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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지식 칼럼

프랑크왕국은 카룰루스(샤를마뉴) 대제 이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되다

2015. 3. 31.
[프랑크왕국은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 이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되다] 



프랑크왕국이 세워질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 

서로마제국 멸망 후 게르만족이 프랑크왕국을 세웠는데, 2개의 왕조가 있었으며 약 380년간 유럽을 지배했었습니다. 프랑크왕국은 카롤루스대제의 손자 대에서 세 왕자가 나라를 나누어 상속 받는데, 이것이 지금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모태가 됩니다. 게르만족은 자식들에게 영토를 나눠서 상속시키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영토를 쪼개서 물려주었습니다. 



당시 프랑크왕국은 지금의 프랑스, 독일(구 서독지역), 이탈리아 중북부, 스위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의 영토를 합한 지역과 거의 유사한 지역을 영토로 차지하였습니다. 프랑크라는 뜻은 강한 자, 용감한 자, 자유로운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프랑크왕국은 서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적 게르만 통일국가를 이루었습니다. 프랑크왕국은 그 이후 유럽의 카톨릭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 서유럽에 공통의 정치적, 문화적 통일성을 주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가집니다. 프랑크왕국은 중세까지의 여러 제도에 영향을 주었고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국가들의 뿌리 역할을 했기 때문에 서유럽을 이해하려면 관심 있게 봐 두어야 할 역사이기도 합니다. 


(출처 : wikimedia.org 카롤루스 대제의 동상)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던 로마제국은 4세기 말에 동서 로마제국으로 분열된 뒤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수백 년간 존재합니다. 그러나 강력했던 동로마제국에 비하여 서로마제국은 국력이 미약하여 게르만족, 색슨족, 반달족, 훈족 등에게 계속적인 침략을 받아 오다가 5세기 중반이후 멸망을 하게 됩니다. 서부유럽에 공백기가 생긴 것입니다. 

마침 5세기 유럽은 유명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독일의 라인강을 경계로 하여 동쪽에는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훈족이 대제국을 세웁니다. 그 이전에 와 있던 게르만족은 이 훈족에 쫓겨서 라인강 서쪽으로 이동하여 토착민들과 군소왕국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유럽 동쪽의 훈족 대제국은 오래 가지 못하고 사분오열되는 역사를 맞으며 소멸해 버렸습니다.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가 이어지다 

게르만족 중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프랑크족이 중심이 되었으며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메로빙거 왕조가 8C까지 지배하였습니다. 
실질적인 초대 왕인 클로비스왕은 마구 분열되어 있던 프랑크족들을 통일합니다. 더불어 원래 프랑크족은 아리우스파 등 다신교를 믿는 민족이었는데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로마교황청의 영향에 들어갑니다. 

왕이 죽으면 영토를 자식들에게 분할하여 상속하는 게르만족의 풍습 때문에 프랑크왕국은 분열되었다가 6세기에 다시 통일됩니다. 이때 수도를 파리로 옮기게 됩니다. 또 프랑크왕국은 같은 이유로 다시 분열되었다가 7세기에 통일됩니다. 이 전통 때문에 프랑크왕국은 분열과 통일을 반복하며 형제 간의 투쟁도 벌어지게 됩니다. 


세월이 흐르며 왕권이 약화되고 실질적 주체는 귀족대표가 맞게 되었는데,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권력이 강화된 귀족대표 피핀은 왕을 폐위하고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습니다. 당시 프랑크족은 성씨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만 있는 왕이 꽤 있습니다. 카롤링거 왕조라는 말도 집안에 카롤이라는 이름이 많기 때문에 지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피핀은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한 후 로마교황에게 기증하며 로마교황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나갔습니다. 
그 후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은 또 다시 두 아들에게 분할 상속이 되었습니다. 
8세기 말에 피핀의 아들인 카롤루스 대제가 이를 통일하고 카롤링거 왕조는 프랑크왕국의 기반을 탄탄하게 잡아 갑니다. 




유럽의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

8세기 후반에 드디어 유럽의 아버지로 불리는 카롤루스(샤를마뉴)대제가 즉위합니다.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는 마침내 서기 800년에 로마 교황의 축복 아래 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유럽 역사에서 카롤루스가 중요한 까닭은 카롤루스가 프랑크왕국의 최대 영토를 확립했고 문화적 발전을 이루어서 현대 유럽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카롤루스 대제는 영토를 확장하고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임명되어 서로마제국을 부활시킴으로써 중세유럽을 정립하게 됩니다.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가 황제로 있는 동안 학문과 교육을 진흥하여 교육기관 설치와 학문연구가 활발하였기에 프랑크왕국의 르네상스라고 하기도 합니다. 

사실 당시 교황청은 매우 곤욕스러운 처지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분열된 후 서로마제국이 멸망했기 때문에 로마의 교황은 동로마제국의 홀대를 받아왔었습니다. 마침 서로마제국의 영토에 강력한 프랑크왕국이 들어서면서 로마교황은 이들과 연대를 할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프랑크왕국은 교황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대신 황제의 지위를 받는, 일종의 거래이기도 합니다. 

카롤루스 대제는 프랑스어로 샤를마뉴라고도 하는데, 카롤루스의 프랑스어 발음이 샤를이고 대제의 프랑스어가 마뉴이기 때문입니다.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가 9세기 초에 죽었는데, 게르만 전통에 따라 아들들에게 상속을 주려 했었지만 아들들이 이미 요절하고 한명 밖에 없었기 때문에 루트비히에게 전 왕국을 상속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루트히비의 아들들은 야욕이 강하여 서로 왕국을 차지하려고 반란을 일으키고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좌) 베르됭 조약 후의 경계 / (우) 메르센 조약 후의 경계

결국 베르됭 조약을 맺고 세 아들은 프랑크왕국을 쪼개어 물려 받았습니다. 
왕자들은 나라를 삼분하여 상속받는데, 장남이 이탈리아부터 네덜란드까지를, 차남이 프랑스지역을, 삼남이 독일지역을 다스립니다. 로마황제의 지위는 장남이 상속 받았는데, 이렇게 해서 서프랑크, 중앙프랑크, 동프랑크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9세기 후반에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은 다시 다툼을 벌였습니다. 중앙프랑크 왕국의 북쪽인 네덜란드와 그 이하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메르센 조약을 맺으며 중앙프랑크가 북쪽 영토를 동서 프랑크 왕국에게 넘겨주면서 국경을 확정하게 됩니다. 이 국경이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경계가 되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이 중에서 동프랑크왕국이 가장 번성하여 오토대제를 거치며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왕가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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