형이 전사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더구나 진주전투에서는 10만에 달하는 왜군의 공격으로 의병장 김천일과 최경회도 패합니다. 김천일은 아들과 함께 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고 이 소식에 백성들은 불안해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 의병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가 왔습니다. 병력도, 무기도, 나라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처절히 싸우다 죽어간 의병들만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믿을 수 없던 관군의 역할을 지탱했던 의병들마저 왜군에게 연속으로 패하자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지며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습니다.
그런데 26세의 젊은 의병장 김덕령이 엄한 군율을 바탕으로 나타나니 백성들은 썩어빠진 관군보다 더욱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김덕령장군은 지혜가 제갈공명과 같고 용맹이 관우와 같은 장수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의병장 김덕령장군의 상상화)
그 두 번째는 김덕령장군의 억울한 죽음입니다.
명나라 참전 후 긴 휴전협상으로 임진왜란은 소강상태에 빠집니다. 물러나지 않은 채 주둔한 왜군 때문에 조선의 백성들은 고통을 받습니다. 명군의 허락 없이 단독으로 왜군을 공격하는 것도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조정은 의병의 힘이 너무 커질까봐 두려워하여 관군에 합류하라고 합니다.
지방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으니 반란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 중에 김덕령을 죽게 만든 반란이 있었으니 바로 이몽학의 난입니다.
김덕령장군은 충청지방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사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이몽학이 암살되어 난이 평정되었습니다. 당연히 김덕령은 다시 군사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역적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는 모함을 받습니다.
더구나 이몽학 반란세력을 조사하던 중 의병장들이 도운 것처럼 거론되어 김덕령, 곽재우, 고언백, 최담령, 홍계남 등이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김덕령은 뼈가 부러질 정도로 심한 고문 받았고, 결국 30세의 나이로 누명을 쓴 채 옥사하고 말았습니다.
국가에게 항의를 하지 못하지만 민심의 마음속에는 이 사건이 크나 큰 충격으로 오래 기억되게 됩니다. 김덕령은 그렇게 백성의 가슴에 남은 것입니다.
(광주시 북구 금곡동에 위치한 김덕령장군의 충장사 / 출처: heritage.go.kr)
곽재우장군은 회의를 느끼고 재야에 묻혀 살기를 바라다
백성에게 곽재우장군의 인기가 매우 높자 조정에서는 곽재우의 뒤를 감찰하기도 했었습니다.
김덕령이 무고하게 옥사를 치르다 죽는 정황을 다 보고 들은 곽재우는 조선에 실망을 하고 말년에도 초야에 묻혀 살게 됩니다. 그토록 전공을 세우고도 곽재우는 중앙 진출을 기피한 것입니다. 곽재우장군 뿐 아니라 김덕령의 부관인 최담령도 고초를 치루다 목숨은 건졌으나 재야에 숨어 폐인행세를 하며 살다 죽었습니다.
(주요 의병지역 출신도 / 키스세븐 자체제작)
스스로 만든 홍의장군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곽재우는 의령, 창녕, 정암진 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진주성 싸움의 김시민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곽재우장군은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나름 떵떵거리며 살던 곽재우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산을 모두 털어 의병을 모았습니다. 곽재우장군같은 사람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선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곽재우장군도 이몽학의 난 때문에 문초를 받았습니다. 반란의 무리들이 김덕령과 곽재우 등의 이름을 판 것은 백성의 신임이 두터웠던 의병장들을 거론하여 반란군의 세를 불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조정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회의를 가진 신하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된 조정세력과 선조는 애초부터 이들의 인기가 막강해지기 전에 제거할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인기가 왕권보다 높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홍의장군 곽재우장군의 동상)
이몽학의 난에 얽매어 조사를 받았으나 곽재우장군은 다행히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의병장 김덕령이 참혹하게 옥사한 것을 본 곽재우는 조선 왕조에게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내린 공신목록에서,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도망을 갔던 대신들은 80여명이나 공신에 올랐지만 전투에서 목숨을 걸었던 전공자들이 공신이 된 것은 겨우 18명이었습니다. 이렇게 힘들여 싸운 자들이 더 서러웠던 상황은 일제강점기 해방 후의 독립투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반복됩니다.
비록 무죄로 풀려나긴 했으나 곽재우장군은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하고 말았습니다. 이후에 정유재란 등이 일어나지만, 국가가 필요할 때만 나설 뿐 자기 할일을 하고 나면 벼슬을 사양하고 스스로 낙향하길 여러 번 하게 됩니다.
결국 곽재우는 초야에 묻혀 도가의 도를 닦으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조의 의심과 조정의 기득권 세력에 의해 국가의 인재는 국가를 멀리하는 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곽재우장군의 전투 활약 상상도)
역모를 하지 않았어도 처형해 버린 이산겸장군
이몽학의 난에 앞서 2년 전에는 송유진의 난이 있었습니다. 이 송유진의 난에서 억울하게 죽은 인물은 이산겸 의병장입니다.
이산겸장군은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 선생의 서자입니다. 충청도 출신으로 처음에는 의병장 조헌의 휘하에서 임진왜란에 맞섰습니다. 그러다 조헌장군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자 흩어지는 의병들을 수습하여 왜군을 막고자 하였습니다.
(이몽학의 난을 소재로 삼은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영화의 한 장면)
그러나 이산겸의 공적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산겸은 의병을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가 있기도 했었기에 오히려 의병을 가지고도 왜적과 싸우지 않았다는 빌미를 잡힐만 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산겸이 역적으로 국문을 받은 것은 엉뚱하게도 송유진의 난이었습니다. 송유진의 반란이 사전에 누설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뜬금없이 역모의 괴수는 이산겸이라고 송유진이 불어버린 것입니다.
그 이유로 이산겸은 체포되어 살을 지지는 등의 가혹한 고문을 받습니다. 이산겸은 끝까지 역모설을 부정하였고 실제로 증거도 없었습니다. 국문을 하였던 조정 대신들도 이를 알고 있었고 송유진의 패거리와 대질신문을 했을 때도 괴수는 송유진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산겸은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습니다.
선조가 말하기기를, 역모를 하지 않았더라도 역적의 입에서 이산겸이 오르내린 것은 역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의병과 관군 활약도 / 출처: leekcp.new21.org)
어떤 이는 말합니다. 선조가 김덕령과 이산겸 등을 죽인 것이 조선왕조의 치졸한 전략이었다는 얘기들은, 인터넷 때문에 생긴 몰가치 정보의 양산이라고...
약간의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검색해보면 류성룡 등의 대신들이 조금 더 취조하고 확인하자고 하지만 선조가 그럴 거 없다며 급히 결정하려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라는 썩어가도 의인들이 정권의 기득층에 의해 제거되고 있었다는 주장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 역사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로부터 반복되는 것이 무엇이며, 후세는 어떻게 달라지느냐 입니다.
권력이 상대를 제거하는 방법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국민이 "정부"와 "국가"를 동일시하도록 현혹시키는 것입니다. 권력은 자신이 아무리 잘못했어도 상대가 도전한다면 국가를 전복하려는 것이라고 누명을 씌워 제거합니다. 공산당이 그러하고 냉전시대의 미국도 마찬가지였고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직도 국민이 "국가"와 "정부"를 동일시한다면 그것은 현대화되지 못한 구시대식 사고방식입니다. 그런 국민들이 많다면 아무리 국가에 충성해도 정부에 반대했기 때문에 종북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생기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국가와 정부를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이제는 뒤쳐진 정부가 있다면 선거를 통해 다른 정부에게 국가를 맡기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 된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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