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키스세븐

조선상고사 (원본) / 삼조선(三朝鮮) 분립시대 - 제3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불朝鮮'" 본문

유용한 지식 칼럼/역사&사건

조선상고사 (원본) / 삼조선(三朝鮮) 분립시대 - 제3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불朝鮮'"

키스세븐지식 2023. 4. 12. 00:00
공유하기 링크
필요하면 공유하세요 ^^
이 블로그를 북마크 하세요! 좋은 정보가 계속 이어집니다.

조선상고사 (원본)

삼조선(三朝鮮) 분립시대 - 제3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불朝鮮'"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책 조선상고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총 12권)

그러나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중요 부분에 형광색을 하여 요약 파악에 쉽도록 도움이 첨부된 포스팅입니다. 

(참고: 《조선상고사》(저자 신채호)는 저작권 만료로 현재 CC0이 되어 있음)

 

 

 

이 블로그는 "심심할 때 잡지처럼 읽는 지식"이라는 목적으로 운영됩니다. 즐겨찾기(북마크) 해 놓으면 심심할 때 좋습니다. 

 


 

조선상고사 (원본) / 삼조선(三朝鮮) 분립시대 - 제3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불朝鮮'"

 

 

'불朝鮮'의 서북 변경을 빼앗김

 

불조선이 신조선과 합작하다가 연에게 패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했으므로 여기에서는 다만 그 잃은 땅이 얼마나 되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위략에, “진개 ( 秦開 ) 가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 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에까지 이르렀다 ( 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播汗爲界 ). ”고 하여, 선유 ( 先儒 ) 들은 조선과 연의 국경을 지금의 산해관 ( 山海關 ) 으로 잡고, 진개가 빼앗은 2 천여 리를 산해관 동쪽의 종선 ( 從線 ) 2 천여 리로 잡아서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찾으려고 하였지마는 이는 큰 착오요 억지 판단이다.

사기나 위략을 참조해보면, 진개가 빼앗은 토지가 분명히 상곡에서 부터 요동까지이니 만반한을 요동 이외에서 찾으려 함은 옳지 못하다.

한서지리지에 의거하면 요동군현 ( 遼東郡縣 ) 중에 '문 ( 汶 ) · 번한 ( 番汗 )'의 두 현이 있으니, 만반한은 곧 이 문번한이다. 문현 ( 汶縣 ) 은 비록 그 연혁이 전해지지 못하였으나, 번한 ( 番汗) 은 지금의 개평 등지 이므로 문현도 개평 부근일 것이니, 반만한은 지금의 해성 · 개평 등의 부근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구하려 함은 무엇에 의거함인가? 대개 만반한은 진개가 침략해왔을 때의 지명이 아니고, 후세 진 ( 秦) 나라 때 혹은 한 ( 漢 ) 나라 때의 명칭임을, 위략의 저작자가 이를 가져다가 진개 침략 때 두 나라의 국경을 입증한 것일 것이며, 번한 ( 番汗 ) 은 '불한'의 옛 서울 부근임으로 하여 이름한 것일 것이다.

사기의 1 천여 리는 신조선이 잃은 땅만 지적한 것이요, 위략의 2 천 여 리는 신 · 불 두 조선이 잃은 땅을 아울러 지적한 것이니, 상곡 · 어양 일대는 신조선이 잃은 땅이요, 요동 ( 遙東 ) · 요서 ( 遙西 ) · 우북평 ( 右北平 ) 일대는 불조선이 잃은 땅이다. 만반한은 사군 ( 四郡 ) 연혁의 문제와 관계가 매우 깊은 것이니, 이 절 ( 節 ) 은 독자가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불朝鮮'의 진(秦)·한(漢)과의 관계

 

연왕 ( 燕王 ) 희 ( 喜 ) 가 진시황에게 패하여 요동으로 도읍을 옳기니불조선이 지난날 연에 대한 오래된 원한을 잊지 못하여 진과 맹약하고 연을 토벌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진시황이 몽념으로 하여금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불조선이 진과 국경을 정하는데, 지금의 헌우란 ( ) 이남의 연안 수백 리 땅엔 두 나라의 백성이 들어가 사는 것을 금했다. 사기의 이른바 고진공지 ( 故秦空地 ) 란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위략에 의거하면 이때에 불조선왕의 이름을 '부 ( 否 ) '라 하였으나 위략과 마찬가지로 관구검이 실어간 고구려의 문헌으로 자료를 삼은 삼국지와 후한서의 동이열전 ( 東夷列傳 ) 에는 부 ( 否 ) 를 기록하지 아니하였으니, 위략에서 신조선 말엽의 왕 곧 동부여왕 ( 東扶餘王 ) 이 된 부루 ( 夫婁 ) 를 부 ( 否 ) 로 와전함인가 하여 여기에 채용하지 아니한다.

기원전 200 여 년경에 기준 ( 箕準 ) 이 불조선왕이 되어서는 진의 진승 · 항적 · 유방 ( 漢高祖 ) 등이 모반하여 지나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상곡 · 어양 · 우북평 등지의 조선 옛 백성과 연 ( 燕) · 제 ( 齊 ) · 조 ( 趙 ) 의 지나인들이 난을 피하여 귀화하는 자가 많은지라, 기준이 이들에게 서쪽의 옛 중립 공지 ( 空地 ) 에 들어가 사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한고조 유방이 지나를 통일하자 기준이 다시 한과 약조를 정하여 옛 중립 공지는 불조선의 소유로 하고, 헌우란으로 국경을 삼았다. 사기 조선전 에, “한 ( 漢 ) 이 일어나니 물러나 패수 ( 浿水 ) 로 경계를 삼았다 ( 漢興...至浿水爲界 ). ”고 하고, 위략에, “한이 일어나자 노관 ( 盧) 으로 연왕 (燕王) 을 삼고, 조선은 연과 패수를 경계로 하였다 ( 乃漢以盧爲燕王 朝鮮興燕 界於水 ). ”고 한 것 ( 先儒들이 는 浿의 잘못이라 했으므로 이를 쫓는다 ) 이 다 이것을 가리킨 것이니, 대개 불조선과 연이 만반한으로 경계를 정했다가 이제 만반한 이북으로 물러났으니, 두 책의 패수 ( 浿水 ) 는 다 헌우란을 가리킨 것임이 분명하다. 선유들이 왕왕 대동강을 패수라고 고집함은 물론 큰 잘못이거니와, 근일 일본의 백조고길 ( 白鳥庫吉 ) 등이 압록강 하류를 패수라고 하니 또한 큰 망발이다. 위의 패수에 관한 논술은 앞 절의 만반한과 다음 절의 왕검성과 대조하여 볼 것이다.

 

위만(衛滿)의 반란과 '불朝鮮'의 남천(南遷)

 

기원전 194 년에 한 ( 漢 ) 의 연왕 ( 鮮王 ) 노관 ( 盧) 이 한을 배반하다가 패하여 흉노로 도망하고, 그의 무리 위만 ( 衛滿 ) 은 불조선으로 들어와 귀화하니, 준왕 ( 準王 ) 이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관 ( 博士官 ) 에 임명해서 패수 서쪽 강변 ( 옛 중립 공지 ) 수백 리를 주어 그곳에 이주한 구민 ( 舊民 ) 과 연 · 제 · 조의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위만이 이로 인하여 군사를 만들어 더욱 조선과 지나의 망명 죄인을 데려다가 결사대를 만들어, 그 병력이 강대해지자, “한나라 군사가 10도 ( 道 ) 로 침략해 들어온다.”는 거짓 보고를 준왕에게 보고하고 준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들어와 왕을 시위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얻어가지고 정병으로 달려와 기준의 서울 왕검성을 습격하니, 준왕이 항거해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좌우 궁인 ( 宮人) 을 싣고 패잔한 군사로 바닷길을 쫓아 마한의 왕도 ( 王都 ) 월지국 ( 月支國 ) 으로 들어가서 이를 쳐 깨뜨리고 왕이 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마한의 여러 나라가 함께 일어나서 준왕을 토멸하였다.

왕검성은 대단군 ( 大檀君 ) 제 1 세의 이름으로 그 이름을 삼은 것인데, 대단군의 삼경 ( 三京 )---- 지금의 합이빈과 지금의 평양과 앞서 말한 불한의 옛 도읍인 지금의 개평 동북쪽 이 세 곳이다. 왕검성이란 이름을 가졌었을 것이니, 위만이 도읍한 왕검성은 곧 개평 동북쪽 이다. 한서지리지의, “요동군 ( 遼東郡 ) 험독현 ( 險瀆縣 : 註에 滿의 도읍이라 했다 ) ”이 그것이요, “마한의 왕도는 지금의 익산 ( 益山 ) 이다.” 라고 하나, 대개 잘못 전해진 것이다. 다음 장에서 논술할 것이다.

 

 

[조선상고사 (원본) / 삼조선(三朝鮮) 분립시대 - 제3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불朝鮮'"]

키스세븐지식은 키스세븐과 그룹 사이트입니다.

아래로 더 내려 가 보세요!

혹시 읽을만한 것이 또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

이 블로그를 북마크 하세요! 좋은 정보가 계속 이어집니다.
http://kiss7.tistory.com

공유하기 링크
필요하면 공유하세요 ^^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