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복의 생애와 독도 사건 - 독도영유권을 위해 활약한 조선시대 어부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독도는 첨예한 분쟁지역입니다. 독도 영유권 문제는 국제적으로도 영향이 크기 때문에, 역사에서 실효적 지배를 누가 해 왔냐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이때 중요한 인물로 기록된 사람이 독도사건의 안용복입니다. 안용복의 생애는 조선의 미천한 신분이었다고 하지만, 역사적 활약으로 조선이 독도를 지배했다는 기록이 남도록 하는 공헌을 세웠습니다.
안용복의 생애 - 독도 사건의 활약
안용복은 1690년대 숙종 때의 인물로, 왜에게 조선의 공식적인 독도 영유권을 위해 활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조선을 대표할 관리이거나 지도층이 아니라, 안용복의 생애가 미천한 신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하지 못한 일을 사노비출신의 안용복이 해낸 사건이 독도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이 사건을 개기로 일본은 자국민의 독도출입을 금하였고, 그 이후 19세기 말까지 왜의 반대 없이 조선의 관할 아래 두게 되었습니다.
(사진: 경상북도 울릉군의 독고박물관에 있는 안용복 동상. [독도 - 안용복 독도사건과 안용복의 생애와 활동] /ⓒ dokdomuseum.go.kr)
안용복의 생애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습니다. 안씨라는 성이 있지만, 이것은 독도 사건으로 일본의 왜에게 잡혀 조사받을 때 지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면 안용복의 출신이 사노비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 초기에 미천한 신분이 성을 가진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산의 동래에서 태어나서 좌천동 인근에 살았으며, 수군에서 군역을 했던 것 정도가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의 부산포는 왜의 대마도와 무역이 허락되어 있었으므로, 이때 일본어를 배웠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진: 조선시대 부산포의 지도. 1872년 지도이므로 안용복의 1693년 독도사건으로 부터 약 180년 후이다. [독도 - 안용복 독도사건과 안용복의 생애와 활동] / ⓒ 미상)
안용복의 독도 사건 활약은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는 조선의 공도정책(섬을 비우는 정책)을 어기고 불법으로 울릉도에 가서 어업을 하면서 시작됩니다. 울산과 부산의 어부들 40명이 울릉도로 갔다가, 마침 왜에서 어업을 온 자들에게 안용복과 박어출이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어업권에 대한 논쟁이 붙던 중 일본 어부가 제시한 허가증을 확인하자는 실랑이 끝에 일본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어떤 기록에는 안용복이 술수에 빠져서 납치되었다고도 하는데, 안용복의 생애에서 큰 시련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사진: 경상북도 울릉군의 독고박물관에서 전시된 안용복 피납사건의 상상모형. [독도 - 안용복 독도사건과 안용복의 생애와 활동] / ⓒ dokdomuseum.go.kr)
첫 번째는 울릉도에서 일본 어부와 다투다가 우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두 번째는 안용복이 작심하고 일본에 가서 항의를 하였습니다. 죽도 인근에서 어업 중인 일본어선에게 호통을 치니 왜인들은 본국으로 도망을 쳤는데, 안용복이 끝까지 쫓아가서 호키슈 태수에게 정식 항의를 하고 온 것입니다.
안영복의 생애가 오늘날 중요한 것은, 그 활약 덕분에 조선-일본 간 정부가 정식으로 독도에 대한 문서까지 교환하므로써 역사적 증거자료가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토 영유권 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그 나라의 영토였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진: 독도의 아름다운 동도 모습. 아래쪽에 배를 댈 수 있는 시설이 보인다. [독도 - 안용복 독도사건과 안용복의 생애와 활동] / ⓒ 미상)
안용복의 생애 - 2차에 걸친 독도 사건 활약
왜의 어선에 태워져 오키섬으로 가게 된 안용복은 호키슈로 보내졌습니다. 그때마다 일본인이 조선의 영토를 넘어왔다고 항의했고, 이곳의 태수는 에도막부에게 어찌해야할지를 묻는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에도막부는 무력으로 섬을 빼앗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작은 섬 하나 때문에 이웃나라가 다투는 것은 곤란하다는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나중에 안용복이 조선에서 조사받을 때 말하기를, 에도막부의 명령으로 다시는 일본인이 울릉도 인근 조업을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서찰도 받았으나 대마도 도주에게 빼앗겼다고 했습니다.
(사진: 한국과 울릉도, 독도, 일본까지의 거리와 대마도 거리 비교 지도. 구글지도에 편집하였다. [독도 - 안용복 독도사건과 안용복의 생애와 활동] / ⓒ google지도, www.kiss7.kr 편집)
안용복은 대마도를 통해 부산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대마도 도주는 부산의 왜관에 이들을 감금하고 에도막부와 다른 입장을 취합니다. 안용복을 고문하고 문서를 빼앗은 것입니다. 그러고는 조선 조정에 문서를 보내서, 표류 중인 조선인을 구해줬으나 앞으로 조선인이 죽도에 가지 못하도록 해 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이것이 에도막부와 다른 뜻임을 눈치 채고 오히려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못 박아 버렸고, 일본은 조업금지령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대마도 도주의 욕심은 실패하였지만, 안용복의 생애 중 2년은 그대로 감금된 채 보내게 되었습니다.
(사진: 부산포 동래 초량왜관도. 18세기 작품으로 안용복의 활동시기보다 나중이다. 안용복은 왜관에서 감금되어 2년을 보냈다. [독도 - 안용복 독도사건과 안용복의 생애와 활동] / ⓒ 미상)
감금에서 풀려난 안용복은 이번엔 작심하고 11명의 승려와 합심하여 다시 울릉도로 향하는 활약을 했습니다. 역시나 일본 어선이 조업 중이었고 호통을 치자 도망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안용복 일행은 일본까지 쫓아가서 책임자를 만나 항의했습니다. 이때 안용복은 자신을 울릉 우산 양도 감세장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울릉도와 독도의 세금을 거두는 관리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런 난리를 겪자 다음 해에 에도막부는 대마도 도주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재발방지를 약속하게 됩니다. 이로써 일본인의 울릉도 인근 출입은 19세기까지 금지되게 됩니다.
(사진: 아름다운 독도. 영어로 Liancourt Rocks라고 불린다. 영문 위키백과를 보면 독도가 일본해에 있다고 잘못 표기되어 있다. [독도 - 안용복 독도사건과 안용복의 생애와 활동] / ⓒ 김지호)
독도사건 이후의 안용복의 생애도 평탄치는 않았습니다. 강원도로 귀국한 안용복은 곧 바로 붙잡혀서 심문을 당했습니다. 의금부에 하옥되며 조정에서 중요하게 논의가 되었고, 사형논란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죄명은 왜에 불법 월경한 죄와 관리사칭죄였습니다. 천한 신분의 안정복이 일본에서 조선 관리노릇을 했던 것은 유교시대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정복의 활약으로 일본 정부가 울릉도 인근 접근금지를 받아들이게 된 공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결국 귀향으로 최종 결정되고 그 이후의 안정복의 생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사진: 대마도표석. 경상북도 울릉군의 독도박물관에는 대마도가 원래는 우리땅이었다는 내용의 표석이 있다. [독도 - 안용복 독도사건과 안용복의 생애와 활동] / ⓒ dokdomuseum.go.kr)
안용복의 독도 사건에 대한 자세한 배경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독도영유권 분쟁에서 안용복이 주는 시사점은 매우 큽니다. 한 명의 백성 때문에 국가 간의 정식 문서가 오고갈 만큼 큰 사건이 된 배경은 조선초기부터 시작됩니다.
태종 때부터 조선은 공도정책을 썼습니다. 공도정책이란 외딴 섬의 주민을 모두 본토로 이주시켜서 섬을 비우는 정책입니다. 겉 표면은 왜구로 부터 백성을 지킨다는 명분이었지만, 내면에는 상류층의 핍박을 피해 섬으로 도망가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동쪽지역이 소홀해졌고 일본은 자유로이 드나들며 어업을 한 상황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진: 울릉도의 자연.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는 조선의 공도정책 때문에 일본이 함부로 드나드는 일이 벌어졌다. [독도 - 안용복 독도사건과 안용복의 생애와 활동] / ⓒ korea.net)
거의 70년을 그나들던 왜인들에게 안용복이 독도 지키기에 나선 것은 의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도막부에게 결정을 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은 임진왜란을 치룬지 100년 정도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서로 간에 새로운 충돌이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조정이 순응하며 자국민의 울릉도 출입을 금지시킨 것도, 조선 정부가 문서에서 울릉도만 조선 땅이고 죽도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표현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용복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양쪽 정부의 이런 대응은 지금 또 다른 논란의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사진: 안용복이 활약했을 당시 사용되었을 판옥선의 모습. 안용복은 독도에 대해 송도가 곧 자산도라고 했다. [독도 - 안용복 독도사건과 안용복의 생애와 활동] /ⓒ dokdomuseum.go.kr)
일본 측이 주장하는 안용복의 독도사건을 보면, 일본은 이 사건을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로 한정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실제 충돌이 울릉도인지 죽도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는 중이며, 안용복은 독도를 실제로 보지도 못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런 논란은 사실 일본 측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지만, 당시에는 울릉도를 다케시마라고 하고 독도는 마쯔시마(송도/松島)라고 했었기 때문에 일본 스스로 혼란을 겪는 중입니다. 지금의 다케시마가 확정된 건 겨우 1900년 초기에 와서 입니다.
(사진: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있어야만 영토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해외에서는 일본의 홍보 때문에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다. [독도 - 안용복 독도사건과 안용복의 생애와 활동] / ⓒ 미상)
반면 당시 안용복은 일본이 당시 독도를 일컫는 송도에 대해 그것이 "자산도"임을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자산도는 우리에게 독도인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이 안용복 독도사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만 너무 믿는다고 주장합니다. 미천한 안용복이 월경죄와 사칭죄를 두려워하여 자신의 활약상을 부풀려서 조사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안용복 독도사건으로 인하여 양국 간에 정식으로 울릉도, 독도문제를 협의하게 하여 역사적 증거를 남긴 것입니다. 귀향으로 생애를 마친 안용복일지는 모르지만, 조선 이후 한국의 어느 누구도 그의 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