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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 - 푸른 눈의 어머니로 불렸던 간호사(겸 선교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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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 - 푸른 눈의 어머니로 불렸던 간호사(겸 선교사)

키스세븐지식 2017. 3. 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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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 - 푸른 눈의 어머니로 불렸던 간호사(겸 선교사)]

테레사 수녀는 힘없고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사랑의 선교회를 통해서 빈민, 병자, 고아들을 위한 헌신을 보여주어 인류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존경받아 마땅한 봉사자들 중에는 이름 없이 살다간 사람도 많습니다. 그 중에서 조선의 테레사, 푸른 눈의 조선의 어머니로 불렸던 엘리자베스 쉐핑은 어렵던 조선말에 백성과 함께 했던 선교사이며 간호사입니다. 





[이 글의 순서]

1. 푸른 눈의 어머니라고 불린 서서평

2. 간호선교사로서의 엘리자베스 쉐핑

3. 엘리자베스 쉐핑의 공헌


푸른 눈의 어머니 서서평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백성들... 나라를 팔아넘긴 자들은 자손 대대로 풍요롭게 살 길이 열리는 순간이지만, 탐관오리들에게 수탈당하던 조선백성들에게는 더욱 피폐한 삶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힘없는 백성, 가난한 서민, 멸시받는 거지와 따돌림 받는 나병 환자들... '엘리자베스 쉐핑'은 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다가 간 '성자'였습니다. 조선인도 아니고 푸른 눈을 지닌 독일계 미국인이었던 쉐핑(서서평)은 나병환자들에게 조선인들의 푸른 눈의 어머니라 불렸으며, 조선의 테레사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사진: Elisabeth J. Shepping의 모습. 간호사이며 선교사였다. 조선말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을 위해 헌신한 성자다.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 - 푸른 눈의 어머니로 불렸던 간호사(겸 선교사)] (사진: Elisabeth J. Shepping의 모습. 간호사이며 선교사였다. 조선말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을 위해 헌신한 성자다.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 - 푸른 눈의 어머니로 불렸던 간호사(겸 선교사)] / ⓒ 미상)


어렵던 조선인들에게 푸른 눈의 어머니로 비유된 엘리자베스 쉐핑의 본래 이름은 '엘리제 요한나 쉐핑'입니다. 쉐핑이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건너가며 가진 이름이 엘리자베스 쉐핑입니다. 

그녀는 조선에 오며 '서서평'이란 이름을 가지기도 합니다. 32살에 조선에 와서 22년간 빈민자들을 위해서 헌신하였습니다. 1912년 서서평(쉐핑)은 조선어를 하고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으며 보리밥과 된장국을 먹은 조선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진: 독일 태생 미국인이었지만 죽을 때까지 오로지 조선인을 위해 봉사했던 엘리자베스 쉐핑.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푸른 눈의 어머니 서서평](사진: 독일 태생 미국인이었지만 죽을 때까지 오로지 조선인을 위해 봉사했던 엘리자베스 쉐핑.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푸른 눈의 어머니 서서평] / ⓒ Serving the People, www.kiss7.kr 편집)


엘리자베스 쉐핑은 선교사였습니다. 간호사로 조선에 파견되었지만,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는 것을 보고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서서평으로 살며 한국 간호학계의 기틀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흔히 문둥병이라고 부르는 나병(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소병환자의 치료에도 공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당시 조선인들에게 푸른 눈의 어머니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여성의 교육과 불우아동 봉사에 이르기까지 조선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사진: 사회적 냉대와 힘겨운 생계로 인해 힘겹게 살아가던 나병환자(한센병환자)를 희생적인 자세로 보살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푸른 눈의 어머니 서서평](사진: 사회적 냉대와 힘겨운 생계로 인해 힘겹게 살아가던 나병환자(한센병환자)를 희생적인 자세로 보살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푸른 눈의 어머니 서서평] / ⓒ christianreview.com.au)


당시 선교사는 생활비로 3원을 받았습니다. 엘리자베스 쉐핑은 그 중에서 자신을 위해 쓴 돈이 겨우 10전 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는 모두 불우한 조선인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불우한 아동들을 14명이나 입양해서 키웠고 '이일학교'와 '조선간호협회'도 세웠습니다. 

1934년 서서평이 운명할 때, 가지고 있던 것은 겨우 반장짜리 담요와 동전 7개였습니다. 풍토병과 과로로 숨졌지만, 놀랍게도 영양실조 증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침대 맡에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사진: 묘비에 한글로 서서평이라고 쓰여진 이름. 엘리자베스 쉐핑은 1910년대부터 22년간 조선인으로 살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푸른 눈의 어머니 서서평](사진: 묘비에 한글로 서서평이라고 쓰여진 이름. 엘리자베스 쉐핑은 1910년대부터 22년간 조선인으로 살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푸른 눈의 어머니 서서평] / ⓒ first.or.kr)





간호선교사 엘리자베스 쉐핑


조선의 테레사, 조선인들의 어머니, 푸른 눈의 어머니라고 불렸던 엘리자베스 쉐핑은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초년은 불행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한살 때 사망하고, 어머니는 미국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할머니 품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할머니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쉐핑은 카톨릭 교구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사망한 후 아홉 살의 엘리자베스는 고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어머니를 찾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사진: 다큐멘터리 영화 서서평에서의 어린 시절 장면 캡처. CGNTV에서 한국 선교사를 재조명하면 제작한 다큐영화다.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 - 푸른 눈의 어머니로 불렸던 간호사(겸 선교사)](사진: 다큐멘터리 영화 서서평에서의 어린 시절 장면 캡처. CGNTV에서 한국 선교사를 재조명하면 제작한 다큐영화다.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 - 푸른 눈의 어머니로 불렸던 간호사(겸 선교사)] / ⓒ cgntv.net)


쉐핑은 미국에서 어머니를 만나는데 성공하고 뉴욕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간호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탓인지 불쌍한 이웃을 돕는데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낮엔 간호사로, 밤에는 선교사로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이때 엘리자베스 쉐핑은 기독교로 개종을 했는데, 카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와 충돌이 있었고, 결국 어머니는 그녀를 내쫓아냈습니다. 그런 쉐핑에게 친구가 "조선에 훈련된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주었습니다. 그녀는 조선으로 갈 결심을 했고, 기독교 교파인 남장로회에서 파견을 해 주었습니다. 


사진: 1920년의 광주 제중원. 서서평은 이곳에서 근무하였다. 한국 간호계와 나병환자 복지, 간호협회 조직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간호선교사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의 삶)](사진: 1920년의 광주 제중원. 서서평은 이곳에서 근무하였다. 한국 간호계와 나병환자 복지, 간호협회 조직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간호선교사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의 삶)] / ⓒ gwangju.go.kr)


1912년 엘리자베스 쉐핑은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그녀는 한국어를 배우고 이름도 한국식으로 서서평이라고 지었습니다. 간호선교사로 새로운 삶을 맞는 기대감 가득한 시점이지만, 그녀에게는 조선인들의 현실이 참담하기만 했습니다. 처음 맡은 일은 전라도에서 간호사 양성과 기독교 선교활동이었습니다. 

그 후, 서울의 세브란스에서도 근무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이 터지자, 조선인들을 치료해 주고 독립운동가들의 옥바라지를 해주었다는 이유로 일제는 서울 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사진: 조선인들의 푸른 눈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당시 힘들었던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간호선교사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의 삶)](사진: 조선인들의 푸른 눈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당시 힘들었던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간호선교사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의 삶)] / ⓒ 미상)


1920년대에는 다시 전라도로 내려가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방문간호과 공중위생을 힘써 일했으며, 인신매매나 공창폐지운동에도 참가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쉐핑은 길을 가다가도 머리가 지저분한 여성을 보면 손수 빗질을 해 주고, 속옷이 보이거나 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여성이 있다면 옷매무새를 고쳐 주었다고 합니다. 

더불어, 노예처럼 살아가며 인신매매를 당하던 소녀들을 구출하여 교육해 주고, 사회봉사를 할 수 있는 인물들로 키워냈습니다. 서서평은 14명의 아이들을 입양해서 키우며, 나병환자의 아이들을 입양하도록 주변에 알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진: 입양한 고아들과의 사진들. 인신매매에 고통받거나 문둥병 환자의 자녀라서 고아처럼 살아야 하는 아동들을 14명이나 입양하여 길렀다. [간호선교사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의 삶)](사진: 입양한 고아들과의 사진들. 인신매매에 고통받거나 문둥병 환자의 자녀라서 고아처럼 살아야 하는 아동들을 14명이나 입양하여 길렀다. [간호선교사 엘리자베스 쉐핑(서서평의 삶)] / ⓒ 김용선)





엘리자베스 쉐핑의 공헌


태생은 독일계 미국인이지만 철저히 한국인으로 산 서서평. 그녀는 한국 나병환자에게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조선시대의 나병환자는 전염성 때문에 따돌림 받고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런 환자들을 보살피고 보듬어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도왔습니다. 쉐핑이 만든 나병환자 시설도 주변 주민들이 반발을 하여 결국 시외로 옮겨 새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쉐핑이 목사님과 서울에 상경했을 때 나병환자들이 모여서 대행진을 벌인 적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일제총독부는 결국 소록도에 나병환자 단독시설을 허락하고 지금의 국유지인 전남 소록도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사진: 1918년 세브란스 간호사 양성소 졸업 사진. 뒷줄 중간의 오른쪽이 쉐핑이다. 조선간호부회 설립 후 국제 ICN에 가입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엘리자베스 쉐핑의 공헌 - 푸른 눈의 어머니 서서평](사진: 1918년 세브란스 간호사 양성소 졸업 사진. 뒷줄 중간의 오른쪽이 쉐핑이다. 조선간호부회 설립 후 국제 ICN에 가입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엘리자베스 쉐핑의 공헌 - 푸른 눈의 어머니 서서평] / ⓒ 미상)


또한 서서평이 1922년 이일학교를 설립한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처음엔 학대받는 여성들, 배울 기회를 못 가진 여성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침실에 모여 하던 공부를, 미국인 친구의 후원을 얻어 정식으로 지은 것이 이일학교입니다. 학교 이름이 이일인 것은 미국 친구의 이름이 Neel이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지금의 '한일장신대학'입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쉐핑이 선교사였기에, 조선인들에게 성경의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해방의 꿈을 가지도록 도와주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월급을 쪼개서 운영비를 마련하며 시작한 이 사업은 한국의 문맹퇴치에도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사진: 여성에 대한 인격권도 모르던 시절, 이일학교를 설립하여 여성교육에도 이바지하였다. 이름 없이 살아가는 조선여인들의 현실을 안타까워하였다. [엘리자베스 쉐핑의 공헌 - 푸른 눈의 어머니 서서평](사진: 여성에 대한 인격권도 모르던 시절, 이일학교를 설립하여 여성교육에도 이바지하였다. 이름 없이 살아가는 조선여인들의 현실을 안타까워하였다. [엘리자베스 쉐핑의 공헌 - 푸른 눈의 어머니 서서평] / ⓒ 미상)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여성의 지위는 매우 낮았으며, 힘없는 계층의 여자들은 성매매에 희생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한 달이나 걸려 봉사를 다녀온 어느 날, 엘리자베스 쉐핑은 조선 여인들의 인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부인이면 "대전댁"같은 명칭을, 어리면 "큰년, 작은년"같은 명칭을 이름대신 불리며, 자기 인격권이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못하고 사는 여성들을 위해서도 일했습니다. 

또한 1923년엔 조선간호부회를 조직하여 국제간호협의회에 가입시키려고 노력했고, 이것이 지금의 한국 간호협회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저작권법 표시] 이 글의 원본: 키스세븐(www.kiss7.kr)


사진: 교회활동에 참가한 모습과 말년의 서서평 사진. (사진: 교회활동에 참가한 모습과 말년의 서서평 사진.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라는 문구로 교훈을 주는 조선의 테레사였다. [엘리자베스 쉐핑의 공헌 - 푸른 눈의 어머니 서서평] / ⓒ 강경구)


엘리자베스 쉐핑은 1934년 만성풍토병과 과로로 숨졌습니다. 그녀가 남긴 것은 동전 7개와 강냉이가루 조금, 그리고 담요 반장이었습니다. 그나마 있던 담요마저도 길거리의 거지를 위해 반을 잘라주었기 때문입니다. 서서평의 장례식에는 도움을 받은 수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조선인을 위한 푸른 눈의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유언에 따라 시신도 의학연구용으로 기증되었습니다. 

침대 맡에 있던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라는 문구는, 이기적인 행복만을 쫓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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