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문종의 이혼과 결혼들 - 현덕왕후와 단종 죽음의 배경]
엄격한 유교국가의 왕인 조선 문종은 두 번의 이혼과 세 번의 결혼을 하였습니다. 성군이었던 세종이 아버지이고 문종 또한 출중한 학문과 성품, 그리고 외모까지 겸비한 엄친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이 엄격한 조선시대에 문종은 두 번이나 이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문종의 아들 단종이 왕권을 빼앗기는 것에도 연결되는데... 이 글은 문종과 부인들에 얽힌 조선 왕실의 뒷이야기입니다.
[이 글의 순서]
1. 문종의 첫 이혼 휘빈 김씨
2. 문종의 두번째 이혼 순비 봉씨
3. 현덕왕후와 단종
문종의 첫 번째 결혼과 이혼 - 휘빈 김씨
태평성대를 연 세종에게 '문종'은 아주 특별한 세자였습니다. 유교국가를 표방하며 조선이 건국되었지만,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으로 인해 직계 장자가 왕위에 오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적자이며 장자인 문종은 비로소 조선건국에 걸맞은 왕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유교 근본주의 국가운영을 원하는 세종의 바람대로 문종은 어려서 부터 학문에 출중하고 능력 또한 뛰어나서 많은 기대를 받았습니다. 거기다가 외모마저 잘 생기고 성품까지 좋았으니 재위기간이 길었다면 세종 - 문종 - 단종으로 이어지는 최고의 번성을 이루었을지 모릅니다.
(사진: 문종은 잘 생기고 어질고 능력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문종의 이름은 "이향"이다. [문종의 첫 번째 결혼과 이혼 - 휘빈 김씨] / ⓒ KBS 드라마 대왕세종 캡처)
조선 문종은 열네 살에 안동 김씨 가문의 '휘빈 김씨'와 혼인하였습니다. 문종의 이혼과 결혼에서 첫 번째 부인이 되는 휘빈 김씨는 간택 제도에 의해 선발되었습니다. 간택 제도는 3대 왕인 태종 때 생긴 제도입니다.
'태종'이 부마를 맞기 위해 청혼을 넣었었으나, 후궁의 딸에게 아들을 줄 수 없다는 상대의 말을 듣고는 발끈하여 만든 제도입니다. 그때 상대는 서인으로 몰락하였으며 그 아들에게는 평생 혼인할 수 없도록 금혼령으로 보복하였습니다. 태종 때 만들어진 간택제도는 세종에 와서 3차에 걸친 제도로 더 체계화되었고 휘빈 김씨는 그 어려운 관문을 뚫고 문종과 혼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사극에 나오는 간택장면. 조선은 초간, 재간, 삼간의 삼간택 제도를 둬서 엄선하여 세자빈을 뽑았다. [문종의 첫 번째 결혼과 이혼 - 휘빈 김씨] / ⓒ 드라마 캡처)
그런데 문제는 유교적 관념에 맞는 며느리를 뽑다보니, 수려하게 잘 생긴 문종에 비해서 너무나 못 생긴 왕비를 간택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문종보다 네 살 연상이고 키까지 남자만큼 컸으니 문종이 보기에 이성적 매력을 못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세자였던 문종에게는 '효동'과 '덕금'이라는 궁녀들이 있었고 그들을 매우 총애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문종은 밤늦게까지 학문에 매진한다는 이유로 휘빈 김씨를 찾지 않고 효동과 덕금의 시중을 받았습니다. 효성 깊고 말 잘 듣는 문종이었지만, 세종이 아무리 달래도 마음이 가지 않으니 휘빈 김씨를 멀리했습니다.
(사진: 문종의 이혼에는 휘빈 김씨, 효동, 덕금이라는 여인들이 등장한다. 첫 세자빈은 미신비방을 행하다가 폐서인이 되었다. [조선 문종의 이혼과 결혼들 - 단종 죽음의 배경] / ⓒ ddol-mang)
세자빈 휘빈 김씨는 효동과 덕금에게 가 있는 문종의 마음을 빼앗아 오려고 하다가 각종 속설과 민간비방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궁녀들의 신발을 훔쳐서 태운 후 문종의 술에 몰래 타서 마시게 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뱀이 교미를 나눌 때 나오는 액을 묻힌 손수건을 지니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들통이 나고, 시어머니인 '소헌왕후'가 국문에 나서서 휘빈 김씨를 폐서하며 비방을 시행한 시녀를 참형에 처했습니다. 문종의 이혼이 첫 번째로 이루어진 순간입니다. 인성이 좋았던 문종이었으나 마음이 가지 않는 남녀관계는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한편으로 휘빈 김씨 입장에서는 가여운 일이기도 합니다.
(사진: 문종은 세종대왕 후반의 7년간 실질적인 군주였다. 세종의 후반업적은 사실 문종의 업적이기도 하다. [문종의 첫 번째 결혼과 이혼 - 휘빈 김씨] / ⓒ Daderot)
문종의 두 번째 결혼과 이혼 - 순빈 봉씨
조선 문종의 이혼은 휘빈 김씨의 폐서인 처리로 막을 내렸는데, 이상적인 유교국가를 건설하려던 세종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었습니다. 당시의 이혼은 엄격하게 금지되던 시대였습니다. 양반의 이혼은 국가의 이혼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했을 만큼 조강지처를 강조하는 조선의 유교덕목은 강요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세종대에는 왕이 직접 협박 수준의 강요를 가해서 이혼을 막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왕비가 될 사람이 유교를 떠나 미신에 현혹된다는 것은 허용될 수 없기에 세자였던 문종의 이혼은 예외적으로 허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진: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이혼은 매우 엄격히 금지된 것이었다.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엄격했으나 문종은 두번이나 이혼을 했었다. [문종의 두 번째 결혼과 이혼 - 순빈 봉씨] / ⓒ hiking)
휘빈 김씨와 문종의 이혼이 있은 후,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는 문종의 두 번째 혼인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결혼이 유교적 관점에 너무 치중해서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 왕실에서는 이번엔 많은 신경을 써서 새로운 세자빈 간택을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문종의 두 번째 부인인 '순빈 봉씨'입니다.
세종은 조신하고 참한 규수를 골랐던 첫 번째 간택조건에서 벗어나, 이번에는 좀 더 자유분방한 순빈 봉씨를 선택했지만 이게 또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문종의 이혼이 이성적 매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성군 세종의 아들이므로 문종 역시 유교덕목을 중시하는 인물이었으니 말입니다.
(사진: 건원릉 정자각의 모습. 유교적 관습이 강력한 사회에서 문종의 이혼이 두번이나 이뤄진 것은 비방과 동성애 때문이었다. [문종의 두 번째 결혼과 이혼 - 순빈 봉씨] / ⓒ shrhd25)
문종의 두 번째 부인인 순빈 봉씨는 작고 아담한 여자로 알려져 있는데, 의외로 음주가무를 대단히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유교 학문을 중시하는 문종이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문종은 순빈 봉씨를 휘빈 김씨 이상으로 피했습니다. 그런데 순빈 봉씨는 오히려 애교를 부리고 술에 취해서 문종을 귀찮게 굴었으니 문종이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순빈 봉씨는 상궁을 폭행하고 뒷간에서 일보는 궁녀들을 훔쳐보는 등 기이한 행동을 계속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임신을 했다고 거짓말을 한 후, 유산을 했다고 얼버무리는 가짜 임신 소동의 들통 나면서 세종의 눈 밖에 나고 말았습니다.
(사진: 문종의 두번째 세자빈은 음주가무를 즐겼으므로 문종의 사랑이 멀어졌다. 결국, 김씨든 봉씨든 문종의 외면 때문에 비극을 맞는다. [조선 문종의 이혼과 결혼들 - 단종 죽음의 배경] / ⓒ Veronica)
결정적으로 두 번째로 문종의 이혼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순빈 봉씨의 레즈비언 성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순빈 봉씨는 문종이 관심을 주지 않자 자신의 시종이었던 '소쌍'과 동침을 하였습니다. 역사의 해석에서 고려 말이 지난 지 겨우 30여년 된 시점이므로 자유로운 동성애가 아직 존재할 때라는 의견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유교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세종이 궁녀 소씩에게 이 사실을 물었고 소쌍은 순진하게도 동성애 성관계 사실을 곧이곧대로 실토하므로써 마침내 순빈 봉씨도 폐서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왕실의 레즈비언 동성애는 충격적인 사건이기에 두 번째 문종의 이혼 사유는 순빈 봉씨가 출산을 못하고 투기가 심했다는 이유로 기록되었습니다.
(사진: 문종의 순빈 봉씨는 레즈비언 동성애 성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도 이 사실을 알고는 허탈해했다고 한다. [문종의 두 번째 결혼과 이혼 - 순빈 봉씨] / ⓒ JTBC 드라마 캡처 인용)
문종의 세 번째 결혼과 단종 - 승휘 권씨
조선 문종의 이혼이 두 번이나 있었던 것은 이혼에 엄격했던 조선에서 몹시 부담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문종의 세 번째 혼인은 따로 치루지 않고 후궁 중에서 세자빈을 고르기로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나중에 단종의 어머니가 되는 '현덕왕후'입니다.
순빈 봉씨가 문종의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온 후에도 문종의 가정이 안정되지 않자, 대신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세종은 3명의 후궁을 더 들였었습니다. 이때 '승휘 권씨, 승휘 홍씨, 승휘 정씨'가 조선 문종의 후궁이 되었고, 문종은 승휘 홍씨를 총애하였습니다. 그러나 레즈비언 동성애 사건으로 순빈 봉씨가 폐서인이 된 후 세종은 새 세자빈에 안동 권씨 가문의 승휘 권씨를 정했습니다.
(사진: 문종의 마지막 부인이며 단종의 어머니인 승휘 권씨는 나중에 현덕왕후로 추존된다. [문종의 세 번째 결혼과 단종 - 승휘 권씨] / ⓒ Adela KIM)
문종의 두 번의 이혼 후 세 번째 부인이 된 승휘 권씨는 차분하고 남편을 편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세자 문종의 가정이 안정되고 얼마 후 원손을 임신하여 세종에게도 기쁨을 주었습니다. 문종의 나이 28세가 되던 해에 승휘 권씨는 원손을 낳았습니다. 이 원손은 나중에 삼촌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게 되는 '단종'입니다.
하지만 문종은 끝까지 부인복이 없었는지 승휘 권씨가 다음 날 산후병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세종 말년, 세종을 대신하여 7연간이나 대리청정을 했던 문종이 1450년 즉위하면서 승휘 권씨는 현덕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이후 문종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조선 왕조에서 유일하게 왕비가 없었던 왕이 되었습니다.
(사진: 단종의 초상화. 12세의 나이로 왕에서 쫓겨냐야 했던 단종. 어머니 현덕왕후와 아버지 문종이 빨리 죽었기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문종의 세 번째 결혼과 단종 - 승휘 권씨] / ⓒ 미상)
조선 초기의 태평성대를 열었던 성군 세종, 그리고 학문에서부터 군사분야까지 다방면에 출중한 능력을 가졌던 문종... 이러한 배경에다 칭찬받는 성품과 수려한 외모까지 갖춘 왕이었지만 실제 재위기간은 겨우 2년에 그쳤습니다. 서른아홉 살에 사망한 문종의 사망 원인은 등에 생긴 화농성 종기인 '등창'입니다.
하지만 그 보다도 유교 도리를 지키려던 지나친 혹사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우였던 '광평대군', '평원대군'의 장례에서부터 어머니 소헌왕후, 아버지 세종의 상에 이르기까지, 유교군주이며 효성이 깊었던 문종은 3년상까지 치르며 체력이 고갈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은 열두 살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조선 최대의 성군인 세종대왕, 문종, 그리고 비참한 단종에 이르기까지의 왕실의 이혼과 결혼에 얽힌 뒷이야기가 있었다. [조선 문종의 이혼과 결혼들 - 단종 죽음의 배경] / ⓒ Daderot)
그런데 이것은 피비린내 나는 '계유정난'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자마자 사망한 후 왕비가 없었기 때문에 수렴청정을 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은 '성종'의 어머니인 '정희왕후'에 이르러서 처음 이루어집니다. 삼촌인 '수양대군'은 이 틈을 노려서 조카 단종을 죽이고 제7대 왕인 '세조'가 되었습니다. 문종도 현덕왕후도 없는 왕실은 권력공백 그 자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조선 문종은 두 번의 이혼과 세 번의 혼인을 하면서 참으로 여복이 없었던 왕입니다. 단종의 죽음은 수양대군 세조가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역사를 길게 돌이켜 놓고 보면 문종이 제대로 된 짝을 만나지 못하던 시점에까지 연결되며 안타까움을 만들어 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