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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지식 칼럼

흥남철수 - 6.25전쟁 흥남철수작전의 배경

2015. 1. 19.
[흥남철수 - 6.25전쟁 흥남철수작전의 배경]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국제시장에 나왔던 6.25의 흥남철수작전은 왜 하게 되었을까요... 
그 전후 배경을 알아 봅니다. 


흥남철수작전 이전의 상황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북한군의 일방적인 전투력 우세 속에서 한국군의 위기가 연속되었습니다. 
한국군은 북한군에게 밀려서 남한 전지역을 포기하다시피 하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겨우 전력을 가다듬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해 9월, 인천에 대규모 군사상륙작전이 감행되었습니다. 적의 후방을 기습공격하여 선방부대의 보급로 및 후방공격이 감행된 이 작전으로 인하여 북한은 결국은 후퇴를 하게 됩니다. 
이후 전황은 의해 서울, 평양 이북으로 UN군이 파죽지세로 돌격하여 승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12월 중공의 참전으로 상황이 또 뒤집힙니다. 
익히 알려진 중공의 인해전술도 있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영하 20이하의 강추위와 중공군의 기동전술에 의해 UN과 군군은 다시 후퇴의 길에 오릅니다. 





왜 흥남철수작전을 해야 했나 

흥남철수는 중공군의 압박으로 UN군과 한국군의 후퇴를 위한 작전 중 서부전선 후퇴작전입니다. 

동부전선은 다행히 육로로 후퇴가 가능하였습니다. 그런데 서부전선이 문제가 됩니다. 
중공군은 한국전쟁에 참여하기 전에 오랜 기간 동안 내전을 치렀습니다. 
중공군은 중국 내전에 단련되어 매우 빠른 속도로 행군이 가능하여서 산악행군 속도마저도 UN군의 속도를 능가하였습니다. 




중공군의 이러한 기동전술이 흥남철수 작전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데, 중공군이 UN의 후퇴로인 원산을 먼저 점령해 버린 것입니다. 
서부지역의 UN군은 퇴로가 막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흥남에서 바다를 통해 탈출하기로 작전을 짭니다. 

이렇게 해서 흥남철수작전은 시작되었습니다. 흥남에 193척의 배와 수많은 비행기가 동원되어 집결하였습니다. 
후퇴한 미군 10만여 명이 집결하였으며, 북한을 탈출하려던 북한 주민들도 수십만 여명이 배를 타려고 몰려들었습니다. 

흥남철수작전을 통하여 미군 10만여 명과 민간인 약 10만 명이 탈출을 하였습니다. 
UN군이 이 작전을 통하여 전력을 보존하며 후퇴할 수 있었기에 훗날 반격을 할 수 있는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대부분 남한을 환영했던 사람들과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북한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살인과 탄압을 받았을 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이 흥남철수작전에서 많은 수의 피난민을 구조했기에 이 흥남철수작전에 동원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004년 단일 배로서는 최대의 인원을 구출한 배라고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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